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새로운 가치관으로 무장한 여성상 내세운 신작 《모아나》 시대에 맞게 변화하려는 노력 보여

아주 오래도록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해 온 주문과도 같은 문장이 있다. ‘공주와 왕자는 그 이후로도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주인공이 누구든, 어떤 배경과 스토리 안에 놓여 있든 이 법칙은 대부분 유효했다. 이따금 이렇게 변주되기도 했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많고 아름다운 여성 캐릭터는 주체적이고 멋진 남성 캐릭터의 도움을 받아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한다.’  

11월 中美洲서 박스오피스 3주 연속 1위

 신작 《모아나》는 지금까지 등장한 디즈니 애니메이션 중 이 같은 법칙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영화다. 주인공은 모투누이 섬에 사는 소녀 모아나(아우이 크라발호). 족장인 아버지의 뒤를 이어 부족을 이끌어야 하는 인물이다. 모아나는 어릴 때부터 바다를 동경하지만, 암초 밖으로 절대 나가서는 안 된다는 아버지의 불호령에 매번 마음을 접곤 한다. 하지만 모아나는 평화롭던 섬이 저주에 걸려 점점 죽어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 그는 이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이 모투누이의 삶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모험을 떠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저주를 풀기 위해서는 바람과 바다를 다스린다는 전설 속 반신반인(半神半人) 마우이(드웨인 존슨)와 손을 잡아야 한다. ‘바다가 선택한’ 모아나는 마우이를 찾아 항해를 시작한다. 주인공이 자신의 가능성을 깨닫고 조력자와 함께 역경을 극복하는 내용은 성장 스토리의 전형이다. 중요한 건 거기까지 도달하는 과정을 어떤 이야기로 채우느냐다. 모아나는 시작부터 기존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여성 주인공들과는 다른 출발선에 선다. 그는 자신을 포함한 부족 전체의 미래를 구하려 한다. 자기 자신이 있는 곳 그 너머의 세상을 동경했던 《인어공주》(1989) 속 공주의 바람이 결국 왕자의 사랑을 얻는 것으로 향했음을 생각하면, 모아나의 욕망이 얼마나 주체적인 것인지 쉽게 알 수 있다. 비교 대상이 너무 먼 과거의 이야기라고? 그렇다면 《모아나》와 같이 소녀가 주인공이며 비교적 가까운 과거의 디즈니 작품인 《라푼젤》(2010)과 비교하면 어떤가. 주인공은 나름 주체적이고 용감했다. 다만 잃어버렸던 기억을 되찾고, 사랑하는 남성을 위해 기꺼이 희생을 감수할 줄 아는 여성에 그쳤을 뿐 영웅 서사로까지 나아가진 못했다는 한계가 있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모아나》의 한 장면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반면 모아나의 모험에는 남녀 간의 사랑이 끼어들 자리가 아예 없다. 숱한 실패를 겪으면서도 모아나는 꿋꿋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길만을 걸어간다. 그것이 그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모아나는 모험을 함께하는 마우이에게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는 수동적 캐릭터도 아니다. 오히려 자아도취와 연약한 마음에 빠져 있던 마우이를 변화하게 하는 것이 모아나의 몫으로 주어진다. 그는 한순간 용기를 잃고 좌절에 빠진 마우이에게 “지금의 너를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 너 자신”이라는 위로를 전한다. 한때 인간들의 영웅이 되길 원했던 마우이는 그렇게 ‘진짜 영웅’ 모아나를 만나 성장한다. 모아나의 꿈을 지지하고 지혜를 전수해 주는 이가 할머니라는 점, 세계를 창조하고 모아나를 돕는 대자연의 존재가 여성으로 상징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모아나》는 여성 차별과 혐오가 난무하는 시대에 디즈니가 내놓는 여성주의적 대안처럼 보일 정도다. 《인어공주》 《알라딘》(1992), 《공주와 개구리》(2009) 등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중요한 분기점을 함께 겪어 온 두 감독 론 클레멘츠와 존 머스커가 《모아나》를 연출했다는 사실 역시 흥미롭다. 오랜 세월 디즈니에서 숱한 작품을 겪어 온 이들이 새로운 가치관으로 무장한 여성상을 내세운 《모아나》를 선보인 것은, 여성 캐릭터를 대하는 디즈니 내부의 변화를 짐작하게 한다. 지난해 11월 북미에서 먼저 개봉한 이 영화는 박스오피스 3주 연속 1위 자리를 지키며 디즈니의 변화가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작품의 신선도를 평가하는 ‘로튼 토마토’ 지수는 95%에 달했다. 사실 《모아나》를 둘러싼 모든 과정이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개봉 전 몇 차례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폴리네시아 문화권의 전설과 전통 등을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가 인물 묘사 등에서 인종 차별적 요소를 품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논란의 중심에는 마우이가 있었다. 《모아나》의 배경인 태평양 지역 신화에서 묘사되는 마우이는 강인하고 신성한 인물인데, 극 중 마우이는 납작한 코와 거대한 덩치를 지닌 인물로 묘사된다. 마치 ‘폴리네시아인은 뚱뚱하다’는 편견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인다는 게 문제였다. 설상가상 디즈니가 마우이를 묘사한 아동용 핼러윈 의상을 출시하자 비난 여론은 더욱 들끓었다. 문신 모양으로 뒤덮인 갈색 티셔츠와 바지, 나뭇잎을 엮어 만든 듯한 치마가 기본 의상이었다. 이는 TV 쇼에서 백인들이 흑인 분장을 하고 등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종 차별을 조장한다는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논란이 거세지자 디즈니는 공식 사과성명을 발표하고 판매를 전면 중지했다.  

‘남성 중심적’ ‘백인 우월주의’ 가치관서 탈피

 이 같은 비판은 지난해 디즈니가 미국 내 인종차별주의를 우회해 비판한 《주토피아》를 선보인 바 있으므로 더 거셌던 측면이 있다. 세상의 모든 벽을 뛰어넘고 도전하자(Try Everything)는 메시지를 담았던 《주토피아》에 바로 이어 선보이는 영화이니만큼 한층 더 신중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비판이다. 하지만 《겨울왕국》(2013) 이후 디즈니의 감수성이 크게 달라지고 있다는 것 자체는 부인할 수 없다. 남성 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이며 백인 우월주의 가치관을 주입한다는 비판에 시달려 왔던 디즈니가 최근 몇 년간 선보인 작품을 통해서는 적어도 시대에 맞게 변화하려는 노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동화를 재해석하되 진정한 사랑을 남녀 사이가 아닌 가족 안에서 찾으려는 《겨울왕국》의 시도는 디즈니의 오랜 전통을 깬 색다른 서사였다. 이제 더는 디즈니의 공주들이 남성 중심적 세계 안에 순응하며 살아가지 않겠다는 선언과도 같은 작품이었다. 차별과 편견에 맞서며 “누구든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외치며 공존과 화합을 이야기하는 《주토피아》는 그간 디즈니 세계에서 변방에 서 있던 사회적 소수자들을 중심으로 끌고 들어오는 시도였다. 《모아나》의 어린 소녀는 자신을 도와줄 왕자를 기다리는 대신, 그 자신이 선택받은 자가 되어 세계를 구하기 위해 항해를 떠났다. ‘해피 에버 애프터’의 서사를 완전히 넘어선 디즈니의 나침반은 이제 어디를 향할 것인가. 우리가 《모아나》 이후의 디즈니의 행보를 더욱 기대해야 하는 이유다.  
저작권자 © 시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