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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에선 5년마다 돌아가며 국왕 맡아…높은 수준의 도덕성 갖춰야

세계 최장수 재위(70년) 기록을 갖고 있던 푸미폰 아둔야뎃(Bhumibol Adulyadej) 태국 국왕이 10월13일 공식 서거했습니다. 푸미폰 국왕은 태국 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해왔기에 태국 국민들의 슬픔은 어느 때보다 큽니다. 서거 소식이 전해진 직후, 태국의 거의 모든 상점에는 국왕 초상화가 내걸렸고 각종 SNS마다 ‘우리는 국왕을 사랑합니다’(We love King)이라는 심벌로 뒤덮여 있습니다. 태국 여행을 다녀오신 분들은 알겠지만, 푸미폰 국왕의 위상은 태국 그 자체입니다. 일본처럼 신적인 존재는 아니지만, 정국이 혼란스러울 때마다 푸미폰 국왕은 모든 문제를 말끔하게 정리해주는 해결사이자 재판관이었습니다. 최근 오랜 기간 병석에 있으면서 외부 활동이 뜸했지만, TV를 켜면 매일 정기적으로 국왕이 빈민가를 찾아가 힘들어 하는 국민들을 위로하는 모습을 방송을 통해 볼 수 있었습니다. 집집마다 국왕 사진이 걸려 있는 것은 태국의 일반적인 모습이었죠.  혹시 태국 여행 경험이 있으신 분들의 경우, 가이드로부터 가장 많이 들으신 말이 무엇인가요? 저는 국왕 사진을 가리킬 때 검지손가락을 쓰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손바닥으로 가리키든가 아니면 최소한 엄지손가락을 사용해달라는 주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만큼 태국 국민들은 일상 속에서 푸미폰 국왕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냈습니다.  세계 주요 언론이 푸미폰 국왕 서거 소식을 전하면서 염려하는 점은 태국 정국의 불안입니다. 아시다시피 태국은 여러 차례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쿠데타 세력이 거사(巨事)의 마침표로 삼는 것이 바로 푸미폰 국왕의 재가(裁可)였습니다. 만약 국왕이 쿠데타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걸로 모든 거사는 끝납니다. 그만큼 푸미폰 국왕은 태국 조야(朝野)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쳐왔습니다.  현재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에서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는 태국·말레이시아·캄보디아·브루나이 등 총 네 곳입니다. 브루나이를 제외하고 세 나라에서 국왕은 국가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역할만 합니다. 실권은 총리가 쥐고 있죠.
2012년 12월 85세 생일을 맞아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던 푸미폰 태국 국왕. 그로부터 3년10개월 뒤인 2016년 10월 세상을 떠났다. © EPA 연합

