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내 법원전시관에서는 지난 11월16일부터 고(故) 이영구 판사를 기리는 1주기 추모전이 열리고 있다. 이영구 전 판사는 유신 통치가 한창이던 1976년 서울지법 영등포지원 형사 부장판사를 지냈다. 그 당시 그는 한 여고 교사가 수업 중에 “1인 정권” “마르고 닳도록 해먹는다”며 박정희 정권을 비판해 긴급조치 9호 및 반공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사건의 재판을 맡았다. 그는 ‘박정희 정권이 장기 집권임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어서 장기 집권에서 오는 지루한 안정에 대해 자유 국민이 가지는 염증 감상을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는 요지로 무죄 판결을 내렸다. 정권에 미운털이 박힌 이 전 판사는 결국 전주지법으로 좌천성 발령을 받았고, 한 달 후에 법복을 벗었다. 이 재판 판결 후에 이 전 판사는 “법의 근본은 국민의 뜻에 있으며, 긴급조치가 잘못되었다는 국민의 생각을 판결에 반영했을 뿐이다”는 말을 남겼다.
대한민국이 오랜 시련의 시기를 지나는 동안 더디지만 꿋꿋하게 민주화의 길로 전진할 수 있었던 데는 독재 정권의 서슬 퍼런 압박 속에서도 기어이 시대의 양심을 지켜내려 했던 여러 양심 판사들의 노력이 한몫했었음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입법·행정·사법 삼권분립이 분명한 국가에서 어느 부(府) 하나 중요하지 않는 곳이 없지만, 시대양심의 최후 보루로 여겨지는 사법부의 역할은 막대하기 그지없다. 국민이 선출직이 아닌 법관에게 그처럼 막중한 사명을 갖게 한 것도 그들 또한 이영구 전 판사가 보여줬던 강직한 소신을 지니고 있으리라는 믿음 혹은 기대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 드러난 사법부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몇 달간 지속되고 있는 사법행정권 남용 파문이 한 해가 다 가도록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장이 직접 작성한 ‘상고법원의 성공적 입법 추진을 위한 BH(청와대)와의 효과적 협상 추진’이란 문건을 비롯해 위안부 피해자 손해배상 소송 재판 개입,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배상 소송 재판 개입 등 그동안 제기된 재판 거래 의혹은 손으로 꼽기조차 힘들 정도다. 그 와중에 KTX 해고 승무원들은 대법원의 원심 파기 판결로 애꿎은 피해를 입기까지 했다.
스스로 단단히 중심을 잡고 일해야 할 사법부가 마치 이익집단처럼 행동하며 정권 내부와 거래하려 했다는 의혹은 그야말로 국민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사법 쇼크’나 다름없다. 오직 신뢰에 의해 유지될 수밖에 없는 사법 권위를 일부 법관들이 스스로 깎아내렸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대국민사과를 했지만, 사법부를 향한 국민의 눈초리는 여전히 차갑다. 재판 거래 의혹이 불거진 이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국민 63.9%가 사법부 재판을 불신한다고 답했고, ‘사법농단’ 관련 법관 탄핵에 찬성한다는 비율이 응답자의 절반을 넘었다.
버티기로 일관하며 시간이 지나가기를 바라서는 크게 실추된 사법부의 권위가 결코 회복되거나 유지될 수 없음은 그들 스스로도 잘 알 것이다, 사법부의 권위만 앞세우면 그보다 더 중요한 국민의 권위, 국가의 권위, 헌법의 권위는 누가 지켜줄 것인가. 신뢰를 잃은 권위는 사상누각일 뿐이다. 국민이 납득하고, 재발을 확실하게 막을 수 있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