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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회 문건’ 유출자 지목됐던 故 최경락 경위의 형 최낙기씨 인터뷰

2014년 박근혜 정부 권력이 서슬 퍼렇던 임기 2년 차 가을, 지금은 익숙한 ‘국정 농단’이란 단어가 처음 세간에 등장했다. 그해 11월28일 세계일보는 그간 비선실세라는 소문만 무성했던 정윤회씨가 실제 청와대 인사에 깊숙이 개입하는 등 국정을 농단했다는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 내부문건을 입수했다고 보도했다. 논란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고 청와대는 즉각 문건을 ‘찌라시’로 규정하며 진화에 나섰다.

 

이후 검찰수사는 문건 내용의 진위 파악보다 유출자 색출에 집중했다. 그리고 2014년 2월까지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에서 근무했던 박관천 경정을 작성자로, 서울경찰청 정보분실 소속 한일·최경락 경위를 유출자로 확정했다. 그러던 중 12월13일, 수사를 받던 최 경위가 자신에게 집중되는 혐의에 억울함을 토로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 그가 남긴 유서에 청와대 민정비서관실의 회유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내용이 있었지만 그에 대한 수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최 경위 유족은 사건 후 줄곧 그의 죽음을 ‘정치적 타살’이라 주장해 왔다. 그러다가 2016년 10월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가 터지고 이를 수사하기 위한 특검이 꾸려지자, 12월19일 특검에 최 경위 죽음에 대한 재수사를 요청했다. 촛불집회 현장에서 받은 시민 3만여 명의 서명도 함께 제출했다. 1월11일 기자와 만난 최 경위 형 최낙기씨는 “동생의 죽음은 내가 죽을 때까지 책임지고 밝혀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故 최경락 경위의 영정사진 © 최낙기씨 제공

“설계된 그림에 짜 맞추는 수사 이뤄진 듯”

 

형 최씨는 “동생이 조사받고 얼굴이 반쪽이 돼 와서는 ‘이미 얘들(검찰)이 큰 그림을 짜 놓고 거기에 맞춰 만들어가는 것 같다’고 하더라”고 기억했다. 최 경위는 수사 당시, 2014년 2월 청와대를 나온 박관천 경정이 경찰청 정보분실로 복귀하면서 들고 나온 상자 속 정윤회 문건을 유출한 혐의에 대해 문건의 존재도 몰랐다고 주장했다. 형 최씨 역시 “동생은 그 전까지 박 경정을 알지 못했으며, 설령 그날 상자를 발견했더라도 굳이 1000여 매의 민감한 문건을 직접 유출하는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고 강조했다.

 

또한 최씨는 당시 문건이 놓여 있던 위치에 대한 사건 관계자들의 진술에 차이가 있는 점도 지적했다. 박 경정 측은 문건을 자신의 캐비닛에 넣고 열쇠로 잠갔다고 한 반면, 한일 경위 측은 사무실 복사기 옆에 문건이 든 상자가 놓여 있었다고 기억했다. 한편 당시 정보분실 직원들 중 상자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최 경위 장례를 치르는 동안 찾아온 경찰 동료들은 유족에게 검찰 조사에서 “상자를 못 봤다”고 솔직하게 진술했더니 해당 수사관이 “잘못되면 너희도 죽을 수 있으니 입 다물고 있으라”고 말했다고 한다.

 

최 경위가 문건을 유출했다는 혐의에 비해 이를 뒷받침할 실질적인 증거가 불충분했다는 주장도 주목된다. 당시 최 경위가 세계일보 기자에게 문건을 유출한 수단으로 지목된 카카오톡 기록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최 경위가 문건을 유출한 또 다른 상대로 지목된 한화그룹 대관(對官)업무 담당직원의 경우, 수사 과정에서 한 경위와의 통화 녹음파일은 발견된 반면 최 경위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 형 최씨는 “당시 동생은 한화 측 사람들과 한 경위 소개로 인사 잠깐 나눴던 게 전부라 말하며 펄펄 뛰었다”고 밝혔다.

