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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위에서 주목받는 주연과 대체 배우인 ‘앙상블’의 세계

뮤지컬 《42번가》는 브로드웨이에서 한물간 여배우 도로시 브록이 연습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발목 골절상으로 중도하차하고, 앙상블 배역을 맡고 있던 신인 배우 페기 소여가 단숨에 그가 맡고 있던 여주인공 자리에 올라선다는 일종의 신데렐라 스토리다. 극 중에서 연출가 줄리앙 마쉬는 주역을 맡아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초짜 배우의 숨은 실력만을 믿고 모험을 했다. 그녀가 이 공연을 통해 새로운 스타가 될 것임을 확신하며 ‘스타가 없는 쇼는 의미가 없다’는 말로 갑자기 주어진 큰 기회 앞에서 망설이는 페기 소여의 마음을 다독인다.
뮤지컬 《아이다》(왼쪽)와 《모래시계》 무대 한 장면ⓒ신시컴퍼니·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제공
뮤지컬 《아이다》 무대 한 장면ⓒ신시컴퍼니 제공
뮤지컬 《아이다》(왼쪽)와 《모래시계》 무대 한 장면ⓒ신시컴퍼니·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제공
뮤지컬 《모래시계》 무대 한 장면ⓒ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제공

감초라고요? 아니요, 주인공입니다

과연 현실의 뮤지컬 공연 무대에서도 페기 소여의 성공 스토리가 가능할까. 몇 년 전 우리나라에서 유명 여배우가 공연을 앞두고 몸에 통증을 호소해 무대에 참석할 수 없는 상황이 있었다. 배우는 기계가 아니기에 컨디션 조절에 실패하거나 급작스러운 질병을 겪을 수 있다. 하지만 그다음은 달랐다. 관객이 객석을 가득 메운 상태에서 저녁 공연의 막이 오르기 직전, 제작사는 내부적으로 공연 취소를 결정했다. 《42번가》의 줄리앙 마쉬가 그랬던 것처럼 유명 여배우가 직접 무대에 나와 관객에게 공연 취소를 알리며 양해를 구했고 제작사는 곧바로 환불 안내에 들어갔다. 공연은 해피엔딩이지만 현실은 새드엔딩이었다. 아쉽게도 아픈 도로시만 있었고 훈련된 페기는 없었던 것이다. 서구 뮤지컬계에서는 오랜 시간 검증된 위기 관리 시스템인 ‘원캐스트 주역 배우’와 이를 대신하는 ‘언더스터디 대역 배우’ 시스템이 공존한다. 미국 브로드웨이나 영국 웨스트엔드에서는 극의 핵심을 맡은 주연 배우들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무대에 서지 못하는 날을 대비해 주당 8회 공연이 이뤄지는 극장에서 주연배우 옆에서 앙상블로 출연하고 있는 언더스터디(understudy)가 그 역할을 대신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커버(cover)’라고 불리기도 한다. 당연히 그 주역의 대사와 노래를 완벽하게 숙지하게끔 훈련받았고, 무대에 오르게 되면 주연배우의 의상과 가발도 물려받는다. 물론 스타 배우를 기다려왔던 관객들에게 등장만으로 카리스마를 발휘할 수는 없겠지만 그들의 실력은 최소한 그 작품에서만은 주연급에 버금가게 뛰어나다. 물론 그 대역이 공연을 깔끔하게 잘 마치고 박수까지 받고 공연을 마쳐도 매표소에서는 환불을 요구하며 항의하는 관객은 반드시 있을 수 있다. 그들이 보고 싶어 했던 것은 유명 배우지 무명의 배우가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이브 엔터테인먼트에서는 배우의 급작스러운 대체도 공연의 일부라는 인식이 있다.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 모르는 사고를 대비한 ‘차선’의 길을 마련하는 것이 제작사가 공연을 취소하는 것보다는 낫기에 앙상블들이 벼락 스타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둔 것이다. 뮤지컬에서 앙상블이란 적은 숫자의 주·조연 배우들 뒤에서 무대의 공간을 채워주고 캐릭터로는 단역, 음악으로는 합창, 춤으로는 군무로 전체의 일부가 돼주는 다수의 배우를 일컫는다. 이 중에서 ‘언더스터디’나 ‘스윙’처럼 불의의 사고 시 공연의 지속 가능성을 책임지고 있는 포지션이 존재하는 것이다. ‘스윙’ 역시 특수한 형태의 앙상블 배역이다. 좀 더 정확히는 멀티 포지션 배역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앙상블을 맡은 배우들이 개인 사정으로 출연하지 못할 때 투입되는 일종의 앙상블 대역 배우다. 평소에는 무대 바깥에서 모니터를 보면서 대기하다가 결원이 생기면 그 앙상블의 춤과 위치를 정확히 대신해야만 하기에 오히려 신인보다는 주로 순발력과 노련함을 모두 갖춘 경력 배우들이 맡는다. 뮤지컬 앙상블은 전반적으로 춤이 중요하기에 일반적으로 큰 키에 유연한 몸과 재즈, 탭, 발레, 아크로바틱에 이르는 전천후 기술이 요구된다. 오디션 면접장에서도 심사위원들은 앙상블에게 주로 춤을 많이 요구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노래나 연기가 부족한 것도 아니다. 앙상블 중에는 다양한 기교와 능력을 가진 배우가 많지만 현실에서는 주·조연 배우들에 비해 주목받지 못할 뿐이다.  

