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체부의 블랙리스트 관련자들 면책 처리에 항의하며 1인 시위
문화계 블랙리스트로 피해를 입은 문화예술인들이 또다시 거리로 나섰다. 이번에 이들은 2년 전 블랙리스트 존재를 최초 폭로하고 함께 목소리를 냈던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규탄하는 피켓을 들었다. 수 주째 청와대 분수대·대학로·국회 앞 등에서 1인 시위를 이어가며, 이들 일부는 도 장관의 사퇴까지 주장하고 있다. 적폐청산을 국정과제 1호로 내건 정권이 출범했고, 블랙리스트 작성을 지시한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문체부 장관 역시 재판대에 섰다. 그럼에도 이들이 도 장관과 문체부를 향해 다시 날을 세우는 까닭은 뭘까.
갈등을 촉발시킨 건 9월13일 문체부가 발표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관련자 68명에 대한 이행계획이었다. 문체부는 이들 중 7명에 대해서만 검찰에 수사를 의뢰하고 12명에게 주의조치를 내리겠다고 발표했다. 나머지 관련자들은 사실상 면책 처리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사유는 공개하지 않았다.
문화예술인들은 당장 문체부가 적폐청산 의지를 상실한 채 단행한 ‘셀프 면책’이라고 반발했다. 지난해 7월 민관 합동으로 출범한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원회는 11개월간의 활동을 마친 지난 6월, 블랙리스트 관련자 131명에 대한 징계를 권고한 바 있다. 조사위에 참여했던 민간위원들에 따르면, 문체부는 이 징계 권고안을 바탕으로 민관이 함께 관련자 징계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후 문체부는 이들을 배제하고 내부적인 검토를 거쳐 일방적으로 징계 이행계획을 발표했다. 이에 문화예술인들은 문체부가 ‘제 식구 감싸기’식의 셀프 징계를 진행하면서 적폐청산이 아닌 ‘적폐은폐’를 하고 있다고 반발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문체부 관계자는 10월11일 “공무원들의 징계 여부를 민간과 함께 결정한다는 게 오히려 절차상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다고 판단했다”며 “조사위에서 낸 권고안을 바탕으로 징계 여부를 결정하는 건 장관의 몫”이라고 해명했다.
“문체부, 말도 없이 이행협치추진단 쪼개”
조사위 민간위원을 비롯한 문화예술인들은 문체부의 징계 내용에도 문제가 많지만 이를 결정하는 ‘과정’에 대해 울분을 터뜨리고 있다. 이들에 따르면, 문체부는 6월30일 조사위 해산 당시 이행협치추진단을 꾸려 관련자 징계와 제도 개선, 블랙리스트 백서 발간 등을 민간과 함께 이행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해산 후 한 달이 넘도록 민간위원들에게 아무 연락이 없던 문체부는 8월20일이 돼서야 첫 회의를 소집했다. 이날 회의에 참석한 민간위원들 앞에 놓인 건 두 개로 쪼개진 추진단 조직도였다. 민간이 참여하는 제도개선 추진단과 별도로 문체부가 자체 추진단을 새로 만들어 법리 검토와 징계 논의를 그 안에서 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다.
진상조사위 민간위원으로 참여했으며 백서 발간을 주도하고 있는 연극평론가 김미도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는 “만약 불가피하게 쪼개야 했으면 미리 우리와 상의를 해야 했는데 일언반구 않고 자기들끼리 징계 검토 업무를 시작했다”며 “우린 왜 문체부가 한 달 넘게 추진단 회의를 소집하지 않는지 모른 채 한시가 급한 백서 발간 업무도 손 놓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문체부 관계자는 10월11일 시사저널과의 통화에서 “의도적으로 첫 회의를 미룬 것이 아니라 다른 업무를 진행하면서 동시에 위원 섭외하고 회의 준비하느라 다소 늦어졌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9월12일 열린 두 번째 회의에서 문체부와 민간위원들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당시 문체부는 이미 내부적으로 징계 이행계획을 완성해 다음 날 발표만 앞두고 있었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안 민간위원들이 문체부에 항의하면서 회의는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진상조사위 민간위원이었던 이양구 작가는 “지금도 우리는 문체부가 새로 꾸린 추진단에 들어가 법리 검토를 해 준 자문가들이 누구인지, 이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이 같은 징계 결정을 내렸는지 전혀 들은 바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 상황에 대해 도 장관이 얼마나 파악하고 있는지, 알면서도 관심이 없는 건지 궁금할 따름”이라고도 지적했다.
