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바초프의 눈은 빛났다. 160cm 정도의 작은 키에 딱 벌어진 어깨, 땅땅한 체구가 강인한 인상을 준다. 생각보다 훨씬 젊어 보인다.
머리의 얼룩점은 텔레비전에서 본 것보다 작고 더 엷은 주황색이다.
지난 4월 모스크바에서 ‘세계언론인대회??와 함께 열린 ??평화를 위한 세계정신?? 회의에 참석했던 일행 40여명과 나는
고르비를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 크렘린궁의 가장 작은 탑문인 ??쯔아의 문??에 들어서 오른쪽으로 50m쯤 가니 노란색 3층 건물이 나타난다.
이곳이 소련연방최고회의이다. 붉은광장이 내려다보이는 이 건물 3층, 넓은 방이 바로 그의 접견실. 가로 20m, 세로 40m쯤 되는 장방형
접견실에는 놀랍게도 아무런 장식품이 없고 초상화 2개가 걸려 있을 뿐이다. 왼쪽에는 칼 마르크스, 오른쪽에는 레닌.
고르바초프는 집무실 문을 열고 천천히 접견실로 들어선다. 얼굴은 약간 창백한 편이고 주름살도 별로 없으나, 목엔 잔주름이 많다.
접견실에 들어선 그는 아무에게도 악수를 건네지 않은 채 큼직한 테이블 의자에 앉는다. “세계 각국에서 오신 귀빈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 싶지만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여기 앉아 마음의 악수를 보냅니다.?? 약간은 금속성 섞인,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천천히, 그러나 또박또박 말한다. 전직
세계정상 등 참석자들이 그에게 질문을 퍼붓기 시작한다. 국내외 문제에서부터 고르비의 신변 얘기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질문과 응답이 1시간 동안
계속된다. 그는 시종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질문에 거침없이, 자신있는 태도로 답한다. 소문대로 심각한 토론중에도 유머와 조크로 좌중을
끌어들인다. 한 ??정상??이 물었다. ??술을 파는 국영상점 앞에 늘어선 줄이 너무 길던데, 해결방안이 없습니까??? ??줄에서 빠져나오면
어떻게 됩니까???
폭소가 터져나왔지만 고르비는 못들은 체 계속한다. “우리나라에선 모든 게 길고 큽니다. 도로도 강도 길고 크고, 햄버거를 사기
위해 한시간씩 기다리는 줄도 길고…. 또 땅도 건물도, 호수도 나무도, 사람도 컴퓨터도 큽니다….??
고르비는 취미가 별로 없다고 말한다. 접견이 이루어진 1시간 동안 담배를 1대도 피우지 않는다. 술은 거의 마시지 않고, 보드카
같은 독주는 될수록 피한다고 한다. “너무 바쁘고 골칫거리가 많아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는 주위의 칭찬을 즐길 겨를도 없이 산다??고 익살을
떤다. 운동할 시간이 없어, 이따금 숲속 산책과 핀란드식 사우나로 피로를 푼다고 한다.
언뜻 훓어본 그의 집무실은 30평 정도의 정사방형. 이 방에도 장식품은 거의 없다.
가로 2m, 세로 3m크기의 집무책상 위엔 어른 몸집 크기의 구리빛 대리석 흉상 하나가 있을 뿐이다. 책상 왼쪽에 붉은
소련국기가 서있고, 그 옆에 작은 책장 하나. 그 책장 위엔 소련공산당을 상징하는 구리빛 낫과 망치 조각이 놓여 있다.
벽은 엷은 주황색. 높은 창문마다 은색 주름커튼이 무겁게 드리워져 있다. 방 한가운데, 3~4인용 소파 2개가 있을 뿐 다른
의자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집무실에서 한꺼번에 만나는 사람수는 극히 제한돼 있는 듯하다. 세계 초강대국 소련의 대통령 집무실은 너무도 작고
침침하고 꾸밈이 없어 평범함과 소박함을 넘어, 러시아정교 수도사의 공부방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크렘린궁을 걸어나오면서, 대통령 집무실을 지키는 경호원들 모습에 야릇한 친밀감을 느낀다. 옷을 빳빳이 다려 입은 사람은 한명도
없고, 검은 구두는 낡아 겉이 허옇게 까져 있는가 하면, 구두 뒤축은 하나같이 옆으로 닳아 있었다. 잘 웃지도 않았지만 성난 얼굴도 아니다.
칼날같이 바지를 줄세우고, 파리가 앉으면 미끄러질 듯 빤질빤질한 구두가 특징인 어느나라 경호원들이 생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