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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 별보다 많은 점과 하늘 끝 닿았을 선
한국 추상미술의 첫 장을 열다
김환기의 작품은 단지 점, 선, 면 혹은 색채라는 조형언어로 가득한 추상이 아니라 눈이 움직여 화면을 훑어가고 그 과정에서 마음이 움직여 형상을 만들어내 공감하게 되는 서정적인 것이다. 감상자는 화면에 찍힌 점 하나, 흩어진 붓질 흔적에 화가의 손을 떠올리며 그의 신체를 느낀다. 화면에 스며든 작가의 영혼이라는 다소 낭만적인 감정을 가장 기본적인 조형 요소인 점으로 가득한 화면에서 경험하는 것은 참으로 생소한 일이다. 그럼에도 정서적인 익숙함은 바탕에 스미는 물감의 파동 그리고 넘치는 푸른색과 노란색, 검은색의 향연이 익히 봐오던 동양화의 그것과 그리 멀리 있지 않기 때문이다. “눈을 감으면 환히 보이는 무지개보다 더 환해지는 우리 강산(天下)”(1970년 1월27일 김환기 일기)이라던 김환기의 그리움은 서양의 대명사인 뉴욕 한복판에서 면과 모필과 아교를 사용한 화면에 그렇게 가시화한 것이다. 한복 입은 젊은 여성이 머리에 바구니를 이고 있고 배경으로 푸른 바다가 보이는 《종달새 노래할 때》(1935년)는 일본에서 공모전 ‘이과전’에서 입선함으로써 그가 화가로서 인정받은 최초의 작품이다. 그의 고향집 누이동생이 모델이었다는데 이처럼 김환기는 바다를 보고 자랐다. 동학난으로 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도로 근거를 옮긴 선비이자 지주인 김상현의 1남 4녀 중 외아들이 바로 그였다. 전답이 풍성한 고향이었지만 친구들이 어느 정도 작은 섬이냐고 물으면 ‘공이 바다에 빠질까 봐 축구를 못 한다’고 답했다니 때때로 동료 교수이자 평론가인 이경성(李慶成·1919~2009)이 일화를 들어 설명하곤 한 그의 대범한 품성은 타고난 것이었다. 일찍부터 모더니즘에 눈떴으며, 현재 우리나라에 전하는 가장 오래된 추상화인 《론도》(1938)는 작품명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중학생 시절 내내 바이올린을 했다던 그의 음악적 소양을 보여준다. 음율과 조화, 그의 작품에서 점은 그냥 추상의 점이 아니라 소리이자 감정으로서 음악과 같은 구조다. 이를테면 고국에서 뻐꾸기가 운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은 날(1970년 6월23일), 뻐꾸기 노래를 생각하며 하루 종일 푸른 점을 찍고, 맨해튼의 지하철을 타고 뻐꾸기 노래를 생각하는 식인 것이다. 이렇게 외형으로 대상을 재현하지 않는 완벽한 추상은 그의 뉴욕 시기에 이르러 완성됐다. 하지만 뻐꾸기 소리가 원래 그렇게 있는 것처럼 그에게 “미술은 철학도 미학도 아니다. 하늘, 바다, 산, 바위처럼 있는 거다. 꽃의 개념이 생기기 전, 꽃이란 이름이 있기 전을 생각해 보라. 막연한 추상일 뿐”(1972년 10월8일)인 것이었다. 스스로 그렇게 되는 것. 뉴욕에서도 정독했다던 노자(道德经)의 사상은 그 생애 전반을 가로지르는 우주 질서에 대한 깨달음과 동의어이기도 하다. 김환기는 전라도 신안에서 공부하러 서울로, 서울에서 일본으로 가서 중학교와 미술학교를 나오고, 다시 서울로 와서 활동하다가 서울대 미술학부 교수가 되었다가 이른바 국대안으로 사직서를 낸 후 술과 풍류로 지냈다. 6·25 전쟁기에는 부산 피난지에서 홍익대 교수가 되어 환도한 서울에서 활동하다가 1956년 김용준(金瑢俊·1904~1967)의 노시산방을 이어받은 성북동의 아끼던 집을 판 돈을 유학 자금 삼아 파리로 가서 그림을 그렸다. 3년간의 파리 생활 후 1959년 다시 서울로 돌아와 홍익대에 복직한 후 1963년 상파울루비엔날레 참여차 브라질로 갔다가 뉴욕에 정착해 그림을 그리다가 그곳에서 생애를 마쳤다. 당대 한국 작가로서는 움직임의 영역이 넓은 편이었고, 고국에 든든한 기반이 있는 작가가 이점을 버리고 타국에서 새로이 시작한 보기 드문 경우였다.조국·백자·자연이 하나의 의미로 통용
김환기의 작품세계는 일반적으로 그가 거주했던 지역을 중심으로 학습과 추상미술을 발견한 일본 시대, 백자와 자연을 주제로 한 서울과 파리 시대, 완벽한 추상의 점화를 이룩한 뉴욕 시대로 구분한다. 한 작가의 생애가 예술의 여정을 노정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서구의 추상적 조형언어를 추구하면서도 민족적 자의식을 깊이 새기고 있는 것 또한 특이점이다. 특히 6·25 전쟁을 경험하며 그의 화면은 동양화에서 작관, 문자를 작품 안에 넣기, 세로로 글쓰기와 같은 전통의 요소를 서양화로 표현해 내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달을 백자처럼 그린 것에 대해서는 “달의 형태가 항아리처럼 둥근 것이어서도 그렇고 그 내용이 항아리처럼 은은한 것이어서 그런지도 모른다”(김환기, 《둥근 달과 항아리》)고 했고 “둥근 하늘과 둥근 항아리와/푸른 하늘과 흰 항아리와/틀림없는 한쌍이다.”(김환기, 《이조항아리》)라며 자연과 백자에서 자연의 미를 읽어내기도 했다. 그에게 조국, 백자, 자연 모두가 하나의 의미로 통용됐고 조형화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술을 마셔야 천재가 된다. 내가 그리는 선(線), 하늘 끝에 더 갔을까. 내가 찍은 점(點). 저 총총히 빛나는 별만큼이나 했을까”라는 김환기의 읊조림을 1970년 한국일보사 주최 한국미술대상전 작품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에서 만나게 된다. 그의 짤막한 하루를 정리하는 글에서 우리는 자신을 놓아버린 동양 화가의 경지인 ‘술을 마셔야 천재가 된다’는 문구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얼마나 많은 선을 긋고 점을 찍은 정직한 노동의 화가였는지 새삼 눈시울이 붉어지게 되는 것이다. “바자렐리, 뒤뷔페, 미로, 또 누구누구. 역시 피카소와 내가 제일인 것 같다”(1972년 4월 5일)는 김환기의 말은 마지막 두 개의 아랫니까지 뽑아야 하는 고통과 온몸이 괴로운 통증 속에서도 붓을 들고 스스로 캔버스를 만들던 작가의 투혼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의 화면 안에서 빛나는 점은 적어도 우리 눈앞에 생성된 우주라는 점에서는 하늘의 별에 못하지 않다는 생각으로 고개를 주억거리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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