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의 진영 대결 정치 비판했던 윤석열 대통령
한술 더 뜬 보수우파 진영만의 대통령 돼…국민 전체 껴안는 대통령 돼야
“대통령부터 국민의 뜻을 잘 살피고 받들지 못해 죄송하다.” 22대 총선이 집권여당의 역대급 참패로 끝난 지 엿새 만에 윤석열 대통령이 총선 결과에 대해 정식으로 사과했다. 윤 대통령은 4월16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주재한 국무회의와 참모진 회의에서 “대통령인 저부터 잘못했다”며 이같이 사과한 것이다. 윤 대통령은 국무회의에 참석한 장관들을 포함한 공직자들도 국민과 더 소통을 강화해 달라고 주문하면서 자신도 더 소통을 강화하겠다고 했다. 국무회의 모두발언에서도 윤 대통령은 “더 낮은 자세와 더 유연한 태도로 보다 많이 소통하고, 저부터 민심을 경청하겠다”고 말했다.
왜 이런 사과도 대국민 담화나 기자회견 같은 대국민 직접 소통 방식을 피하고 참모들에게 말하는 방식을 취하느냐는 지적도 있지만, 일단 내용만큼은 이전까지 윤 대통령의 모습에 비하면 진일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번 총선에서 정권 심판의 태풍을 만들었던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민심에 귀를 닫고 일방적인 국정 운영을 했던 ‘평생 검사’ 출신 대통령의 태도에 대한 반감이 가장 컸다. 국민과 소통하겠다며 청와대로 들어가지 않고 굳이 용산 집무실로 이전했던 대통령이다. 그런데 스스로 소통의 상징처럼 여겼던 출근길 도어스테핑도 몇 차례의 설화가 있자 중단했다. 급기야는 신년 기자회견도 김건희 여사가 받은 ‘명품백’인지 ‘파우치’인지에 대한 얘기가 나올까 겁이 나서 KBS 단독대담으로 대신하는 광경이 벌어졌다. 누구보다 소통을 다짐하며 당선된 대통령이 누구보다도 불통하는 모습을 보였으니 국민이 받았을 배신감이 정권 심판의 표심이 된 것이다.
작년 강서구청장 보선 패배 후 했던 말 반복
윤 대통령이 소통과 경청의 다짐을 했으니까 이제는 달라질 것인가. 그렇게 기대와 희망이 섞인 전망만 하기에는 안고 있는 문제가 하나둘이 아니다. 윤 대통령이 꺼낸 말들은 대부분 지난해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패배 후에도 했던 말들이다. 6개월 전에도 윤 대통령은 “국민은 늘 무조건 옳다”며 “민생 현장에 더 들어가 챙겨야 한다”고 참모들에게 주문했다. 느닷없이 “이념이 제일 중요하다”며 이념전쟁의 선봉에 섰던 윤 대통령의 독단적 국정 운영에 대한 심판이 선거 결과로 나타나자 ‘민생’과 ‘소통’을 강조하며 민심을 회복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불과 반년 만에 윤 대통령은 같은 내용의 반성문을 써야 하는 처지가 됐다. 당시의 반성이 허언이 되었다는 얘기이기도 하고, 반성이 구체적이지 못하고 추상적인 공론에 그친 결과라는 얘기이기도 하다. 당시 윤 대통령은 “국민은 늘 무조건 옳다”고 했지만, 국민의 눈에는 윤 대통령이 “나는 늘 무조건 옳다”는 독선에 여전히 갇혀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제는 지나간 얘기지만 윤 대통령의 집권 이후 가장 큰 패착은 보수-중도 연합이라는 선거연합을 스스로 해체한 일이었다. 지난 대선에서 만약 윤 대통령이 안철수 후보와 단일화하고 국민 대통합 노선을 내거는 등의 방식으로 중도층과의 연합을 구축하지 않았다면 이재명 민주당 후보에게 0.73%포인트 차이로라도 이겨 대통령에 당선되는 일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자신이 잘해서 대통령이 되었다는 오만한 착각을 하면서 자기와 다른 사람들은 가차 없이 내치는 배제의 정치를 했다. 후보 단일화의 공신인 안철수, 그래도 대선 승리의 공신이었던 이준석, 감히 ‘친윤’과 당권 경쟁을 벌이려 했던 나경원, 쓴소리를 주저하지 않았던 유승민 등이 모두 변방으로 밀려났다. 야당에 대해서는 이재명 대표가 ‘피의자’라는 이유로 한 번도 만나지 않는 협량의 정치를 했다. 자신이 소속된 여당이 국회 소수파라는 현실을 망각한 채 감당할 수 없는 나홀로 정치를 자초했던 것이다.
윤 대통령의 이번 사과에서도 구체적인 방법론은 나오지 않는다. 자칫하면 6개월 전에도 그랬듯이 립서비스로 끝나고 실질적인 국정 쇄신은 없을지 모른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기자들과 만나 “국정의 방향은 옳지만, 그 국정을 운영하는 스타일과 소통 방식에 문제가 있지 않느냐가 절대 다수 의견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역시 대통령을 둘러싸고 있는 참모들의 인식 자체부터가 문제다. 문제는 기술적이거나 방법적인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국정 운영의 방향 자체에부터 있기 때문이다. 어째서 국민 전체를 껴안는 대통령이 되려 하지 못하고 ‘보수우파’ 진영만의 대통령이 되려 하는지, 윤 대통령은 근본적으로 이 질문에 답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 시절의 진영 대결 정치를 비판하면서 집권한 것이 윤석열 정부였다. 그런데 윤 대통령이 한술 더 떠 강성 우파들에 둘러싸이고 휘둘리는 국정 운영을 해왔으니, 내로남불도 그런 내로남불이 없다.
이러한 문제를 단순히 스타일과 소통 방식의 문제로만 인식하기에는 이미 너무 나가버렸다. 좀 더 근본적인 국정 노선의 변화와 쇄신, 그러니까 우파뿐 아니라 중도층 혹은 이번에 야당을 찍은 국민의 지지까지도 되찾을 수 있을 정도의 담대한 변화가 요구된다. 인적 쇄신에 있어서는 대통령에게 고언을 주저하지 않을 수 있는 정무적 판단력을 가진 탕평 인사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윤 대통령이 언제나 들어온 얘기는 자신의 의견이 워낙 강해 참모들이 다른 의견을 내놓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지금 윤석열 대통령의 적은 ‘윤석열’
야당이 파상적으로 요구하는 특검법 가운데서도 우선 채 상병 특검법에 대해서는 여야 합의 처리의 길을 여는 과감한 결단이 필요하다. 폭우 사태 속에서 실종자 수색작업을 하던 장병이 사망했는데 해병대 수사단의 수사 과정에 상부의 압력에 따른 진상 은폐의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는 군의 명예나 사기와 직결된 사안으로, 다른 특검법과는 달리 보수정권이 반대할 명분이 없다. 이종섭 전 호주대사의 임명과 출국이 총선 기간에 민심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음을 생각한다면 이 문제는 윤 대통령이 얼마나 달라지는가를 가늠하는 시금석이 될 수도 있다.
김건희 여사 특검법 전체에 대해서야 여전히 여야의 이견이 있겠지만, 최소한 ‘명품백’이 어떻게 처리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책임 있는 설명도 필요하다. 더 이상 민심을 받들겠다거나 소통하겠다는 말로만 민심을 수습할 단계는 지났다. 하나하나의 이슈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결정을 내려야 그 말에 신뢰가 부여된다. 그런데 우리가 알던 윤 대통령이 과연 그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지금 윤석열의 적은 윤석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