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 친 헌법보호청장 되레 승진…연립정부 내부 갈등 지속될 듯
독일 동부 켐니츠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이 독일을 뒤흔들고 있다. 독일 국적의 다니엘 H가 이라크와 시리아 난민들과 시비 끝에 칼에 찔려 사망한 것이다. 독일 사회는 2015년 쾰른 난민 집단 성폭력 사건 이후 극우파가 급속히 세를 확장하는 것을 목격했다. 때문에 정부와 시민사회는 켐니츠 사건이 외국인 혐오 정서로 이어지지 않도록 극도로 주의하고 있다. 그러나 독일의 극우파는 살얼음판을 깨뜨리기 위해 더 난폭하게 발을 구르고 있다. 그리고 두 사람의 국가 핵심 인물들이 이들을 옹호하면서 정부 위기론이 나오고 있다.
사건은 8월26일 심야에 일어났다. 켐니츠시 축제에서 독일 국적자 다니엘 H와 이라크 및 시리아 국적자 3명 간 다툼이 벌어졌다. 갈등은 폭력으로 이어졌고, 다니엘 H는 누군가 휘두른 칼에 맞아 사망했다. 용의자 중 2명은 다음 날 체포됐다.
진짜 사건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날이 밝자 프로켐니츠 등 지역 우파 단체와 독일대안당(AfD)이 동원한 극우파 시위대 800여 명이 모였다. 이 시위는 단순한 추모 행진이 아니었다. 다니엘 H의 죽음은 독일 극우파가 결집하는 도화선이 됐다.
축제가 있던 26일 저녁 트위터에 두 개의 영상이 올라왔다. 서로 다른 방향에서 찍힌 두 영상은, 백인 시위대가 켐니츠의 요한니스 광장 근처에서 유색인 남성 2명을 추격하는 모습을 포착한 것이었다. 영상 속 시위대는 인종혐오적인 욕설을 하며 두 남성을 쫓았고, 이 중 한 명은 추격자들에게 짓밟힐 뻔하다 간신히 길 건너편 버스에 몸을 숨겼다. 영상이 올라오기 전 이미 ‘켐니츠에서 독일인들이 유색인종을 추격하고 있다’는 증언들이 SNS에 올라온 뒤였다.
독일 전역의 극우파는 이튿날에도 추모를 명목으로 켐니츠에 모여 과격 시위를 이어갔다. 8월27일엔 극우파 2000여 명이 집결해 선언문을 낭독하고 시내를 행진했다. 이 과정에서 참석자 다수가 법으로 금지된 히틀러식(式) 인사를 했다. 이들 중 일부는 복면을 쓰고 외국인을 찾아다니다가 유대인 식당에 몰려가 돌과 유리병을 던지며 공격했다.
켐니츠에서 벌어진 외국인 추격전과 혐오 집회는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나치 범죄로 600만 명의 유대인이 살해된 역사가 있는 독일에서 벌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영국 신문 가디언은 이 비디오가 “위험한 무언가가 싹트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평했고, 스위스는 자국민들에게 독일 여행을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내무부 장관 등 “비디오는 가짜” 음모론 제기
독일 정치권 역시 이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외국인을 표적으로 한 범죄는 늘 있어 왔지만, 이처럼 노골적으로 이뤄진 것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영상이 올라온 다음 날 슈테픈 지버르트 정부 대변인은 켐니츠에서 외국인에 대한 ‘사냥’이 일어났으며, 이 같은 일은 법치국가에서 있을 수 없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8월28일에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직접 “어떤 곳에서도 이런 난동이 벌어져선 안 된다”고 단언했고, 프랑크 발터 슈타인마이어 대통령 역시 유가족의 슬픔에 깊이 공감하지만 다니엘 H의 죽음이 “외국인 혐오와 폭력을 조장하기 위해 이용되고 있다”며 우려를 표시했다.