언더스터디·커버 등으로도 불려

그런데 서구와 비교해 한국만의 특별한 앙상블 문화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주연배우를 서구와 달리 멀티캐스팅으로 뽑는 방식이 일반적이다. 같은 배역에 이미 여러 명의 주연배우가 있어 한 배우가 무대에 서지 못해도 다른 주연배우가 즉시 투입될 수 있다. 역설적으로 한국 공연 시스템에선 앙상블이 ‘언더스터디’ 제도를 통해 주연배우가 될 수 있는 사다리가 막혀있는 셈이다. 그렇다 보니 우리나라 앙상블은 주연으로 이어지기보다는 앙상블 그 자체로서 힘을 발휘하는 경우가 더 많다. 한국에서 매년 상연된 뮤지컬을 대상으로 시상하는 ‘한국 뮤지컬 어워즈’에는 앙상블 부문이 있다. 그해 가장 뛰어난 앙상블을 보여준 대극장 작품에 시상하는데 토니 어워즈나 올리비에 어워즈에도 없는 특별한 상이다. 이러한 최고의 앙상블을 뽑는 상을 받은 두 개의 작품이 현재 공연 중이다. 《모래시계》는 2018년, 《아이다》는 2020년에 각각 뛰어난 앙상블 하모니로 영예를 얻었다. 《모래시계》는 1995년 방영돼 큰 인기를 얻었던 동명의 TV 드라마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원작이 5·18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다룬 만큼, 중년의 한국인이라면 기억하고 있는 익숙한 스토리 라인이 펼쳐진다. 군사독재가 끝나고 민주화의 봄이 시작됐지만 다시 암울한 시대로 접어든 격동적인 1980년대를 살면서 각자의 위치에서 치열한 삶을 살아야 했던 세 청년 태수, 혜린, 우석의 사랑과 우정 이야기가 픽션이면서도 논픽션의 생생함을 담고 있다. 민주화운동 시위를 비롯해 시대의 아픔을 강렬한 군무로 표현하는 한국형 블록버스터 뮤지컬이다. 《아이다》 역시 일사불란한 칼군무로 앙상블을 보고 듣는 즐거움이 큰 대표적인 작품이다. 2005년에 국내 초연된 고전이지만 모던한 무대 연출과 대중적인 콘셉트의 음악으로 여전히 새로운 작품으로 느껴지는 힘을 가졌는데 앙상블의 열연도 이 작품의 흥행에 커다란 기여를 하고 있다. 이집트 사령관인 라다메스의 군인들, 누비아의 공주를 따르는 포로들, 이집트의 공주 암네리스의 화려한 시녀들을 연기하는 앙상블이 등장한다. 이들은 진지함과 코믹함을 넘나드는 섬세한 표현력과 가창력, 에너지가 충만한 아크로바틱 군무에 이르기까지 세련된 무대 디자인과 함께 오감을 사로잡는다. 이렇듯 한국 뮤지컬의 앙상블은 그에 속한 각각의 배우들이 미래의 주연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도 ‘앙상블다움’의 위상과 미학을 발휘하고 있다. 무대 위에서 주로 조명을 받는 주인공 너머로 그 자체의 생생한 매력을 뽐내고 있는 그들을 기억해 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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