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일까?
정확히 40년 전에 발발했던 이 역사적 사건이 지금의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단순히 지나간 역사 속의 한 사건인가,
아니면 여전히 우리들 삶을 규정짓고 있는 현실인가? 필자가 보기에 해답은 후자인 것 같다.
‘한국전쟁 발발 40주년 기념 참가자 국제회의??에 초청을 받아 참가한 유일한 한국전쟁 비참가자요 전후세대로서 피자는 그 회의를
지켜보면서 그같은 물음과 대답을 거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 그 역사의 광풍이 남긴 민족적 아픔을 통렬히 느끼면서….
한국전쟁의 참모습은 아직도 많은 부분이 진실 저너머에 가려져 있음에 비추어볼 때 이러한 국제회의는 무엇보다도 참가자의 입을 통해
직접 전쟁의 진실을 밝힌다는 면에서 우선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만했다. 역사적 사건의 현장에서 그것을 몸소 체험한 경험자들의 증언이야말로 역사적
진실의 전달에 있어 문자로 기록된 자료 못지 않은, 어쩌면 그 기록들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살아 있는 자료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도 지난 몇년간 한국전쟁에 열정을 쏟아온 필자로서는 이와 같은 국제회의는 그 자체로서도 자뭇 흥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그간 전국을 돌며 취재와 증언채록에 열중해왔지만 소련과 동유럽의 참가자들은 좀처럼 만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 회의에서는 학문적으로 더 추적해야 할 몇가지 주목할 만한 내용이 공개되기도 하였다. 1950년 6월25일 새벽 1시에서
3시 사이에 김일성이 비상각료회의를 소집하여 “이승만군대가 북침하였다??면서 ??남침할 것??을 주장, 찬반투표를 거쳐 남침이 최종 결정되었다는
주장. 둘째, 1951년 6월25일 주유엔 소련대표 말리크가 휴전제의를 하기에 앞서 6월중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과 회담, 휴전할
것에 합의했다는 주장. 셋째, 미공군이 만주뿐만 아니라 블라디보스톡 부근의 소련영토까지 폭격했다는 주장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점들은 한국전쟁
연구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자료로서 앞으로 좀더 면밀한 추적과 분석을 요하는 것들이다.
폴란드의 참가자 “前공산주의 국가에서 왔다?? 한편 40년 전 지상과 공중의 전장에서,
그리고 개성과 제네바의 회담장에서 서로 적과 적으로 목숨을 걸고 싸웠던 남한과 북한, 미국과 소련의 주요 참전자들이 한 테이블에서 한국전쟁을
놓고 토론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도 상전이 벽해로 바뀌는 것과 같은 격세지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특히 휴전회담시 각기 남북한 대표로서 첨예하게
대립했던 백선엽과 이상조의 조우는 40년의 시간을 뛰어넘는 야릇한 아이러니를 몰고 왔다.
사회주의권 참가자들의 변화 또한 주목할 만했다. 지금까지 소련은 단 한번도 한국전쟁에 참전한 사실을 공식 시인한 바 없었으나
이번 회의에 참가한 소련측 참가자 스몰체코프는 소련의 참전을 시인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소련공군이 참전하면서 참전 사실을 어떻게 해서든지
숨길려고 노력했었음을 솔직하게 공개함으로써 참가자 모두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면서 많은 박수를 받았다.
북한측 참전자 反김일성 노선 인사 일색 유감 또한 폴란드의 참가자는 자기소개를 하면서
전공산주의국가 폴란드에서 왔다고 소개함으로써 많은 이들의 귀를 의심케 했다. 이것보다 더 큰 변화는 소련과 다른 사회주의국가들의 관계변화였다.
폴란드 참가자들이 한국전쟁 당시의 소련 스탈린의 외교정책에 대해 신랄한 비판과 비난을 퍼부어댔지만 소련의 참가자는 이에 어떠한 반박도, 반박할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페레스트로이카 이전까지 이러한 현상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혁명??이었다.
아쉬웠던 점은 북한측 참전자로서 참가한 사람들이 모두 반북·반김일성노선으로 전향한 인사들로 이루어진 점이었다. 그 결과 이들의
반김일성 감정이 필요 이상으로 과도하게 표출되어 회의를 어색하게 만들기까지 하였다.
두번째는 전체적인 논의가 지나치게 김일성과 스탈린의 개전책임을 규명하는 데 매달렸다는 점이다. 주최측이 선정한 8가지 주제에조차
포함되지 않은 스탈린이 침략자인가, 김일성이 침략자인가, 아니면 양자가 공범인가하는 문제를 놓고 지나치리만치 반복적으로 그리고 감정적으로 논의가
진행됐다. 따라서 많은 다른 주제에 대한 생산적인 논의를 어렵게 했을 뿐만 아니라 본의 아니게 과도한 정치적 논의가 되어버린 감도 없지 않다는
점이다. 세번째는 사소한 문제이지만 참여자의 숫자와 주제가 광범위한 데 비해 시간을 지나치게 제한해 보다 심층적인 토론이 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사실 인식에 있어서 오류가 있던 부분도 그냥 지나친 점이 적지 않았다.
필자가 마지막으로 느낀 점은 증언의 소중함과 아울러 전쟁을 경험한 세대는 바로 그 경험 때문에 공포의 기억에서 탈출하지 못함으로
인해 객관적 접근에는 어려움이 많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전쟁이 남긴 공포로부터 벗어나 한발 물러선 위치에서 객관적으로 전쟁을 재조명하고 그것을
민족통일로 이어가는 과제가 전후세대의 앞에 놓여 있다는 점을 재인식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