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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 영화 속 사기꾼들

소싯적, 홍콩 영화를 좋아했던 이라면 마음속에 품고 있는 홍콩 스타 한 명 정도는 있을 것이다. 주윤발로 인해 성냥이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장국영 때문에 전국 공중전화부스가 인산인해였던 그때 그 시절. 나를 사로잡은 건 알란 탐이었다. 비디오로 우연히 접한 《지존무상》(1989) 속 알란 탐은 어린 나에게 도박은 ‘사행성 오락’이 아니라 ‘남자들의 로망’이 피어나는 곳이라는 잘못된 선입견을 잠시 심어주기도 했으니, 홍콩 영화가 품은 낭만성은 매력적이어서 또 그만큼 무서운 것이었다.
영화 《지존무상》과 《도신》의 한 장면
영화 《지존무상》과 《도신》의 한 장면
1989년 나온 왕정의 《지존무상》은 홍콩 도박 영화의 시조새로 불리는 작품이다. 알란 탐이 연기한 아삼과 유덕화가 연기한 아해의 우정, 엇갈린 사랑, 도박판에서의 목숨 건 복수… 영화는 당시 홍콩 영화 시장을 휩쓸고 있던 누아르 장르를 도박에 접목하며 변종 홍콩식 도박 장르의 문을 열어젖혔다. 마침 비슷한 시기, 주윤발·유덕화가 주연을 맡은 또 한 편의 도박 영화 《도신》(국내에서는 《정전자》로 소개)이 대히트를 치면서 홍콩 도박 영화는 아시아 시장에 흐드러지게 만개했다. 족보도 꼬였다. 《도신》을 패러디한 주성치 주연의 《도성》이 등장했고, 도신의 제자인 도협(유덕화)과 《도성》 주인공 아성(주성치)이 연합한 《도협》도 나왔다. ‘지존’ 알란 탐, ‘도박의 신’ 주윤발, ‘도협’ 유덕화 등 영화 속 주인공들은 의리에 죽고 살고, 폼 하나에 죽고 사는 낭만적인 인물로 묘사되며 큰 인기를 끌었다. 그 부작용이었을까. 명절 때 사촌들과 포커 게임을 하곤 했는데, 포커를 영화로 배운 탓에 ‘밑짱 빼기’ 같은 속임수를 쓰기도 했으니 뒤늦게 이실직고하고 심심한 사과를.
영화 《21》과 《히든카드》의 한 장면 ⓒ ㈜한국소니픽쳐스릴리징브에나비스타영화·20세기 폭스
영화 《21》과 《히든카드》의 한 장면 ⓒ ㈜한국소니픽쳐스릴리징브에나비스타영화·20세기 폭스

할리우드 도박 영화는 천재 아니면 안 되나요?