 

한 경위를 걱정하는 최 경위의 유서 내용과 달리, 수사 과정에서 최 경위와 유족은 한 경위에 대한 서운함을 감출 수 없었다고 한다. 첫째는 변호사 선임 문제 때문이다. 문건 유출 혐의를 함께 받게 된 직후 한 경위는 최 경위에게 자신이 잘 아는 이아무개 변호사를 공동선임하자고 제안했다. 최 경위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후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됐을 때 형 최씨는 논의를 위해 급히 이 변호사를 찾아갔다. 그러나 그 사이 한 경위는 최 경위 측에 알리지 않은 채 걸출한 다른 변호사 두 명을 선임한 상태였다. 형 최씨는 이후 이 변호사는 최 경위 변호에 소극적이었으며 유족의 어떤 자료 요청에도 협조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덧붙여, 사건 이후 연락이 없던 이 변호사가 최근 자신이 몇몇 언론사와 접촉하자, 인터뷰를 자제하라는 연락이 왔다고도 얘기했다.

 

1월11일 경기도 하남의 모 카페에서 진행한 인터뷰 중, 고(故) 최경락 경위의 형 최낙기씨가 동생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 시사저널 박정훈

“최 경위 담당 변호사, 진실규명 발목 잡아”

 

유족은 현재 진행 중인 특검 수사 결과를 지켜본 후 이 같은 의문들에 대해 이 변호사의 해명을 요구할 계획도 갖고 있다. 취재 결과, 이 변호사와 당시 문건 유출 수사를 담당했던 임아무개 검사는 검찰 선후배 사이였던 것으로 확인됐다. 최낙기씨는 “최 경위 장례 당시, 이 변호사가 유족에게 ‘임 검사가 자신도 BH(청와대)에서 찍어 내려와 수사를 맡게 된 거라며 막막해했다’고 말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에 대해 이 변호사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강력히 부인했다. 그러면서 “임 검사와 친분은 있지만 판결에 부당한 영향을 줄 대화를 주고받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소극적 변론 의혹에 대해서도 “최선을 다했다”고 덧붙였다.

 

형 최씨는 이 밖에도 최 경위가 구속영장 청구 기각 후 이례적으로 재소환됐을 당시, 이 변호사가 공식적인 소환장이 아닌 검찰로부터 직접 전화를 받은 사실에 대해서도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최씨는 “변호사가 사실상 검찰과 다름없었다”면서 “동생이 자살하기 직전, 변호사 사무실에 들러 묵주를 움켜쥐고 대성통곡했다던데 그 이유도 알고 싶다”고 덧붙였다. 이 변호사는 “그런 일이 없었다”고 반박했다.

 

최씨는 처음에 끝까지 싸워보려 했던 동생 최 경위가 검찰 조사를 받고 나오더니 모든 걸 포기한 상태였다고 말했다. 실제 구치소에선 밥을 굶기고 소변을 못 보게 하는 등 최 경위에게 신체적 압박까지 가해졌다고 최씨는 주장했다. 최씨는 자신이 구치소를 찾았을 때 최 경위는 앞니를 부딪칠 만큼 심하게 추위에 떨고 있었다고 기억했다. 그러면서 얼마 전 오리털 점퍼를 걸치고 편하게 검찰 조사를 받던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사진을 보고 동생의 모습과 겹쳐 울분을 터뜨렸다고 했다. 최 경위와 한 경위에게 문건 유출을 인정하라고 회유한 의혹을 받고 있는 청와대 민정비서관실엔 당시 우병우가 있었다. 최씨는 “민정비서관실의 회유 내용이 담긴 동생의 유서도 처음에 경찰과 그 윗선에서 감추려 했다”고 말하며 “동생은 이미 모든 걸 예상하고 죽음을 택한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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