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혜경의 시시한 페미니즘] ‘표현’이 가진 힘
KBS 2TV 《대국민 토크쇼 안녕하세요》라는 프로그램을 즐겨 본다. 일종의 힐링 프로그램이지만, 일상의 고민과 상식적인 공감이 녹아 있다. 세상은 넓고 사람은 참 제각각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런 한편 무엇이 인간적이고 무엇이 자유이며 무엇이 해방인가라는 본격적 질문에 상식적인 해답을 주기도 한다.
고민의 내용 중 상당수는 사회화 부족이라든가 상식의 결핍 같은 문제들이다. 하지만 자기중심적인 사람 때문에 괴롭힘 당하는 사연들도 심심찮게 있다. 남편과 내가 제각각 열을 올리며 보는 사람의 유형은 좀 다른데, 남편은 “내 생각은 달라요”를 외치며 자신의 행동에 조금의 성찰도 없는 사람을 보면 화를 내고, 나는 “마음은 있는데 표현을 못 한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좀 더 화가 난다. ‘표현’이라는 말이 나의 직업의식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아시다시피 나는 시 쓰는 사람이다.
변화가 두려워 망설여지는 ‘표현’
“저도 마음으로는 사랑하는데 제가 표현이 좀 서툽니다”라고, 고민 대상자는 먼저 방청석과 패널들을 향해 말한다. 고민을 보낸 당사자에게 먼저 “듣다보니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카메라 앞에서 대국민사과는 하면서 자신이 가해를 한 피해자에게는 사과하지 않는 유명인들과 똑같다. 패턴처럼 느껴질 정도다. 사회자 이영자가 달궈진 쇠꼬챙이 같은 언어로 ‘딸에게’ ‘아내에게’ ‘아들에게’ 혹은 ‘남편에게’ “사랑해”라고 말하라고 종용을 하고, 그제야 겨우 그 어려운 “사랑해”가 입 밖으로 나온다. 고민 당사자는 울음을 터뜨리고.
반복되는 이 패턴을 보면서 나는 ‘표현’이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된다. 대체로 “내가 표현력이 없어서”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남자가 많은데, 이들은 실제로는 매우 표현을 잘하고 살아온 것처럼 보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강압의 표현, 폭력 가능성의 표현, 무시의 표현, 외면의 표현, 그 밖에도 짧은 한마디의 백만 주먹 같은 위력의 표현.
“사랑해”라는 말을 겨우 하는 이유는, 사랑한다는 말의 무게를 알기 때문이고, 그 말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변화하고 무언가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 표현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다. 표현하기 싫기 때문이지 표현할 줄 몰라서가 아니고, 표현하기 싫어서 표현할 마음의 준비, 표현할 연습을 안 했기 때문이고.
《대국민 토크쇼 안녕하세요》에 출연하는 고민 대상자는 그래도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다. 진짜 가정폭력을 당하는 피해자가 고민 상담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방적으로 자기만 아는 가해자가 고민 대상으로 출연하지도 않을 것이다. 출연하기로 한다, 라는 일말의 노력이 소통의 숨구멍을 열어놓는다.
객석에서 ‘고민’ 버튼을 누르는 일종의 ‘재미장치’에 관심이 간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길을 막고 물어봐라”가 일종의 심판이 되어 온 민속적 역사가 있다. 따라서 객석의 심판은 상식의 버튼 역할을 한다. 여론이란 실제로는 단순히 쪽수로 결정되는 것이 아닌 공론의 결과라는 것을 보여주는 장치다. 일상에서 우리의 모든 문제가 이런 정도로만 평등하게 대화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