그러나 호어스트 제호퍼 내무부 장관과 한스 게오르크 마센 독일 연방 헌법보호청장이 극우파 난동을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하면서 켐니츠 사건은 내각의 위기로 발전했다. 제호퍼는 9월5일 “이민이 모든 정치적 문제의 어머니”라고 말해 논란을 일으켰다. 극우파 난동을 규탄하고 다니엘 H 살인 사건이 난민 전체에 대한 혐오로 이어지는 것을 막으려는 정치권과 시민사회의 노력과 배치되는 발언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제호퍼는 메르켈이 이끄는 기독민주연합(CDU)의 바이에른 지역 정당인 기독사회연합당(CSU) 대표이며, 연합정부에도 참여하고 있다. 즉, 독일에서 극우파가 다시 힘을 얻지 못하도록 여야가 노력을 기울이는 가운데 여당 내부에서 찬물을 끼얹는 말이 나온 것이다. 이에 대해 메르켈은 9월6일 인터뷰를 통해 다시 한번 켐니츠 우파 난동을 규탄하고, 제호퍼의 발언에 우려를 표시했다.
하지만 독일 정부와 정치권의 가장 깊숙한 곳에도 극우 문제가 있다는 의혹은 오히려 더욱 커졌다. 9월7일 마센 헌법보호청장이 독일의 타블로이드 신문 ‘빌트’와의 인터뷰에서 “인터넷에 유포된 비디오에 담긴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증거는 없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덧붙여 그는 “내가 조심스럽게 평가해 보자면, (이 비디오가) 대중의 관심을 켐니츠의 살인 사건에서 돌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퍼진 거짓 정보라고 볼 만한 이유가 있다”고 주장했다. 즉, 화면에 담긴 ‘사냥’이 실제로는 난민 우호적인 단체에서 만든 가짜 비디오라는 음모론을 내놓은 것이다.
마센, 내무부 차관직 임명되면서 논란 확산
이에 대해 연방 헌법보호청은 비디오 분석은 아직 진행 중이며, 조작 의혹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는 없다고 밝혔다. 마센 역시 이를 알고 있었다. 즉, 그의 발언은 사전에 검증되지도 않았고, 정부나 헌법보호청 어느 쪽과도 협의되지 않은 ‘계산된’ 행동이었다. 이 때문에 독일의 뉴스사이트 ‘슈피겔 온라인’은 마센의 발언을 “국가가 만들어낸 가짜 뉴스”라고 맹공격했다.
마센의 발언은 독일 정부에도 큰 내상을 입혔다. 메르켈 총리의 공식 입장에 대해 마센이 사전 협의 없이 직접 언론을 통해 공격을 가한 셈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마센이 메르켈이 아닌 제호퍼에게 사전에 빌트 인터뷰 내용을 보고하고 제호퍼가 이를 묵인한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제호퍼는 내무부 장관으로서 헌법보호청장에 대한 임명과 해임 권한이 있다. 즉, 마센의 ‘음모론’ 인터뷰의 핵심은 내무부 장관과 정보국장이 연방총리의 국내 정책과 관련된 중요한 사안을 독자적으로 처리한 데 있다. ‘연방정부 위기론’이 나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CDU, CSU와 함께 연합 내각을 구성하는 사회민주당(SPD)은 강경 대응에 나섰다. 제호퍼 내무부 장관이 마센을 해임시키지 않으면 메르켈 총리가 제호퍼까지 해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또한 사민당은 메르켈이 마센과 제호퍼를 안고 가기로 결정한다면 정부 구성을 파기하고 재선거를 치르겠다며 메르켈에게 최대의 압박을 가했다.
9월18일, 마센은 결국 연방 헌법보호청장 직위에서 해임됐다. 그러나 내무부 차관직에 임명되면서 논란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차관직은 헌법보호청장직보다 직급과 권한, 임금이 더 높아 마센이 오히려 ‘승진’을 한 셈이기 때문이다. 랄프 슈테그너 사민당 부대표는 “이번 인사이동은 ‘재앙’이며 사민당 내에서 기민련-기사연과의 연합정부에 대한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하고 있다”고 말했다. 마센과 제호퍼가 초래한 연립정부 내부 갈등의 여파는 길게 지속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