물론 도박판이 의리로 흘러가는 건 1980~90년대 홍콩 영화가 품었던 낭만일 뿐, 현실과 혼동하면 곤란하다. 조금 더 현실적인 도박판을 보고 싶다면 할리우드로 눈을 돌리면 된다. 짐 스터게스가 주연을 맡은 2008년 영화 《21》이 그중 하나. 《21》은 미국 MIT 천재들이 ‘카드 카운팅(딜러가 뽑은 카드패의 숫자를 합산해 앞으로 나올 패를 예측하는 도박 기법)’ 기술로 라스베이거스의 도박판을 휩쓸다 파멸한 뒤 복수하는 과정을 그린다. MIT까지 간 천재들이 왜 굳이 도박에 인생을 걸겠냐고 의심하지 말 것. 허무맹랑해 보이는 이 영화는 MIT 수학 교수를 지낸 천재 수학자 에드워드 O 소프의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됐다. 《21》이 다루는 도박은 ‘블랙잭’이다. 블랙잭의 기본 룰은 단순하다. 두 장 이상의 카드를 차례로 받아 숫자 합이 21에 가까운 사람이 이긴다. 시급 8달러를 받으며 근근이 생활하는 MIT 공대생 벤(짐 스터게스)은 하버드 의대에 진학하는 데 필요한 30만 달러(약 3억원)를 벌기 위해 도박판에 뛰어든다. 필살기는? 이미 나온 카드를 따져 앞으로 나올 카드를 예측하는 암산 능력. 즉 카드 여섯 벌(312장)이 나오는 경우의 수를 다 외워서 돈을 딴다. 수학이 응용되는 기술이니만큼 주인공이 타짜로 거듭나는 수련 과정이 여타의 도박 영화와는 다르다. 카드 돌리는 기술을 연마하는 게 아니라, 숫자가 빼곡히 적힌 칠판 앞에서 공식을 교육받는다. 이과생 맞춤 기술이랄까. ‘불나방’처럼 도박계로 뛰어든 또 한 명의 명문대생이 있다. 《히든카드》(2013) 속 명문 프린스턴대학 재학생 리치 퍼스트(저스틴 팀버레이크)다. 그가 학업을 뒤로하고 인터넷 도박 세계로 향하는 이유는, 벤과 동병상련, 등록금 때문이다. 한국만큼이나 미국도 등록금이 여러 학생을 잡는 모양이다. 해결 방법 사이즈가 남다르긴 하지만. 《히든카드》가 그리는 세계는 불법 인터넷 도박이다. 줄거리는 특별한 게 없다. 인터넷 포커로 전 재산을 탕진한 리치는 사이트의 구조상 절대 개인은 시스템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이를 파헤치기 위해 무작정 코스타리카로 떠난다. 그곳에서 온라인 겜블계의 거물 아이반(벤 애플렉)을 만나 욕망에 흔들린다는 이야기. ‘원조 연기돌’ 저스틴 팀버레이크와 할리우드 스타 벤 애플렉이 주연을 맡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제작에 나섰지만, 포장지만 화려할 뿐 촘촘하지 못한 전개로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는 실패했다. 제목과 달리 이렇다 할 비장의 히든카드를 보여주지 못한 게 패착이었다. 여기, 등록금 때문에 웃고 우는 명문대생이 또 있다. 《라운더스》(1998)의 뉴욕 법대생 마이크(맷 데이먼)는 표정과 눈빛으로 상대의 마음을 귀신같이 읽어내는 천부적인 감각을 지닌 타짜. 출중한 포커 실력으로 학비를 마련한다. 하지만 과하면 넘어지는 법. 오랜 시간 야금야금 모은 금쪽같은 등록금을 하룻밤 사이에 도박으로 다 잃고 거액의 빚까지 지게 된다. 마이크는 포커 세계를 떠나 일상에 안착하려 하지만, 한 번 도박의 맛을 본 자가 무림을 떠나는 게 어디 쉬운가.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운명의 한판을 위해 라스베이거스로 향한다. 마이크의 주 종목은 ‘텍사스 홀덤(Texas Hold’em)’이다. 개인 카드 2장과 바닥에 깔린 5장 등 총 7장을 조합해 승자를 가리는 게임. 세계 유명 포커 대회인 ‘월드시리즈 오브 포커(WSOP)’도 매해 텍사스 홀덤으로 우승자를 가린다. 보통 ‘도박은 패가망신의 지름길’이라는 인식이 있고, 실제로 많은 도박이 그러하지만, 텍사스 홀덤은 서구에선 스포츠로 인식되기도 한다. 운이 90%인 바카라 같은 게임과 달리 고도의 심리전과 전술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라운더스》의 주인공인 맷 데이먼은 WSOP 대회에 참가할 정도로 텍사스 홀덤 애호가다. 영화는 맷 데이먼의 메소드 연기를 방불케 하는 연기력과 팽팽한 심리 묘사가 일품이다. 홍콩이나 할리우드에 비해 국내 도박 영화의 역사는 짧다. 척박했던 국내 도박 영화에 비옥한 토양이 돼 준 것은 1999년부터 4년간 모 스포츠일간지에 연재된 허영만 화백의 4부작 시리즈 《타짜》다. ‘1부-지리산 작두’ ‘2부-신의 손’ ‘3부-원 아이드 잭’ ‘4부-벨제붑의 노래’로 구성된 만화는 섰다와 고스톱, 포커, 카지노 등 다양한 종목의 도박에 목숨을 거는 타짜들의 세계를 그린다. 홍콩의 도신-도협-도성의 관계처럼 《타짜》 주인공들의 족보도 제법 꼬여 있다. 1부의 주인공 고니를 중심으로, 2부에선 고니의 조카인 함대길이, 3부에선 짝귀의 아들 도일출이 전면에 나선다. 4부만이 전편과 연결고리가 전혀 없는 장태영이란 인물이 나서 타짜의 세계를 그린다. 지금까지 영화도 만화 시리즈의 순서대로 진행됐다. 1부 ‘지리산 작두’는 최동훈 감독에 의해 2006년 《타짜》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다. 흥행 잿팟이 터졌다. 영화는 그해 684만 관객을 동원하며 추석 극장가의 타짜가 됐다. 그로부터 8년 뒤인 2014년 추석엔 《과속 스캔들》 《써니》를 만든 강형철 감독에 의해 2부인 ‘신의 손’이 스크린으로 옮겨졌다. 전국 401만 명이 《타짜-신의 손》에 베팅했다. 그리고 올 추석, 3부인 ‘원 아이드 잭’이 《타짜-원 아이드 잭》이라는 제목으로 찾아온다. 독립영화 《돌연변이》를 만들었던 권오광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안다. 감독 이름 참, 범상치 않다는 걸. 영화 《타짜》 시리즈의 특징은 감독의 개성이 시리즈에 묻어난다는 점이다. 원작 만화 1부는 6·25전쟁 이후의 혼란기가 배경이다. 함부로 화투판에 끼었다가 누나의 재산을 날린 고니가 돈을 찾기 위해 전설의 타짜를 찾게 되고, 고수들의 세계에 발 딛는 과정이 흡사 무협소설처럼 그려졌다. 최동훈 감독은 각색 과정에서 배경을 1990년대 중반으로 옮겨놓았다. 그리고 전작인 《범죄의 재구성》처럼 범죄 영화의 틀을 빌려 인간의 욕망을 리드미컬하게 추적했다. 영화는 캐릭터 무비로서도 손색이 없다. 감독이 알차게 깔아준 판 위에서 고니(조승우), 평경장(백윤식), 정마담(김혜수), 고광렬(유해진), 아귀(김윤석), 짝귀(주진모) 등 캐릭터들이 그야말로 춤을 춘다. 버릴 캐릭터 하나 없고, 인상적이지 않은 캐릭터도 하나 없다. “나, 이대 나온 여자야!” “내 돈 모두와 내 손모가지를 건다” “쫄리면 뒈지시든지” 등의 명대사도 쏟아졌다. 감독의 장르적 세공력와 리드미컬한 편집, 배우들의 농익은 연기가 고루 만난 멋진 한판.
영화 《타짜3》의 한 장면 ⓒ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타짜3》의 한 장면 ⓒ 롯데엔터테인먼트