태국 정국 불안 때 국왕이 해결사로 나서

다른 나라를 살펴볼까요. 말레이시아는 연방제와 입헌군주제가 결합돼 있습니다. 국왕을 부르는 공식 명칭도 ‘양 디-쁘르뚜안 아공(Yang di-Pertuan Agong)’입니다. 직역하면 ‘고귀한 자리에 오른 분(Agong)’이라는 뜻이죠.  말레이시아에서는 국왕 선출법이 독특합니다. 평생 재임하는 일반 입헌군주제와는 달리 임기가 정해져 있죠. 1957년 독립 후 지금까지 말레이시아는 14개 주가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이중 9개 주에 술탄(Sultan)이라고 불리는 지도자가 있습니다. 이 9명이 5년 마다 돌아가며 ‘양 디-쁘르뚜안 아공’을 맡고 있습니다.  현재 말레이시아는 국왕 교체기입니다. 10월12일 9개주 술탄들이 모여 수도 콸라룸푸르에서 차기 국왕을 선출하기 위한 회의에 들어갔는데, 현지 언론은 순번 상 켈란탄 주의 술탄 무하마드 5세가 유력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캄보디아도 입헌군주제입니다. 현 국왕은 노로돔 시하모니(Norodom Sihamoni)라는 분입니다. 1953년에 태어났으니 우리 나이로 치면 올해 예순 넷이군요. 아버지는 유명한 시아누크 국왕입니다. 시하모니 국왕은 2004년 부친인 시아누크 국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지금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노로돔은 가문 이름입니다. 캄보디아는 앙두옹(Ang Duong) 국왕의 세 아들인 노로돔·시소와트(Sisowath)·시보타(Si Votha) 중, 두 번을 제외하고는 장남(노로돔) 집안에서 왕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현 시하모니 국왕은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발레리노 겸 안무가, 영화촬영가, 유네스코 홍보대사 등을 역임하는 등 특이한 이력이 있습니다.   작은 섬나라 브루나이는 앞서 세 나라와는 다르게 국왕이 국정 최고 책임자입니다. 현 국왕은 하지 하사날 볼키아(Hasi Hassanal Bolkiah) 국왕이죠. 정교일치(政敎相同) 체제인 브루나이에서 볼키아 국왕은 최고 종교지도자인 술탄이자 행정수반, 총리 역할을 모두 맡고 있습니다. 군과 경찰도 모두 그의 지휘 아래에 있습니다. 심지어 입법부·사법부까지 모두 관할합니다. 사실상 국왕이 모든 것을 관리한다고 할 수 있죠. 석유부국인 브루나이 내 모든 자산이 그의 소유입니다. 1967년 왕위에 오른 볼키아 국왕은 브루나이 건국 후 29번째 국왕이며, 정식 명칭은 브루나이 술탄 겸 양 디-쁘루뚜안(Sultan and Yang Di-Pertuan)입니다.  볼키아 국왕은 어마어마한 재산으로도 유명합니다. 가장 최근 조사인 2008년 포브스 선정 상위 15개 부자 왕족(The Top 15 Wealthiest Royals)에서 볼키아 국왕 재산은 200억 달러(약 22조원)이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조사에서 가장 부유한 왕족으로 선정된 곳이 얼마 전 서거한 푸미폰 태국 국왕이라는 점이죠. 당시 포브스가 추산한 푸미폰 국왕 가문의 보유 자산은 무려 350억달러(약 39조원)였습니다.   인도네시아의 경우 중부 자바의 고도(古都) 족자카르타에 가보면 국왕(술탄)이 살고 있는 크라톤(Kraton) 왕궁을 볼 수 있 있습니다. 족자카르타 술탄은 인도네시아 정부가 공식 인정하는 국왕이 아닌, 족자카르타 특별자치구에서만 인정받는 특별 행정수반입니다. 과거에는 인도네시아 최대 부족인 자바(Java)족을 이끌었지만 지금은 명맥만 유지하고 있습니다. 처소인 왕궁도 관광명소로만 이용되고 있습니다.  

독립 이후 국력 결집 위해 불안한 동거 시작

동남아의 입헌군주제는 기형적인 형태임에 틀림없습니다. 태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국가들이 서구열강의 식민 지배를 받아오면서 과거 유산인 국왕 중심의 국가체제는 사라졌습니다. 민주주의라는 보편적 개념이 도입되면서 국왕은 상징적인 역할 만 합니다. 독립 이후 국력을 하나로 결집시킬 구심점이 필요했고, 그 역할을 형식적이지만 국왕이 도맡아서 하고 있다고 봐야합니다. 정치 시스템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국왕이라는 역할은 분명, 필요했을 거라고 봅니다. 하지만 후진적인 정치 시스템과 입헌군주제가 함께 한다는 점은 불안정한 동거임에 틀림없습니다.  푸미폰 국왕처럼 매번 현명한 판단을 내린다면 모르겠지만, 만약 국왕이 잘못된 결정을 내린다면 나라 전체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겁니다. 반군세력인 크메르루즈가 시아누크 국왕을 몰아낸 직후, 캄보디아 전역을 킬링필드로 만든 것이 좋은 예일 겁니다. 빠윈 차차왈뽕뿐 일본 교토대 동남아연구센터 소장은 “전 세계적으로 권위주의가 사라지고 다양한 소통방식이 생겨나는 마당에 태국에서처럼 국왕 비판을 불경죄(Lèse-majesté Law)로 처리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도덕적인 문제로 국왕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다면, 지금의 입헌군주제는 곧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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