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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에 한반도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과 기록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왜곡되고 축소됐을까? 정확하게 알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역사가 왜곡되는 시점에서야 분노하고 억울해 할 사람들이 있겠지만, 지나고 나면 기록된 것만 남을 뿐 진실을 거의 묻혀 버린다. 하지만 아무리 철저하게 역사를 왜곡하고 지운다 해도 흔적이 남기도 한다. 그러면 후대에 누군가가 그걸 캐치하고 앞 뒤 정황으로 추론해서 새롭게 역사를 해석할 수도 있다. 역사학이란 어떻게 보면 그런 새로운 해석들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락국의 역사에 대해서도, 그렇게 새롭게 해석할 여지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번 회차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해보자. 가락국의 국경에 대한 얘기다.

 


가락국의 초대 왕비가 됐던 황옥 공주(黃玉公主)의 고향 ‘아요디아’는 인도 갠지스 강 중류에 있었다. 가락국까지 오려면 강 물길을 900km 이상 거쳐 바다로 나와 거기서 5000km 정도 더 항해해서 낙동강 하류에 도착했어야 했다. 앞서 말했듯이 그 시대에 그 정도의 거리를 왕래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하안과 해안을 따라 여러 차례 쉬어가면서 항해를 계속해야 하기 때문에 파트너 도시들이 많아야 했을 것이다. 

 

파트너 도시라고 해도 관계 맺음의 양상이 다양했을 것이다. 서로 독립적인 국격을 가지면서 동등한 협력관계를 맺는 곳도 있겠지만, 본국과 식민지처럼 대단히 밀접하고 종속적인 정치경제적 관계를 맺는 곳도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지금의 태국 아유타야 시 일대는 이전에 아요디아의 식민지였거나, 해상별국이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역사가들은 보고 있다. 황옥공주의 긴 여정에는 이곳을 거치면서 휴식을 취하고 물자와 인력을 보충하는 일이 포함됐을 것이다.

 

허황후 항해로


 

역사학에서는 이런 경우 아유타야를 아요디아의 영토로 본다. 앞서 나왔던 페니키아는 이런 식으로 지중해 서쪽 끝인 이베리아 반도 남부와 아프리카 서북부까지, 드문드문 떨어져 있기는 하나 뱃길로 연결되었던 영토를 가졌던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렇다면 가야의 영토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걸 확인하는 것은 일견 상당히 쉬운 일처럼 보인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가락국의 동서남북 경계가 분명히 나와 있기 때문이다. 

 

 東以黃山江 西南以蒼海 西北以地理山 東北以伽耶山 南而爲國尾.

이 한문 문장은 한국고전번역연구원을 비롯, 거의 모든  가락국기 번역에서 다음과 같이 번역된다. 

 

“동쪽으로는 황산강, 서남쪽으로는 창해, 서북쪽으로는 지리산, 동북쪽으로는 가야산, 남쪽으로써 나라의 끝을 이루었다.”

 

이 문장에서 이상한 부분이 느껴지는지? 그렇다. 동쪽, 서남쪽, 서북쪽, 동북쪽에 대해서는 분명히 지명이 있어서 경계가 어디인지 알 수 있는데, 남쪽만 “남쪽으로써 나라의 끝을 이루었다”라고 다른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야 당연하지. 가야의 남쪽은 낙동강 하구에 맞닿은 바다이니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락국기>에 적힌 가야의 남측 국경에 대한 힌트, ‘남쪽’

 

하지만 만일 그렇다면 낙동강 하구의 지명이나 아니면 적어도 ‘남해’라고 명기했다면 더 자연스러운 문장이 되었을 것이다. 즉 “南以○○爲國尾”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쪽으로는 황산강, 서남쪽으로는 창해, 서북쪽으로는 지리산, 동북쪽으로는 가야산, 남쪽으로는 ○○로써 나라의 끝을 이루었다”라고 번역될 것이다. 이렇게 하면 번역문은 물론 원문도 앞뒤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자연스러운 문장이 된다. 

