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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예수 · 백광현 · 황도연 · 이제마 등 '醫風 당당'
<의림촬요(醫林撮要)> 편찬자(부분 편찬 ·부분 교정)이자 조선 선조대 명의로 허 준과 쌍벽을 이루었던 양예수(1530?~1584)는 최근에 와서 후학들의 덕을 가장 톡톡히 보고 있는 인물이다. 종전까지 양예수는 줄곧 허준의 명성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다.
최근 나온 각종 연구 성과에 따르면, 양예수는 조선 중기 의학을 한 단계 도약시킨 인물이다. 그가 편찬에 참여했던 <의림촬요>는 <동의보감>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아울러 그는 <동의보감> 편찬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관련 기록에 따르면, 양예수는 의사로서 능력도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임진왜란 때 황해도 해주로 피난한 중전을 호종했으며, 선조와 세자의 질병을 치료하기도 했다. '의사로서는 허준보다 한 발짝 앞섰을 수도 있다'는 것이 현재 이방면 연구자들의 추측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지만 조선 시대 현종때 활약했던 백광현(1625~1697)은 '뛰어난 침술가'로서 전설과 같은 활약상이 사료에 전한다. 침술로 현종과 효종비 인선왕후의 종기를 완치시킨 것으로 잘 알려진 그에 대해서는, 일찍이 1950년대에 전통 의학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김두종 박사(작고)가 자신의 저서<한국 의학사>에, 그에 관한 이야기를 쓰기 위해 따로 한 절을 할애했을 정도이다. 이에 따르면, 독학으로 의술을 공부한 백광현은 특히 종기치료에 뛰어나 '신의(神醫)'라는 별명을 얻었다.
<동의보감>으로 논리적 체계를 갖춘 전통 의학계는 조선 후기에 이르러 몇몇 출중한 의가들이 출현하자 대중화 길을 걷게 된다. <제중신편(濟衆新編)>을 지은 강명길(1737~1800), 아들과 함께<방약합편(方藥合編)>을 지은 황도연(1807~1884)등은 이 시대를 대표한 의사 겸 의학자라 할 수 있다.
조선 후기 영조대에 의과에 급제해 궁중 의사 생활을 시작한 강명길은, '어의'로 정조의 병을 돌보다가 왕이 죽는 바람에 처형된 비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하지만 의학사적으로 그가 펴낸 <제중신편>(8권)은 연구자들에 의해 그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걸작이다.
<제중신편>은 단순히 <동의보감>을 잘 요약해 의학을 대중화한 의서로서만 알려져 왔다. 그러나 최근 이 책의 내용을 좀더 찬찬히 살펴본 지창영씨(경희대 한의학과 박사과정)에 따르면, <제중신편>은 전체적으로는 <동의보감>을 요약했지만, 부분적으로는 <동의보감>의 한계를 뛰어넘는 임상 경험과 의학 정보를 담고 있다.
<방약합편> 말고도 <의종손익>같은 저서를 남긴 황도연은 특히 의학 대중화 관점에서 주목되는 의사 겸 의학자이다. 그는 철종 때부터 고종 즉위 무렵까지 서울 무교동에 개업해 명성을 떨쳤던 인물. 그가 펴낸 의서 중 <방약합편>은 그동안 한의학계 일부에서 '지나치게 의학 이론을 단순화해 돌팔이 의사를 양산시켰다'는 비난을 받아 왔다. 그런데 최근 그같은 단순화 작업이 오히려 재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의료사가인 신동원씨는 자신의 책 <조선사람의 생로병사>에서 "조선시대 최고 의서로 서슴지 않고 <방약합편>을 꼽겠다"라고 말할 정도로 극찬하고 있다.
일부 의학사 연구자 사이에서 '전통 의학의 최대 기린아'로 평가되는 동무 이제마(1837~1900)는 의사로서보다는, 이른바 '사상의학(四象醫學)'을 창시한 의학 이론가로서 전통 시대의 최후를 장식한 인물로 꼽힌다. 현재 그가 남긴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은 적어도 종래 한의학의 전통을 깨뜨렸다는 측면에서는 이의가 제기되지 않는 독창적인 저술로 평가되고 있다. 한의학계 내부에서는 그의 학설을 추종하며 연구하는 학파가 따로 큰 산맥을 형성할 정도로 현재 한의학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