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김가람이 묻지마 범죄 피해 후 1년 만에 털어놓는 이야기
극심한 신체적 고통과 정신적 스트레스에 내몰리는 피해자 현실 고발
“뻑!” 주먹이 왼쪽 뺨에 날아들었다. 맞은 여성은 크게 휘청였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할 정도로 난데없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여성이 떨리는 손으로 뺨을 감싸쥐고 가해 남성을 쳐다봤다. 모르는 사람이었다. 남성은 무표정에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유유히 가던 길을 갔다. “저기요… 저기요!” 겨우 들숨을 크게 쉬고 불러봤지만 남성은 아랑곳없이 멀어져 갔다.
딱 1년 전인 지난해 10월15일 밤 피아니스트 김가람(36)이 서울 용산구 한남동 길거리에서 당한 일이다. 이른바 ‘묻지마 폭행’이다. 이날 김가람은 예술감독이자 연주자로 참여한 자선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여느 공연일처럼 저녁식사를 겸한 뒤풀이가 이어졌고, 김가람은 다른 참석자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먼저 귀가하는 지인을 배웅하러 잠시 나왔을 때까지도 불행의 전조는 전혀 없었다. 지인을 태운 택시가 떠난 순간, 사건이 벌어졌다.
가해자 “여자가 꿀 빠는 게 싫어 때렸다”
가해자를 쫓아갔다간 더 큰 피해를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김가람은 곧장 뒤풀이 장소로 돌아갔다. “맞았어요, 나.” 그의 한마디에 모두가 자리를 박차고 나섰다. 가해자는 놀랍게도 사건 현장 근처에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뒤풀이 참석자 중 한 명이었던 친동생이 가해자와 대면해 그가 모 부대 소속인 20대 초반 병장이란 사실을 알아냈다. 가해자는 말년 휴가 기간에 범행을 저지른 것이었다. 왜 그랬냐고 묻자 “여자가 꿀 빠는(편하게 지내는) 게 싫고 웃고 있는 모습도 꼴 보기 싫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어 가해자는 “당장 내일 죽어도 상관없으니 잡아가라”고 배짱을 부렸다.
신고를 받은 경찰이 현장에 도착했다. 경찰관들은 김가람을 통해 사건 경위를 파악했다. 김가람은 요동치는 마음을 애써 부여잡고 경찰과 대화했다. 어느새 시간은 자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진술서도 써야 하니 경찰서로 가자는 경찰관들에게 김가람은 조심스레 내일 하면 안 되겠느냐고 물었다. 일단 오늘 상황을 일단락해야 동행해준 이들이 집에 갈 수 있겠다 싶었다. 경찰관들은 내일 거주지 관할 경찰서에 가서 진술서를 작성해도 된다는 안내를 남기고 사라졌다.
다음 날 김가람은 진술서를 쓰러 경찰서에 갔다가 처참히 무너졌다. 경찰이 가해자의 신원을 모르고 있어서였다. 알고 보니 사건 당일 현장에 출동한 경찰관들은 바로 경찰서에 가지 않은 김가람을 당장은 정식으로 신고할 의향이 없는 사람으로 간주했다. 이에 ‘신고를 당하지 않은’ 가해자에 대해서도 아무런 조사를 하지 않고 그대로 풀어줬다. 김가람은 황당함과 자책, 원망과 염려 등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무엇보다 가해자를 붙잡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치가 떨렸다.
