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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미국판 안희정 사태’인 ‘토머스 성추행 사건’ 평행이론

 

1991년 10월11일, 아니타 힐(Anita Hill)은 클라렌스 토머스(Clarence Thomas) 대법관 후보자에 대한 미국 상원의 인사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이날 청문회가 특별했던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우선 클라렌스 토머스는 최초의 흑인 대법관 서굿 마셜(Thurgood Marshall)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임명된 또 다른 흑인 대법관 후보자였다. 다만 조지 HW 부시 대통령이 지명한 후보자답게 낙태 문제 등에 대해 보수적인 성향을 분명히 보인다는 점이 달랐다. 

 

이 인사청문회는 기존의 인사청문회가 끝나고 난 뒤 별도로 아니타 힐의 증언을 듣기 위해 마련된 청문회였다. 토머스 후보자가 교육부와 고용평등위원회에서 일하던 1981년에서 1983년 사이 자신의 어드바이저이자 어시스턴트로 일하던 힐에게 성추행을 가했다는 FBI의 보고서가 언론을 통해 유출돼 이 사안만을 다루는 청문회가 따로 열리게 된 것이다.

 

1991년 10월11일 아니타 힐 교수(오른쪽)가 미국 상원 인사청문회에 출석해 자신의 변호인으로부터 법률 조언을 듣고 있다. © REUTERS

 

한 여성의 삶을 바꿔놓은 청문회

 

미 오클라호마대 법대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힐은 본인이 원해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한 것이 아니었다. 토머스 후보자의 과거 행적을 검증하던 FBI는 다른 경로를 통해 그녀가 성추행을 당했다는 제보를 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그녀로부터 관련 증언을 확보해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보고서가 언론을 통해 유출되고 논란이 확산되자 상원 인사청문위원회는 그녀에게 증인 출석 명령을 내렸다. 그렇게 힐은 텔레비전 생중계로 전 국민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성추행 피해 사실에 대해 증언하게 된다.

 

힐은 청문회에서 자신이 1981년 교육부에서 일하던 당시 자신의 상사인 토머스로부터 데이트를 하자는 요청을 몇 차례 받았고 이를 거부했다고 증언했다. 또 데이트 요청을 계속 거부당한 토머스는 직장 내에서 힐에게 자신이 본 포르노 필름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으며 자신의 성기 사이즈나 성생활에 대해 노골적인 얘기들을 늘어놓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성추행은 토머스와 힐이 고용평등위원회에서 위원장과 어시스턴트로 다시 만났을 때도 계속됐고, 결국 힐은 1983년 사임하고 대학교수의 길을 걷게 됐다.

 

힐의 청문회 증언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1991년만 해도 미국 사회에서 직장 내 성추문이 공적 영역에서 논의되던 주제가 아니었다. 이뿐만 아니라 청문회의 청문위원이 모두 백인 남성들이었다. 문제를 다룸에 있어 토머스 후보자 임명을 찬성하는 공화당 의원과 이를 반대하는 민주당 의원들의 태도는 차이가 없었다. 당적을 막론하고 이들은 힐에게 피해 사실을 구체적으로 증언할 것을 반복적으로 요구해 힐은 토머스가 자신에게 가했던 저속한 언행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놀라운 사실은 그녀에게 쏟아진 백인 남성 상원의원들의 질문이었다. “당신은 인권 문제에 대해 호전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 “순교자 콤플렉스가 있는 것 아닌가” 등 증인의 신빙성과 동기를 의심하는 적대적인 언급들에 대해 그녀는 대답을 해야 했다. 

 

또 토머스 후보자로부터 유사한 피해를 당한 여성들은 석연찮은 이유로(공화당 측 의원과 민주당 조 바이든 당시 의원 사이의 협상이 있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청문회장까지 왔지만 증인석에 서지 않았다. 반면 토머스 후보자의 무고함을 증명하는 동료들은 “힐이 토머스 후보자와 함께 있을 때 매우 편해 보여서 그런 피해를 당했다고는 상상할 수 없었으며 오히려 힐이 토머스 후보자와 직장 동료 이상의 관계를 원한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토머스 후보자의 가해에도 불구하고 그와 계속 일을 한 이유가 자신이 원하는 일을 그만두고 싶지 않아서라는 힐의 설명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신 공화당 측 청문위원들은 힐의 증언이 거짓이며 그녀의 폭로는 진보진영의 기획이라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힐의 증언이 끝나고 청문회에 소환된 토머스 후보자는 자신에 대해 성추문 의혹을 전형적인 인종차별이자 린치라고 주장했다. 그는 흑인 남성을 성적인 능력과 신체적 특징과 연결시키는 것은 오래된 인종차별적 고정관념이며 힐의 증언은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의 연장이라고 했다. 인종차별 카드를 꺼낸 토머스 후보자 앞에서 백인 남성 청문위원들은 유달리 조용했으며 청문회는 금세 종료됐다.

 

1991년 10월15일 토머스의 대법관 임명에 대한 상원의 투표는 찬성 52, 반대 48로 가결됐다. 토머스 대법관은 현재까지도 미연방 대법관으로 복무 중이다.

 

 

아니타 힐 이후의 美 사회와 정치

 

힐의 증언은 토머스 대법관의 임명을 막지 못했다. 오히려 그녀는 같은 흑인으로서 흑인 대법관 임명에 지장을 주었다는 이유로 거센 비판에 직면해야 했다. 그녀는 반대세력으로부터 각종 협박 편지와 소포를 받았으며 그녀를 해고하지 않는(당시 힐은 이미 종신을 보장받은 교수였다) 오클라호마대학에도 각종 압박이 가해졌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직장과 고향을 떠나 보스턴 소재의 브랜다이스대학으로 이직했다. 

 

그러나 그녀의 청문회 증언은 미국에서 직장 내 성추행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성추행 피해자에게 국가가 배상금을 지불하는 법안에 반대하던 부시 행정부는 청문회 직후 입장을 선회해 법안 통과에 협조했다. 고용평등위원회(이 사건의 아이러니함 중 하나가 바로 직장 내 성추행을 다루는 바로 그 위원회 안에서 성추행이 일어났다는 데 있다)에 신고된 성추문 사건은 5년 사이에 두 배로 급증했으며 일반 기업들이 성추행 방지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신설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부터다.

 

변화는 힐을 증언대에 세웠던 바로 그 의회에서도 일어났다. 인사청문회에서 14명의 백인 남성 의원들이 보여준 여성의 삶과 경험에 대한 무지는 자신들의 정치를 그들의 손에 맡겨둘 수만은 없다는 여성들의 자각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청문회 다음 해인 1992년, 222명의 여성 후보가 하원 선거에, 29명의 여성 후보가 상원 선거에 출마했다. 이 중 24명이 하원의원에, 4명이 상원의원에 당선됐다. 청문회가 열리던 1991년 상원의 여성 의원이 단 두 명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여성들의 약진은 괄목할 만한 성과였다. 1992년이 미국 정치사에서 “여성의 해”라고 불리는 이유다.

 

물론 여성 문제에 관해 미국 사회가 갈 길은 아직 멀다. 십여 명의 여성을 추행한 것으로 알려진 트럼프의 당선이 보여주듯 남성들의 기득권은 생각 이상으로 공고하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성추행에 대한 인식과 대응 측면에서 미국 사회는 결코 1991년 이전, 아니타 힐의 증언이 지상파를 통해 전국에 퍼지기 이전과 같지 않으며 결코 그 이전으로 돌아가지도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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