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있는 자 듣고 눈있는 자 보아라. 작은 체구에서 뿜어내는 조용필의 열창을 ,조용필! 그대는 들리는가 세계가 부르는 소리가", 조용필
오라방 콘서뚜 보젠 제주에서 왔쑤다…. 이것은 지난 5월27일 오후 4시 조용필의 콘서트장인 서울 잠실실내체육관에 나붙은 구호들이다.
외형적으로 볼 때 가수 조용필의 인기는 여전했다. 그의 노래를 들으려고 온 것인지 모습을 보려고 온 것인지 분간할 수 없는
팬들로 8천5백석 좌석은 매진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상경한 10대 팬들이 오전 9시부터 줄지어 기다렸으며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집단중독
현상??도 여전했다. 그바람에 조용필의 열창하는 모습을 꼭 한번 보고 싶어 부여에서 상경했다는, 고무신 신고 머리쪽진 할머니와 어린 딸을 손에
잡고 온 젊은 부모들은 물위의 기름처럼 머쓱한 채 뒤쪽에 물러서 있었다.
조용필은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좌석의 매진 사실을 몇 번이나 확인했다고 한다. 이혼과 약물중독설의 회오리 속에서 국내활동의
중단을 선언한 이후 처음 여는 콘서트이기에 그 자신도 공연의 성패를 예측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기라성 같은 인기 가수들이
속절없이 ‘막뒤'로 사라져가는 연예계. 그 바닥에서 인기정상의 자리를 10여년이상 '장기집권'해온 그로서도 이번 공연은 미지수였을 것이다. 공연
주관 실무자인 현대음향의 김일혁실장은 '기존의 콘서트 제작비는 2~3천만원에 불과하지만 이번 공연에는 1억원정도를 투입, 세계적인 가수의 콘서트
때 사용하는 음향과 조명 시스템을 도입했다'고 밝혔다.
가수 조용필을 이야기할 때는 76년에 취입한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빼놓을 수 없다. 그 당시 모국을 찾아온 조총련계
제일동포들의 향수를 달래주기 위해 황선우씨가 작사?작곡한 이 노래는 숱한 무명가수 중의 한사람이었던 조용필을 최고 인기가수로 만들었다.
뽕짝조이면서 고고 리듬의 현대적 감각이 가미된 '돌아와요…'는 부산의 음악다방에서 서울의 음악다방으로, 방송 전파를 타고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갔다.
일취월장하던 그는 77년5월 가요계에 휘몰아친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어 가수활동이 묶였고 그 기간에 물과 소금을 먹으며 ‘피의
성대 훈련'을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끊임없는 변신으로 인기 유지 대마초 규제가 풀린 뒤 자작곡인 ‘창 밖의 여자로 그가 돌아왔을 때, 그를 잊고 있었던
사람들은 비범한 가창력으로 열창하는 작은 거인에게 예전보다 더 뜨거운 갈채를 보냈다. 흐느끼듯 젖어드는 짙은 색깔의 슬로 비트로 부른 '창 밖의
여자' 이 노래가 수록된 음반은 우리나라 레코드 사상 최고의 히트를 기록, 1백만장 이상 팔렸다. 그해 연말 그는 TBC방송 가요대상에서 최우수
남자가수상?최고인기가수상?주제가 작곡상을 휩쓸었다. 이날 조용필은 밀려드는 꽃다발과 팬들의 아우성 속에서 눈물을 펑펑 쏟아댔다.
거의 같은 시기에 유행한 소녀 취향의 ‘단발머리와 동요풍의 고추잠자리등은 용필이 오빠 증후군'이라는 가요문화의 색다른 풍속도를
낳았다. 그는 중장년층을 겨냥한 노래도 끊임없이 발표했다. 촛불,비련,일편단심 민들레야,미워미워미워처럼 한의 정서에 호소하는 애절한 노래를
불렀는가 하면 한오백년,강원도 아리랑 같은 민요풍도 노래로 잇따라 발표했다.
국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그는 82년에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일본에 진출, 오늘까지 폭풍 같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의
일본가요계 진출은 한일 문화교류 차원에서 볼 때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가 일본에서 취입한 추억의 미아가 크게 히트하고 있던 88년 3월의
일이다. 때마침 방한중이던 일본의 우노소스케 외상은 자신의 숙소에 조용필을 초청하여 '한일 양국의 문화교류에 큰 몫을 한 인물이라고 추켜세우고
'앞으로 더욱더 그 역할에 힘써달라고 당부'했다. 이어 우노 와상은 피아노로 아리랑'을 연주하고 조용필은 거기에 맟춰 노래를 불렀다.
그 무렵 신문에 게재된‘엔카 개방 노린 우노의 아리랑 연주'라는 동경발 기사를 보면 그의 일본에서의 성공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께름칙한 면이 많다. 이 기사에 의하면 조용필이 일본에 처음 진출했을 때 일본에 삵 있는 많은 한국인들은 '일본 대중문화의 한국
진출을 위해 의도된 것'이라는 우려를 나타냈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가 일본에서 유명 인기가수로 각광을 받고 있을 때 '일본 가요인 엔카도
하루빨리 한국에 진출해야 된다'는 주장이 급속히, 그리고 넓게 확산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음악평론가 이건용교수는 ‘우리 노래의 허상'이라는 글에서 조용필의 일본가요계 진출의 의미에 대해 '돌아와요'와 같은 트롯조의
노래들이 과연 우리의 곡인가"라고 반문하고 '그것은 그렇지 않다'고 못박았다. 아울러 우리나라의 대중가수 몇 명이 일본에서 국위를 선양한 듯이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정작 느긋한 즐거움을 느끼고 있을 장본인은'자신들의 노래양식이 아직 한국에 건재한다는 사실에 뿌듯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을 일본인'이라고 환기시키고 있다.
트롯에서 재즈까지 소화하는 가창력 아무튼 그가 최고의 인기를 장기간 누릴 수 있었던 비결은
감미로운 트롯부터 강렬한 비트의 록, 마음을 뒤흔드는 재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소화해내는 가창력에 있다. 그런가하면 음악 평론가 이영미씨는
“조용필의 노래는 그 개인의 소산이라기보다는 한국 대중가요의 핵심적인 역량이 투입된 작품'이라고 설명한 뒤, 그동안 그가 유행의 시류에 순발력
있게 그리고 정확하게 적응하고 변신해왔던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예컨대 80년대 중반, 주현미의 '비내리는 영동교'같은 장조 트롯이
크게 유행하자 장조 트롯 계열인 '허공'을 발표했으며, 이어 이승철,변진섭,이문세 등의 록발라드 계열의 노래가 인기를 얻자 87년에는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같은 발라드 음악을 발표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몇해 동안 그의 인기는 한풀 꺽이는 듯했다. 이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일본공연 위주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그는
일본에서 1백14회 미국에서 3회의 공연을 해 3일에 한번꼴로 콘서트를 열었다.
불혹의 나이를 넘긴 그는 “세계 팝시장에 도전하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다. 대마초 파동 이후 재기에 성공했던 것처럼 그가 다시
우뚝설 것인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스타의 허망함"을 잘 아는 그가 이번 콘서트를 앞두고 "80년대의 음악이 대중과 타협한 음악이었다면
90년대의 음악은 대중의 인기에 연연하지 않는 독자적인 음악세계를 추구하는 일"이라고 밝힌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의 말마따나 독자적인 음악세계
구축의 성패가 진정한 재기 여부를 판가름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