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홍진 감독의 신작, 그렇게 악마는 우리 주변에 존재한다
나홍진 감독의 <곡성(哭聲)>은 무시무시하다. 한마디로 걸작이다. 언론시사회 직후 쏟아지는 찬사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곡성>에 관한 이 글은 영화를 관람한 후 읽는 편이 더 좋을 수도 있겠다. 이 영화가 관객에게 선사하는 충격은 어떤 정보도 없이 접했을 때 더 크게 다가온다. 아직 못 본 이들에게는 이렇게 간단 평을 남긴다. ‘곡소리 나는 이야기, 억 소리 나는 연출.’ 이미 보신 분들은 읽어도 무방하겠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강조하자면, 스포일러 주의!
‘곡소리 나는 이야기, 억 소리 나는 연출’
평화롭기만 했던 작은 마을에 흉흉한 사건이 연달아 발생한다. 가족을 무참하게 살해하는가 하면, 가해자의 몸에는 정체 모를 수포 자국이 가득하다. 뉴스에서는 독버섯을 잘못 먹어 벌어진 일이라며 애써 사건을 축소한다. 마을 주민들 사이에서는 외지에서 온 일본인(쿠니무라 준)이 마을에 나쁜 기운을 퍼뜨리고 있다며 경계한다. “싹 다 그 양반이 오고 나서 생긴 일들 아녀~”
경찰 종구(곽도원)의 눈에도 외지인의 정체가 의심스럽다. 아니나 다를까, 그와 접촉한 후 종구의 가족에게도 심상치 않은 일이 발생한다. 다정했던 딸이 험한 말을 입에 담는가 하면, 고열증세로 사경을 헤맨다. 병원에서도 마땅한 치료책이 없자 종구는 장모의 추천으로 용하다는 무속인 일광(황정민)에게 도움을 청한다. 종구의 집을 살펴보던 일광은 이렇게 얘기한다. “며칠 전에 만나면 안 되는 것을 만난 적 있제? 자네가 그것을 건드려부렀어.”
왜 하필 많은 사람 중 마을에 퍼진 검은 기운, 즉 악(惡)은 종구의 딸을 선택한 것일까. 종구는 딸의 안위가 걱정스러운 와중에도 그것이 알고 싶다. 그러니까 <곡성>은 피해자 종구의 입장에서 악이란 무엇인지를 추적하는 영화다. 이를 가이드라인처럼 드러내는 영화의 시작은 굉장히 불경하다. 누가복음의 24장 37~39절을 인용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되 너희가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나홍진 감독은 <곡성>을 통해 나쁜 일이 벌어지면 입버릇처럼 들먹이되 추상적인 형태로 존재하는 악에 구체성을 부여한다. 그와 같은 야심은 관객의 예상치를 뛰어넘는 이야기 전개와 장르의 활용에서 드러난다. 성경의 구절을 인용하면서도 영화는 일광이 펼치는 굿을 영화에 배치하고 삶과 영계(靈界)를 넘나드는 인물을 등장시켜 관객의 혼을 빼놓는다. 오컬트 무비에 좀비물을 섞은 구성이라고 할 수 있을 터다. 그것이 단순히 장르 간의 이종(異種)교배로 보이지 않는 이유는 우리에게 익숙한 시골 마을이 배경인 까닭이다.
그 때문에 <곡성>은 <살인의 추억>(2003)과도 비교가 된다. 다만 후자의 영화가 철저히 수사관의 입장에서 전개된다면, 전자는 피해자의 시선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이야기하는 바가 다르다. <살인의 추억>이 도시 형사와 시골 형사의 대립으로 화성 연쇄살인 사건이 벌어졌던 당시의 혼란한 사회 분위기를 묘사했다면, <곡성>은 피해자가 겪는 고통이 이야기의 핵심에 있다. 아무리 종구와 같은 경찰이 침착하게 사건을 수사하려 해도 그 피해가 자신의 것이 되었을 때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기란 쉽지 않을 터다.
