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암살》의 전지현 실존 모델 남자현 의사 비롯해 조마리아·윤희순·권기옥·김마리아·박자혜·박차정 등
“아! 우리 부인도 국민 중의 일분자이다. 국권과 인권을 회복할 목표를 향하여 전진하고 후퇴할 수 없다. 국민성 있는 부인은 용기를 분발하여 그 이상에 상통함으로써 단합을 견고히 하고 일제히 찬동하여 줄 것을 희망하는 바이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취지서에서 발췌한 글이다. 여성 독립운동가의 대명사는 ‘유관순 열사’다. 김구·윤봉길·이봉창·김상옥 등 많은 독립운동가의 이름들이 거론되지만 유관순 열사를 제외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존재와 활동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조마리아·윤희순·권기옥·김마리아·박자혜·박차정이라는 이름조차 생소하다. 《암살》이나 《밀정》 등 영화를 통해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일부 활약상에 관심이 주목되기도 했지만, 영화적 요소로 치부하는 경우도 많았다.
여성이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준식 독립기념관 관장은 《3·1운동과 여성-세계평화의 길, 한국여성독립운동에서 찾다》 토론회에서 “당시까지만 해도 남녀를 구분하는 인습이 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독립을 위해서는 남성과 여성이 모두 일선에 나서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며 “3·1운동은 여성이 독립운동의 일선과 사회활동의 전면에 나서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였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1919년 3월1일 1000여명의 여학생은 YMCA 등과 연계해 만세 시위에 나섰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는 100여명의 회원을 꾸려 군자금을 모으고 전국에 조직망을 설치했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는 여성독립운동 뿐 아니라 여권신장운동의 신기원으로도 불린다.
그러나 정부가 공식적으로 추모하는 여성 독립운동가는 292명뿐이다. 전체 국가유공자의 1.9%에 불과하다. 최근 들어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을 기리고 역사적 조명을 받게 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지난해 광복절 당시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전면에 나서지 않고 뒤에서 돕는 일이 많아 발굴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며 “늦었지만 여성 독립운동가를 더 많이 찾아내 더 많이 현창시키겠다”고 언급한 바 있다.
지난해 9월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은 실태 파악이 제대로 되지 못했던 여성 독립유공자들을 발굴하고 포상하겠다는 내용을 국무회의를 통해 직접 발표하기도 했다. 이름조차 파악하기 어려웠던 여성의 시대적 상황을 감안해 독립유공자의 제적원부를 조사하고, 배우자인 여성의 인명도 밝혀내 독립운동 당시 기여와 활약상을 역추적하겠다는 것이다.
영화 《암살》의 모델은 실존 독립운동가 남자현 의사
실제로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은 줄기차게 전개돼왔다. 일제에 대한 여성들의 항거 역시 대담하고 거셌다. 영화 《암살》에서 극중 무장 여성독립운동가로 나온 ‘안옥윤’이라는 인물은 가상의 인물이 아닌, 실존했던 여성독립운동가 남자현 의사를 모델로 했다.
남 의사는 남편이 의병으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한 후 유복자를 기르며 독립운동에 투신했고, 1919년 3·1운동 후 중국 요녕성으로 이주해 서로군정서에 가입했다. 여자교육회를 설립해 여권 신장에도 힘을 기울인 남 의사는 1925년 일본 총독 사이토의 암살을 위해 국내에 잠입했다가 실패한 후 만주 지역에서 독립운동 단체의 협력에 힘을 쏟았고, 1933년 만주국 일본전권대사 살해 시도 후 체포돼 하얼빈에서 순국했다.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인 조마리아 여사는 사형 선고를 받은 아들에게 수의(壽衣)와 함께 “나라를 위해 떳떳하게 죽으라”고 편지를 보내 아들을 격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 여사는 직접 러시아 동부 각지를 순회하며 동포들의 민족의식을 각성하는데 크게 노력한 인물이기도 하다. 상해 임시정부 경제후원회 정위원을 맡았으며, 독립운동가의 정신적 지주로 활약했다. 2016년 서거 90주년을 맞아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권기옥 지사는 한국의 첫 여성비행사였다. 권 지사는 1919년 숭의여학교 재학 중 3·1운동을 주도했다. 평남도청 폭파사건에 관여한 혐의로 일제에 쫓기다 1920년 중국으로 망명했고, 조선총독부를 공중에서 폭파하겠다는 생각으로 1923년 중국 남서부 원난육군항공학교에 입학했다. 중국 공군에 10년 간 몸을 담는 동안, 항일전선에서 싸우고 무공훈장을 받았다. 1988년 타계하며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됐다.
