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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혜경의 시시한 페미니즘] 여성 피해자의 자격
얼마 전 이수정 경기대 교수(범죄심리학) 강연에서 들은 이야기다. 처음 범죄학을 연구할 때 감옥에서 주로 살인범죄자들을 면담했다고 한다. 범죄학의 중요 목표는 위험한(재범 우려가 높은) 범죄자를 연구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생각이 달라졌단다. 이 교수가 연구를 시작할 당시 살인죄로 복역 중인 여성 재소자들은 남편을 살해한 아내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이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그 남편 살해자가 감형을 받아 몇십 년 뒤에 출소를 해서 다시 결혼한 다음 남편을 또 죽일 확률이 얼마나 될까요?” 들으면서 줄리아 로버츠 주연 《적과의 동침》이라든가 제니퍼 로페즈의 《이너프》 같은 영화를 떠올렸다. 가정폭력의 종말은 결국 누군가가 죽는 것이라던 다른 범죄학자의 말도.
굉장히 오랫동안 가정폭력은 범죄로 취급되지 않았다. 이 남편 살해범들은 법과 사회가 제대로만 했으면 피해자로서 보호받았어야 할 사람들이었다. 여성 사형수의 80%가 남편을 살해한 아내였다는 통계가 의미하는 것은 맞아 죽든가 아니면 남편을 죽이든가의 잔혹한 선택에 어떤 여성이 내몰리는 동안 국가는 팔짱을 꼈다는 뜻이 되겠다.
최근 들어, 범죄가 범죄로 인지되지 않는 또 다른 영역이 폭로되었다. 한 경제신문의 기사 제목은 정확하게 이랬다. ‘“유흥업소 직원인데 ‘강간죄’라니…” 김건모 사건 후폭풍’. 이미 2005년 이래 소위 ‘직업여성’에 대한 성폭력에 유죄가 선고되기 시작한 사례는 많다. 그럼에도 이 기사의 제목은 남성들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잘못된 생각을 따옴표 뒤에 숨어 유포하고 있다. ‘유흥업소 직원’에게는 강간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통념은 어디서 발생한 걸까. 돈을 내니까? 돈만 주면 범죄가 범죄가 아니게 된다는 발상은 또 어디서 시작된 걸까?
정말로 눈에 안 보이는 범죄가 또 있다.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를 보면, 한 고등학생이 성매매 거래를 하고 ‘거리의 부인’인 여주인공을 모텔로 데리고 간다. 그런데 그 방에는 한 명이 아니라 대여섯 명이 기다리고 있다. 약속 위반이라는 주인공을 그들은 때리고 집단강간한다. 주인공은 호소할 데가 없고. 남의 나라 이야기지만, 우리나라 성매매 여성도 강간을 당한다. 호소할 데도 없다.
이 가해자들은 그들을 피해자가 될 수 없는 사람으로 여겨
아내를 향한 극심한 폭력은 대부분 강간을 포함한다. 줄리아 로버츠와 제니퍼 로페즈를 처벌하듯 때리고는 바지 지퍼를 내리던 남자 주인공들의 모습은 가정폭력의 전형이다. 법으로 처벌받게 된 지금도 아내 강간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다. 아내니까, 당연히 강간해도 되지, 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또 당연히 유흥업소 종업원이니까, 성매매 여성이니까, 로 확대된다. 여성을 향한 주먹질과 성폭력은 한 끝 차이다. 권력과 지배를 확인하는 방식이니까. 그 어느 경우에도 강간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왜냐하면, 이 가해자들은 그들을 피해자가 될 수 없는 사람들, 강간해도 되는 사람들이라 생각하니까. 이 여성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무시하면 된다고 여기니까. 아내를 죽인 남편을 선처하는 문화와 유흥업소 종업원에겐 강간죄가 성립 안 한다고 믿는 발상 사이의 거리가 실제로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 보니 아득해진다. 이런 무시무시한 통념이, 신문기사 제목 한 줄에 다 드러나는 바람에 나는 약간 공황상태가 되었다. 어찌 이리 촘촘하게 얽힌 성폭력을 원하는 사회의 초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