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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고인돌-배암그라편> 원작가 박수동씨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고인돌 - 배암 그라편>에서 고인돌은 한층 활달한 기세로 성 편력을 펼친다. 그런데 작가 박수동씨(59)는 돌아온 고인돌이 마냥 달갑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애니메이션 제작사에서 처음 맛보기를 보여주는데, 낯이 확 붉어지데, 나는 직접 성행위를 묘사 한적은 한 번도 없고, 키스 장면을 넣을 때도 조심스럽게, 일부러 살짝 꼬아서 그리곤 했는데. 허, 참. 내가 구닥다리가 되었나?”  어쨌든 1970년대에 성인 만화의 장을 열어 젖뜨린 <고인돌>이 30여년 세월을 건너뛰어 미디오 애니메이션으로 다시 태어남으로써 ‘뉴웨이브’ 의 선두에 섰다(87쪽 상자 기사 참조). 출발은 1974년 <선데이 서울>에 <고인돌>을 연재하면서 부터, 그는 아이들ㅇ나 보는 것으로 치부되던 만화를 성인의 오락거리로 확대해다. 유통 방식에도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주로 대본 소용으로 유통되던 만화책을 서점 판매용으로 내놓아 만화가가 인세를 받는 작가로 당당히 설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하마터면 흳의 캐릭터 고인돌은 태어나지 못할 뻔했다. 박수동이 ‘시사 만화가’의 길을 걸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마감한 뒤 곧바로 경향신문사에 입사했다. 두 달쯤 지나서였을까, 내용이 마음에 만들었는지 국장이 다시 그려오라고 했다. 박씨는 맨윗칸은 그대로 둔채, 아래 세칸을 칼로 오려낸 뒤 그 부분만 새로 그려 갖다 주었다고 한다. 반항하는 거냐고 묻는 듯하던 국장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이 후에도 <한국일보>와 인연이 닿을 뻔했지만 사옥에 불이 나는 바람에 편집국에 제출한 토트폴리오가 잿더미에 묻혔다. “인연이 없다고 생각했다. 돌이켜 보니 나는 시사 만화를 그릴 적성이 아니었다. 마음이 비단결이기 때문이다.”(웃음) 다른 사람의 약점을 보면 물고 늘어지고, 일단 싸움이 붙으면 한판 겨루어보리라는 심성이필요한데, 자신은 만사 팽개치고 도망가는 성격이라는 것이다.  그 말대로라면, 그의 성격은 고인돌의 캐릭터에 고스란히 베어 있는 셈이다. 송충이 눈썹에 실실웃는 표정이 먼저 떠오르는 <고인돌>은,1974년 처음 선봉인 이래 무려 18년 동안 터를 옮겨 가며 연재되었다. 만화 평론가 오은하씨에 따르면 고인돌은 ‘구름에 달 가듯’ 유유자적한 성격이며, 바로 그 덕에 특정 시기에 갇히지 않고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매력의 요체는 황당한 상상력,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썰렁함이다.

‘성 해방’ 긍정론과 ‘남근주의’ 눈총 한몸에
 그 예측 불허 세계를 빚어내는 눈과손은 오로지 그의 것이다. 사사한 스승이 없을 뿐아니라, 가르치는 제자도 없다. ‘배워서도 좋게 그릴 수 있지만, 배우지 않아도 좋은 게 만화’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하긴 누가 그의 선을 배울 수 있을 것인가. 지인들이 ‘중풍에 걸린 선’ 혹은 ‘취해서 그린 그림’이라고 놀리곤 한다는 그의 그림은, 어눌한 듯 달관의 경지인 줃인공의 성격과 꼭 닮았다. 요즘도 그는 성냥개비 끝에 먹을 묻혀 슥슥 선을 빚어낸다.

 그가 <고인돌>을 통해 펼쳐보인 세계는 극단의 평가를 받았다. 환호성도 높았지만, 눈총도엇지않았다.문화 평론가 김현씨는 그의만화가 남성위주의 한국 사회를 뒤집는 긍정적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본 긍정론자였다. (<한국 만화의 모험가들>), 반면 만화 평론가 황민호씨는 고인돌이 여성이 주도하는 모계 사회를 만들어 냈다는 점에서 전복적이지만, 그를 통해 설파하는 것은 결국 남근 지상주의라고 지적했다.(<캐릭터로 읽는 한국 만화사>). 여성들이 당당하게 성권(性權)을 부르짖었다는 점을 높이 살 것인가, 여자들이 하나같이 남자의 ‘거시기’에 투항한다는 점을 크게 볼 것인가 하는 논쟁은, 히죽 웃는 고인돌의 표정 앞에 금세 무력해지고 만다. 만화가 박수동이 시사를 평하는 데 도통 흥미를 느끼지 못했듯이, ‘고인돌’또한 그런 세속의 잣대에서 멀찌감치 벗어나 이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요즘 월간<바둑>과 몇몇 사보에 그림을 그릴뿐 유유자적하게 지내고 있다. 그는 바둑이 아마 5단이며 산을 오른 지는 10년이 넘었다. 한때는 골프도 면함을 내밀 만큼 쳤다. 그 덕에 전문 만화를 그리더라도 뭔가 알고 그린다는 평을 듣는다. 전문 만화가 아니어도, 삶에 밀착한 만화에 각별한 애정을 느끼고 있다. 별것 아닌 일로도 ‘살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갈등에 이르는 결혼 생활의 풍경을 <중고 부부>라는 만화를 통해 그려내고 있는데, 작업을 할 때면 손에 저로 신명이 실린다고 한다. 그 바탕에는 제대로 된 성인 만화가 설 곳이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는 답답함이 자리 잡고 있다.  그의 지론은, 성인물이란 요즘 통용되듯 포르노라 아니라 말 그대로 어른들의 이야기여야 한다는 것이다. 일찍이 그의 통찰력은 성에 그치지 않았다. ‘생과사’편을 보자 주인공은 아이들 들쳐업고 멧돼지 몰이에 나선 여인, 사냥감을  놓치고 털썩 주저 않아 말한다. “아들아! 먹고 살기가 이렇게 힘들단다” 그 다음 장면, 바우 뒤로 몸을 숨기 멧돼지가 새끼를 푹 끌어안으며 말한다.‘봤지, 내새끼야, 안주고 상기가 이렇게 힘들단다“ 인간의 관점을 고집하지 않는 경지도 경지려니와 화면이나 대사를 구사하는 폼이 한편의 시(詩)다.

 그는 다음 작품으로 고승 이야기를 집어들었다. 그의 태도가탈속의 자세로 세속을 사랑하는 것임을 감안한다면 별난 고승 열전을 기대해도 좋을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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