충무로 도박 영화의 토양 《타짜》

성공한 작품 속편의 운명은 ‘후광’과 ‘부담’ 사이에 놓여 있다. 이럴 경우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전편의 느낌을 그대로 차용하거나, 완전히 다른 속편을 만드는 것이다. 《타짜-신의 손》의 선택은 명명백백 후자였다. 강형철 감독의 인장을 강하게 박은 영화는 그 어떤 순간에도 유머를 놓지 않는다. 좋게 말하면 강형철의 장점이 고스란히 체화된 영화이고, 나쁘게 말하면 1편 팬들의 기대를 벗어나는 영화다. 감독이 쥐고 흔든 패에 어떻게 반응하는가는 결국 관객의 몫. 빅뱅 출신 최승현(탑)이 주인공 대길을 맡아 나쁘지 않은 연기력을 보였지만, 아이돌 출신과 타짜는 어울리지 않다는 의견 속에 호불호가 많이 갈렸다. 1편에서 고니의 파트너였던 고광렬이 2편에선 대길의 스승으로 등장하고, 김윤석이 전설의 타짜 아귀로 복귀해 힘을 실었다. 1, 2편이 화투라면 3편은 카드다. 짝귀의 아들 도일출(박정민)이 주인공이라는 것만 빼면 《타짜-원 아이드 잭》은 원작을 많은 부분 변형했다. 원작에서 도일출과 치정으로 얽힌 애꾸(류승범)가 스승 같은 캐릭터로 등장하고, 원작에 없거나 비중이 낮았던 까치(이광수), 권원장(권해효) 영미(임지연) 등의 존재감을 키워 팀 사기극을 완성했다. 박정민이 1대 타짜 조승우에게서 오는 거대한 부담감과 압박을 잘 막아내는 가운데, 류승범이 등장하는 장면마다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러나 《타짜》 특유의 쪼는 맛은 조금 아쉽다. 기대했던 타짜들의 ‘기술’은 미약하고, 운에 기댄 ‘사기’가 잦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의외의 장점은 최근 사회적 이슈인 계급논란을 뾰족하게 건드린다는 점이다. 고시생인 흙수저 도일출이 외친다. “가진 놈들은 출발점부터가 다르다. 그런 놈들을 내가 무슨 수로 이기겠어, 우리 둘 다 똑같이 카드 7장 들고 하는 도박이 훨씬 더 해볼 만한 거 아니야? 금수저나 은수저나 카드 7장 들고 하는 건 마찬가지잖아.” 도박을 이렇게 해석할 줄이야. 묘하게 설득되는, 시대상을 압축한 강력한 말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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