“아직 도종환 장관에 대한 믿음 있어”
1인 시위에 나선 문화예술인들은 국정감사 시즌을 맞아, 도 장관과 문체부를 향해 이 같은 상황을 따갑게 질책해 줄 국회의원이 없다고도 토로했다. 매일 1인 시위를 진행하고 있는 이양구 작가는 “국회에서 블랙리스트 문제에 그나마 관심을 가졌던 의원이 도종환·유은혜 둘이었다. 그런데 모두 장관이 됐고 야당 의원들 중엔 애초에 이 사안을 지속적으로 좇은 사람이 없다”며 “여야 모두 깊게 관계돼 있는 일이라 누구든 앞장서기 애매한 문제일 것”이라고 말했다.
10월10일,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소속 위원 일부가 도 장관에게 블랙리스트 징계 논란에 관해 질의를 던졌다. 그러나 대부분 징계 수준과 대상을 간단히 지적하는 데 그쳤다. 그나마 국감 하루 전, 민간 조사위원 일부와 짧은 면담을 가졌던 손혜원 의원이 도 장관에게 “왜 진상규명 과정에서 이들(민간 조사위원)이 배제됐는지 그들을 공식적으로 만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이에 대해 도 장관은 “일요일(10월14일)에 만나기로 돼 있는 걸로 안다”고 답했다. 이에 대해 민간 조사위원 측은 이날 오후 시사저널에 “(장관 답변처럼) 아직 면담 날짜나 방식, 문체부 공무원 배석 여부 등을 조율하진 않았지만 사나흘 전 문체부에서 면담 제안이 온 건 사실”이라고 전했다.
시위에 나선 문화예술인들 가운데엔 도 장관에 대해 여전히 믿음을 갖고 있는 이들도 있다. 현재 상황만으로 ‘블랙리스트 저격수’로 활동했던 과거 도 장관의 진정성까지 모두 의심할 순 없다고 말한다. 그가 소속 공무원들의 보고를 중심으로 상황을 파악하다 보니 이같이 판단할 수밖에 없었을 거란 얘기다. 다만 블랙리스트 조사위 해산 후 이어진 논란에 대해, 도 장관의 관심이 부족했던 데 대해선 아쉬움을 토로한다. 백서 발간 작업을 하고 있는 김미도 교수는 “이 정권의 국정과제 1호로 시작한 블랙리스트 백서 발간 작업이 마땅한 예산도 없이 수개월째 진행되고 있다. 급여는 물론이고 식비도 없이, 사명감으로 몇 명만 남아 작업 중”이라며 “이 같은 사정을 속속 알았으면 장관이 챙기지 않았을까. 몰랐을 거라 믿고 싶다”고 말했다.
도 장관과의 진솔한 면담 후에도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 않을 거란 회의 섞인 목소리도 나온다. 이미 문체부가 징계 계획을 결정해 발표했을 뿐 아니라 3년으로 정해진 관련자들의 징계 시효가 만료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블랙리스트 작성 작업이 가장 활발했던 2015년 말 관련자들의 징계 시효가 10월 들어 하나둘 만료되고 있는 상황이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관련자들이 책임에서 하나씩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도 장관이 상황 수습을 위해 내놓을 수 있는 카드는 사과나 징계 재검토 발표 정도에 그칠 것이란 예측이 많다. 부처의 수장으로서 자신의 직원들에게 다시 칼을 대기 힘들 거란 것이다. ‘블랙리스트 저격수’로 활약해 장관에까지 오른 그가 블랙리스트 문제를 매듭짓는 과정에서 날로 고민이 깊어지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