병원에서는 다친 왼뺨과 목 등을 완전히 치료하는 데 4주가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김가람은 귓속이나 머릿속에서 ‘삐-’ 하는 소리도 느끼기 시작했다. 이명(耳鳴)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사건 담당 경찰서가 얼마 후 터진 이태원 참사로 격랑 속에 빠져들었다. 범인 검거는 더욱 지연됐다. 개인의 인생을 뒤흔드는 사건에 사회적 충격까지 더해지자 김가람은 그로기 상태로 몰렸다. 이명 증상이 잦아졌다. 피아노 연습을 할 때도 예외가 아니었다. 피아니스트 커리어 전체를 위협할 만한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피해만으로도 버거운데 후속 절차 ‘첩첩산중’
칠흑 같은 두 달이 흘렀다. 경찰은 CCTV 추적 등을 거쳐 가까스로 가해자를 검거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가해자 측은 즉시 변호사를 선임해 합의를 시도했다. 김가람은 이제 가해자의 변호사와 지난한 논의를 펼쳐야 했다. 변호사는 가해자가 범행 당시 술을 많이 마신 상태였다고 주장했다. 김가람의 기억 속 가해자는 술 냄새를 풍기지 않았고 취한 기색도 없었다. 김가람은 해당 사실을 전하며 “심각한 정신적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는 가해자에게 ‘만취로 인한 심신미약 상태’란 방패를 쥐여줘선 안 된다”고 반박했다.
가해자를 법정에 세우려니 소송 과정에서의 정신적·물질적 부담이 먼저 마음에 걸렸다. 주변에서도 소송으로 갈 경우 가해자가 심신미약을 계속 주장하다가 얼마 안 되는 벌금을 내는 데 그칠 것이라는 예상이 주를 이뤘다. 김가람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다. 급기야 김가람은 가해자 측에 “설사 법적 처벌을 받지 않더라도 치료 없이 이렇게 어물쩍 넘어가 버린다면 차후에 같은 사건이 반복될 게 뻔하다”면서 정신과 진단과 치료를 받으라고 호소했다. 이런 김가람의 말은 ‘입바른 소리’로 치부되며 튕겨 나올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해가 바뀌었다. 예정된 세종문화회관 독주회 날짜도 점점 다가왔다. 전쟁과 전염병, 재해 등 악재가 쉴 새 없이 전 세계를 덮치고 있는 가운데 인류의 안전과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 구상한 공연이었다. 프로코피예프의 ‘전쟁 소나타’ 세 곡(《피아노 소나타》 6, 7, 8번)이 우선 레퍼토리에 포함됐다. 평화에 관한 연주곡을 덧붙여 ‘전쟁과 평화’라는 콘셉트를 갖추려던 참이었다. 김가람은 좀처럼 콘셉트를 확정하지 못했다. 전쟁은 몰라도 평화는 너무나 허망하고 머나먼 개념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나면 평화가 오는가’ ‘진정한 승자도 패자도 없이 혼돈만 남는 상태를 과연 평화라 할 수 있는가’ ‘전쟁 같은 나의 현실에는 평화가 깃들 가능성이 있는가’ 등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김가람은 작곡가 류재준과 고민을 나눴다. 류재준은 김가람과 대화한 후 《라멘트(Lament)》라는 곡을 써줬다. 애가(哀歌)란 뜻의 라멘트는 히브리에서 국가적 재난이 발생했을 때 악기를 연주하며 슬피 울부짖던 데서 유래한 단어다. 참아온 눈물과 울분을 쏟아내고 싶었던 김가람에게 《라멘트》는 적확한 위로가 돼줬다. 연습하면 할수록 응어리가 조금씩 풀려 갔다. 올해 2월10일 김가람은 《라멘트》를 타이틀로 내세운 독주회에서 얼어붙은 마음을 남김없이 녹여 냈다. 연주가 모두 끝나자 뜨거운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김가람은 웃지 못했다. 그러나 굳은 얼굴도 아니었다. 가슴을 치며 펑펑 울고 소리 지른 후의 후련함이 드러나는 표정이었다.
공연으로 고통 승화…“의문 곱씹어 나갈 것”
김가람은 공연을 마치고 가해자 측과 합의했다. 화해가 포함돼 있지 않은 찜찜한 합의였다. 김가람은 합의금을 기독교 선교 단체에 기부했다. 어느덧 사건 후 1년이 지났다. 이명 증상은 여전하지만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김가람은 자신의 내면을 넘어선 ‘라멘트’를 실현하려 시사저널에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사회적인 이야기를 꺼내 놨다. 이제 기회가 닿는 대로 묻지마 폭행에 관해 곱씹고 애통해하고 위로하고 질문해 나갈 계획이다.
