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중 팬덤에는 특별한 게 있다
영화관에서 떼창을 한다? 이건 전 세계 어디에 가도 없는 독특한 풍경이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싱어롱 상영회’나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며 한국적 팬덤의 독특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 방탄소년단. 여기엔 도대체 우리네 관객의 어떤 유전자가 숨겨져 있는 걸까.
누구도 이 영화가 700만 관객을 넘어 1000만 관객 돌파까지를 꿈꾸게 될 거라 예상하지 못했다. 실제로 이 영화에 대한 초기 반응은 그리 뜨겁지 않았다. 일단 중장년 팬층을 빼고 젊은 세대들이 퀸을 잘 모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온 이들이 재미있다는 반응들을 보이고 후기들이 SNS를 통해 확산되기 시작하면서 젊은 세대들이 이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뜨거운 반응과 관객 수의 급상승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퀸을 잘 모르지만 좋은 반응에 영화를 본 젊은 세대들은 흘러나오는 음악들이 너무나 익숙하다는 걸 알게 됐다. 퀸의 음악은 지금까지도 광고나 OST로 여러 곡이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화는 우리네 젊은 세대들이 가진 ‘마이너리티 정서’를 건드렸다. 영화적 해석이지만, 영화 속에서 프레디 머큐리가 ‘부적응자들을 위한 음악’이라고 스스로를 표현하는 대목에서 젊은 세대들은 깊은 공감대를 느꼈다. 부적응자들을 ‘챔피언’이라고 부르는 《We are the champion》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올 때 젊은 세대들은 우리네 현실에서 느끼는 답답함을 프레디 머큐리가 위로해 주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SNS 활용에 적극적인 젊은 세대들의 입소문은 《보헤미안 랩소디》 흥행에 불을 지폈고, 여기에 싱어롱 상영회 같은 독특한 관람문화가 생겨나면서 광풍이 이어졌다. 실로 영화를 보며 노래를 따라 부르는 싱어롱 상영회는 해외에서도 관심을 보일 정도의 독특한 관람문화였다. 미국의 ABC뉴스는 이 현상을 보도하면서 “한국에는 퀸의 노래를 따라 부를 수 있도록 영문 가사가 삽입돼 있는 버전의 《보헤미안 랩소디》가 상영되고 있으며 한국 관객들은 콘서트를 방불케 하는 분위기를 자아내 관객들과 떼창을 함께 즐길 수 있어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실제로 싱어롱 상영회에는 프레디 머큐리의 콧수염과 구레나룻에 코스튬까지 비슷하게 흉내 낸 관객들의 코스프레까지 이어졌다.
떼창 문화가 보여주는 독특한 팬덤
영화관에서 떼창하는 이 독특한 관람문화는 그러나 우리에게 완전히 생소한 풍경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벌어졌던 극장에서 스크린으로 경기를 보며 응원했던 경험이 우리에게는 이미 있다. 그때 우리는 응원도 했지만 《오 필승 코리아》 같은 응원가도 불렀다. 수동적으로 관람하는 공간이라는 선입견을 지우기만 하면 극장이 콘서트장이 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극장이 또 하나의 콘서트장이 될 수 있다면, 거기서 부르는 떼창은 우리의 독특한 콘서트 문화의 하나로 이해될 수 있다. 해외 아티스트들이 내한공연을 할 때마다 화제가 되곤 하는 게 바로 이 떼창 문화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관객들이 떼창하는 《Love of my life》의 감동은 우리네 콘서트 문화에서는 이제 일반화된 문화 중 하나다. 그런 떼창 문화는 이제 해외 관객들에게도 전파되고 있다. 유튜브 같은 곳에서 우리는 방탄소년단의 해외공연에 저마다의 언어로 들려오는 해외 관객들의 떼창을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됐다.
방탄소년단의 팬클럽 아미(ARMY)가 객석에서 공연에 열광하며 일사불란하게 떼창을 하는 광경은 콘서트의 실질적인 완성이 바로 그들의 참여에서 비로소 이뤄진다는 걸 확인하게 해 준다. 저마다 구입한 아미밤(응원봉)을 들고 정해진 안무에 맞춰 호응하는 관객들과 블루투스로 연결돼 전체 아미밤의 색과 점멸을 조정함으로써 만들어지는 일종의 디지털 카드섹션은 그래서 콘서트의 새로운 볼거리로 자리하기도 했다.
마당극 전통에서부터 디지털 광장까지
이 팬덤을 한마디로 얘기하면 굉장히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관객 문화라는 점이다. 보통 퍼포먼스를 하는 아티스트와 이를 관람하는 관객이 분리돼 나타나지만, 우리네 관객 문화에서는 그 경계를 거의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어우러지는 면면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이미 해외의 게임업체들이 그 즉각적인 반응으로 성패를 드러내는 한국 시장을 테스트마켓으로 바라보는 이유 중 하나다. 우리의 리액션은 적극적이고 즉각적이며 직설적이다. 이런 문화적 유전자는 어디서부터 온 걸까.
이 독특한 관람문화를 우리는 전통문화 속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왕의 남자》 같은 영화가 보여준 것처럼 우리네 연희(演)는 대부분 마당(광장)에서 벌어지는데, 거기서는 연희자와 관객 사이에 확연히 구분되는 경계가 없다. 물론 보이지 않는 무대와 관람선이 존재하긴 하지만, 마당극이 보여주는 것처럼 그 경계는 연희자가 관객을 끌어들여 함께 춤을 추거나 참여시킴으로써 수시로 무너진다. 남사당패의 줄타기 같은 공연을 봐도 그렇다. 줄 위에 선 연희자가 끊임없어 줄 밑에서 호응해 주는 매호씨는 물론이고 관객들과 대화를 나누는 걸 발견할 수 있다. 우리네 문화는 이미 오래전부터 하나의 마당 위에 연희자와 관객이 함께 어우러지는 ‘떼창’ 문화를 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마당극의 문화는 현대사로 오면 우리에게 광장 문화의 진화로 나타나기도 했다. 1987년 광화문광장에 모인 대중들이 정치적인 이슈를 공유하며 한목소리를 냈다면, 2002년 광화문광장에 모인 대중들은 축구로 이어진 축제의 장 속에서 우리 팀을 한목소리로 응원했다. 2016년 광화문광장에 모인 촛불들은 1987년의 정치적 이슈와 2002년의 축제를 엮어 독특한 광장 문화를 만들었다. 사회적 의제를 던지면서도 동시에 즐거운 질서가 유지되는 그 광장 문화는 마치 거대한 마당극에 올라선 관객들처럼 자율적이었다. 그리고 이 마당 혹은 광장은 오프라인만이 아니라 디지털 네트워크에서도 빠른 속도로 확산되며 우리는 물론이고 해외의 대중들까지 끌어모으는 힘을 발휘하고 있다. 이른바 디지털 광장이 활짝 열린 셈이다.
이 관점으로 《보헤미안 랩소디》를 다시 들여다보면 어째서 이런 열풍이 이어졌는가를 그 독특한 대중들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평상시에는 저마다의 세계에서 살아가지만 어떤 큰 이슈가 생겼을 때 온·오프 광장으로 속속 모여들어 그걸 공유하려는 문화는 그래서 이미 우리네 유전자 속에 각인돼 있었던 게 아닐까. 그러고 보면 K팝 같은 한류가 해외에서도 큰 경쟁력을 갖는 이유도 이런 반응과 참여에 적극적인 우리네 대중들의 특별함 때문이라는 말이 그저 과장처럼만 들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