 

지금 전해지는 가락국기에 나오는 가락국의 국경에 대한 서술은 번역해놓고 봐도 어딘가 불균형해보이지만 원문인 “남이위국미(南而爲國尾)”는 연결사 ‘이(而)’ 다음의 명사가 빠지고 바로 술어가 나오는 잘못된 문장이다. 가락국기의 원저자인 금관주지사가 처음 썼을 때부터 그렇게 문법적으로 잘못된 문장을 썼을까? 200년 후 일연이 가락국기를 옮겨 적을 때 실수로, 아님 다른 어떤 이유로 잘못 적었을까? 아니면 그 이후 어느 시점에서 옮겨 적다가 실수로, 아니면 고의로 잘못 적었을까?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그렇게 약간 어색한 내용으로 전해져 내려오면서 별 문제가 제기되지 않았던 이 대목에 대해 처음 문제를 제기한 것은 역시 한반도 해양사 가능성을 처음 제기했던 이종기다. 그는 이 문장에는 분명히 ○○이 들어가야 맞는다고 주장한다. 한반도 해양사 문제에 대한 그의 첫 번째 저서인 《가락국탐사》에서는 일연이 고의로, 뭔가 후대사가들이 알아채기를 바라면서 빠뜨린 게 아닌가 하는 추정을 제시했었다. 

 

《가락국탐사》 초판 발해 32년 후에 나온 《가야공주 일본에 가다》라는 그의 유고집에서도 이 문제가 다시 강조된다. 이번에는 남쪽 국경의 지명이 빠진 것이 일연이 한 일이 아니라 일본의 역사왜곡이었을 가능성에 대해 우회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사실 가락국기나 그 내용을 담아 전하고 있는 삼국유사나, 지금 전해지고 있는 것은 1907년 일본 교토대학 출판부에서 나온 것이 원본이다. 그 이전에 한반도에서 전해져내려 오고 있던 판본들도 수가 적지 않았을 텐데, 어찌 된 셈인지 모두 사라져버려 단 한 권도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일본이 삼국유사 내용 중 어떤 부분을 의도적으로 바꾸거나 없앴다 하더라도, 우린 그 사실도, 바꾸기 이전의 원래 내용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일단 가락국의 국경에 대한 이종기의 새로운 해석을 들어보자. 가락국의 남쪽 경계를 표시한 대목에서 원래는 있었지만 나중에 누락된 것으로 보이는 지명, 그것은 일본 열도에 있는 지명이라는 것이다. 현재 일본 규슈 지방 후쿠오카(福岡)현 가라츠(唐津) 시 일대라는 것이다. 가락국은 과거 위대했던 해상국가 페니키아처럼, 육지로 연결되지 않은 먼 곳에도 영토를 갖고 있었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로 현지답사를 통해 획득한 공간적 추산과 함께 중국의 역사서 《삼국지 위지》의 <동이전(東夷傳)>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제시된다.

 

弁辰與辰韓雜居…其瀆盧國與倭接界

(변진은 진한과 섞여 산다… 그 독로국은 왜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변진은 삼한시대 국가 중 하나로 나중에 가야연맹이 있던 자리에 있었던 국가다. 진한은 그보다 동북쪽이니까 대체로 그 이후 신라에 해당한다. 변진과 진한이 섞여 산다는 얘기는 같은 지역에서 살았지만 서로 다른 종족 정체성을 가졌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김해 분산성 내에 위치한 해은사에 그려진 금관가야 허황후 도래 벽화.ⓒ 연합뉴스

‘왜’와 접하고 있는 ‘독로국’은 일본 열도에 있다

 

‘독로국’은 변진, 즉 가야연맹에 속하는 작은 나라 중 하나다. 여기서 포인트는 이 ‘독로국’이 어디에 있던 나라냐 하는 것이다. ‘왜(倭)’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는데, 동아시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다시피 ‘왜’는 오래 전부터 한민족과 중국의 한(漢)족이 일본을 부르던 명칭으로, 일본 원주민 집단을 의미한다. 가야연맹에 속하는 나라의 국경이 ‘왜’와 접해있다- 중국의 정통 역사서에 담긴 이 대목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후대 역사가들의 화두가 됐다.

 

독로국의 위치에 대해 처음 추론을 시도했던 사람은 이조 후기의 실학자 정약용이다. 그는 《아방강역고(我邦彊域考)》라는 저서에서 지금의 경남 거제도를 독로국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금 국사학계에서는 독로국을 후기 가야연맹의 일원으로 보며, 부산시 동래구를 독로국의 유력한 후보지로 꼽는다. 바다와 접해 있으면서 왜와 가까운 곳으로, 지명이 어원적으로 ‘독로국’과 상통해야 하고, 삼한 시대 ‘국’이 존재할 만한 유적이 남아있으면서 인접한 가락국과 동질성을 가져야 하며, 철 생산과 유통에 적합한 대외 교섭상의 요충지이어야 한다는 점 등을 고려한 것이다.

 

이종기의 주장은 이런 발상을 뛰어넘고 있다. 독로국은 일본 열도에 있었고 일본 원주민 집단 바로 옆에 버젓이 별개의 나라를 형성하고 있었다고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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