한편 경찰청이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정우택 국민의힘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올 상반기(1∼6월) 살인·상해·폭행 사건 가운데 ‘사회에 대한 적대감’이 범행 동기로 파악된 사건은 64건, ‘제3자 대상 분풀이’는 861건이었다. 전체 925건에서 폭행 사건이 554건이었다. 사회 적대감에서 비롯된 사건 중 단순 폭행이 38건(59.4%)으로 가장 많았다. 제3자 분풀이 사건 역시 단순 폭행이 507건으로 58.9%를 차지했고 폭행치상이 9건(1.0%)이었다. 모르는 사람에게, 또는 길을 가다가 이유 없이 맞는 묻지마 폭행 사건이 하루 평균 3.06건 발생한 셈이다. 묻지마 범죄의 개념을 분명히 하고 가중 처벌을 추진하는 등의 법률 개정안은 국회에 계류된 상태다.
■ 피아니스트 김가람은 누구
해발 5416m 히말라야에서 콘서트 열었던 ‘행동하는 예술가’
8년 전인 2015년 10월21일 피아니스트 김가람은 히말라야산맥의 해발 5416m 지점에 있었다. 안나푸르나 트레킹 코스 가운데 가장 높은 지점인 ‘토롱라 패스’에서 콘서트를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이 무모한 연주는 그해 대지진으로 상처 입은 네팔을 보듬으며 평화를 연주하고자 기획됐다. 김가람은 콘서트 출연료를 전액 기부하기로 하고 프로젝트에 동참했다.
앞서 13일 동안 걸으며 난생처음 경험한 히말라야산맥은 제 한 몸도 제대로 건사하기 힘든 난관이었다. 고지대에서는 산소 밀도가 낮아져 숨 쉬기조차 버겁다. 광활한 대산맥의 고개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리기나 할지도 장담할 수 없었다. 분해해 가져온 피아노를 조립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파손된 부분이 눈에 띄었다. 심장이 덜컥했다. 천만다행으로 액션(건반에 가해진 힘을 해머로 전달하고 현을 진동시키는 연동 장치) 등 핵심 구성품은 상하지 않았다.
김가람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피아노 앞에 앉았다. 우리 민요 《아리랑》의 아름다운 선율이 바람을 타고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주변의 높은 산봉우리들이 피아노 소리를 감싸며 엄청난 울림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전에 한 번도 듣지 못한 황홀한 소리였다. 전 세계에서 모여든 등반객과 현지 주민 등 100여 명이 감동을 함께 나눴다.
‘가장 높은 곳에서 연 피아노 콘서트’로 세운 기네스 세계 기록은 세간에서 금세 잊혔다. 김가람에게 실질적으로 남은 자산은 자연이 선사한 공명(共鳴)의 기억이다. 토롱라 패스에서 느낀 소리를 잊지 않으려 김가람은 부단히 노력해 왔다. 예술가로서 자기 이름을 드러내기보다 주변에 선한 영향을 전하는 데 더 주력하는 삶도 이와 맞닿아 있다.
프랑스 파리국립고등음악원·영국 왕립음악원 수학, 일 드 프랑스 국제 피아노 콩쿠르 우승, 유럽과 아시아를 넘나드는 연주와 기획 활동 등 화려한 경력을 보유했지만, 김가람은 여느 엘리트 음악가들과 구별되는 행보를 이어가는 모습이다. 2021년 7월 아파트라는 공간에서 일어나는 우리 사회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가사에 담은 2인 가극 《아파트》에 참여한 것을 비롯해 같은 해 12월 코로나19 시대를 지나며 혼돈을 겪는 대중에게 인문학적 메시지를 던지는 《시간의 종말(End of Time)》 음악 비디오 공개, 역경을 뚫고 소화한 올해 2월 독주회 《라멘트》까지 멈추지 않고 걸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