한말 최초의 여성 의병장, 윤희순 의사
윤희순 의사는 한말 최초의 여성 의병장이다. 1895년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됐을 때 경고문 《왜놈대장 보거라》를 지어 황실에 압박을 가했고, 여성들도 의병을 일으키겠다고 일제에 경고했다. 윤 의사는 “나라를 구하는 데에는 남녀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며 1907년 정미의병 때 여성으로 구성된 의병대를 조직해 항전했다. ‘안사람 의병가’ 등 의병가를 짓기도 했다. 조선이 식민지가 되자 중국에 망명해 항일연대단체인 무순조선독립단을 만들어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아들인 유돈상도 독립운동가로, 윤 의사는 아들이 일제 경찰에 검거돼 후유증으로 사망하자 비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숨을 거뒀다.
김마리아 열사는 일본 동경 유학 시절,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해 2·8 독립선언서를 몸에 감추고 국내로 잠입했다. 만세 시위를 이끌다 일제 경찰에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5개월간의 옥고 끝에 석방됐지만 고문 후유증은 평생 김 열사를 괴롭혔다. 출소 한 달 만에 당시 최대 여성비밀 항일단체인 대한애국부인회를 재조직하고,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모아 보내는 등 독립운동에 앞섰다. 미국으로 건너간 뒤에는 재미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인 근화회를 창설해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김 열사는 고문 후유증으로 생긴, 뼛속에 고름이 생기는 지병으로 인해 해방 1년 전에 순국했다.
독립운동의 이념과 사상을 정립한 혁명가로 꼽히는 신채호 선생의 부인 박자혜 지사 역시 독립운동가였다. 간호사인 박 의사는 조선총독부 의원에서 근무하던 중 3·1운동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부상당한 학생들과 시민들을 마주한 뒤, 간호사들의 독립운동단체인 간우회를 조직했다. 박 지사는 신채호 선생과의 결혼 후, 나석주 의사의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의거를 비밀리에 돕기도 했다.
박차정 의사는 1929년 민족주의 여성단체 근우회에서 활동했다. 근우회 활동으로 구속됐다가 오빠인 박문호를 따라 중국으로 망명한 박 의사는 그곳에서 약산 김원봉 선생을 만나 연을 맺고, 김원봉 선생이 조직한 의열단을 따라 민족혁명당을 결성하는데 참여했다. 중국 내 독립운동세력을 모아 조선민족전선연맹을 만드는 데도 힘을 보탰다. 박 의사는 조민련 산하 조선의용대에서 활약하다 중국 강서성 곤륜산 전투에서 부상을 당한 뒤 1944년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독립운동가 중 의사·열사·지사는 어떻게 다를까
의사 :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항거하다가 의롭게 돌아가신 분들을 일컫는다. 성패와 상관없이 무력을 통해 적에게 대항한 인물이다. 대표적 인물로 안중근·윤봉길·이봉창 의사가 있다.
열사 : 나라를 위해서 저항하다 의롭게 돌아가신 분, 주로 맨몸으로 싸우다 돌아가신 분을 가리킨다. 강력한 항의의 뜻으로 자결을 선택한 분들도 포함된다. 유관순·이준 열사 등이 있다.
지사 :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하려는 굳은 의지와 뜻을 품은 분들을 가리킨다. 의사나 열사와 달리 살아있는 분들에게도 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