입에 담지 못할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 듯 발생하자 주민들 사이에서는 여러 가지 추측과 억측이 쏟아진다. “요렇게 소문이 파다하면 말이여, 무슨 이유가 있는 거여. 요새 동네에서 사람 자꾸 죽어 나가는 거, 그놈이랑 뭔 연관이 있는 거여.” 옆집 수저 개수까지 알 정도로 이웃 간의 정이 돈독한 우리네 정서상 노골적으로 퍼져가는 소문은 피해 당사자의 판단은 물론 사건의 본질까지 흐려 놓는다. 그것이 악이, 그리고 악마가 추상화되는 토양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닐까. <곡성>의 포스터에 새겨진 문구가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절대 현혹되지 마라.’
이렇게 대담한 방식의 묘사는 꽤 오랜만
악은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종구의 딸이 의문의 연쇄 사건에 말려든 건 안타깝지만, 그녀가 특별해서가 아니다. 그냥 불운한 거다. “왜 우리 딸인가요?” 종구의 의문에 대한 일광의 대답. “자네는 낚시할 적에 뭣이 걸려 나올지 알고 허나? 그놈은 낚시를 하는 거여. 뭣이 딸려 나올진 지도 몰랐겄제. 자네 딸내미는 그것을 확 물어버린 거여.” 다시 말해 종구의 딸처럼 착하고 평범한 이들을 악의 수렁에 빠뜨리는 가해자, 즉 악마는 우리 주변에 존재한다. 인간의 탈을 쓰고 있기에 잘 눈에 띄지 않을 뿐이다.
그럴 때 작동하는 것이 의심이다. 오가는 이가 별로 없는 작은 마을에 외지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경계 대상인데, 일본인이기까지 하니 그야말로 확신범이다. 수사에는 별다른 진전이 없고, 딸의 이상증세는 병원에서도 정확한 병명을 모르니 굿까지 동원된다. 하지만 종구는 딸의 아픔을 판돈처럼 걸고 굿을 하는 것 같아 일광이 못마땅하다. 이때 홀연히 나타난 정체불명의 여인(천우희). 그녀에게 종구는 묻는다. “직접 본 거여?” 무명의 여인 왈, “하믄 봤제. 여기서 다 죽여뿐 거여.” 그 누구도 모르는 마을의 사건을 모두 꿰뚫어보는 듯한 태도와 소복(素服)을 입고 홀연히 출몰하는 그녀는 사람인가, 유령인가.
종구는 연쇄 사건을 맞닥뜨리면서 입버릇처럼 내뱉는다. “뭣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이여?”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그럴 수밖에. 관점이 틀린 거다. 악마는 단수가 아니다. 악은 창궐한다. 외지인의 모습을 할 때도 있고, 유령처럼 다가올 때도 있으며, 우리 이웃처럼 평범한 얼굴로 유혹하기도 한다. 여기저기서 출몰하고 있는 말, 없는 말을 모두 쏟아내니 현혹되지 않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이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 우리는 종교를 갖고 기도를 한다. 그리고 나홍진 같은 감독은 여기서 엄청난 영화의 소재를 발견한다.
<곡성>을 두고 무시무시하다는 표현을 쓰는 건 악의 탐구라는 절대 쉽지 않은 작업을 통해 구체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나홍진은 기어이 악마의 실체를 드러낸다. 그리고 그 악마는 스크린 너머의 관객을 향해 카메라를 들고 셔터를 누른다. 운이 없는 이는 그 사진에 찍힐 테고, 이후의 운명은… 굳이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악마는 우리 주변에 무수한 미끼를 던져대고 입질이 올 때를 밤낮으로 기다린다. 한국영화에서 이렇게 대담한 방식의 묘사는 꽤 오랜만이다. <곡성>만큼은 많은 이들이 현혹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