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2000년을 향해 90년대의 문턱을 넘어선 지금, 우리는 민족사의 전개에 있어 오욕의 분단시대로부터 영광의
통일시대로 넘어갈 수 있는 중차대한 전환기적 시점에 놓여 있다. 급격한 내외정세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냉전적 분단의 장벽을 헐고 조국통일을
앞당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조성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시급한 과제는 현실상황에 대한 정확한 통찰과 통일에의 의지를
바탕으로 민족 공존공영의 길을 여는 데 있다.
민족통일과 관련된 한반도상황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변수로는 무엇보다도 세계를 양분한 냉전적 질서의 붕괴라는 국제정세의
질적 변화를 들 수 있다. 주지하듯이 지난 12월초 미 · 소 두 초강대국은 지중해의 격랑이 밀려오는 몰타섬 앞바다의 소련 막심 고리키선상에서
개최된 양국 정상회담을 통해 이데올로기 대립의 냉전시대가 종식되고 평화와 협력의 새시대가 도래했음을 선언했다. 새로운 시대정신에 입각하여 양국
정상은 인류를 절멸의 벼랑으로까지 밀어붙인 핵전쟁의 공포를 제거하기 위해 과감한 군축을 단행할것에 의견일치를 보았는가하면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국가나 민족의 내부 분쟁에 불간섭할 것을 약속했다.
체제연합의 단계에 진입한 동서독 미 · 소는 한걸음 더 나아가 냉전적인 동 · 서
이데올로기장벽이 제거된 세계의 場 위에 민족자결과 자유의 원칙을 토대로 새로운 세계협력체제를 함께 구축할 것에 합의했다.
이데올로기 대립과 군사적 대결로 점철돼온 동 · 서 냉전적 구질서가 붕괴되고 하나의 통일세계를 향해 새로운 평화협력질서가
잉태되고 있는 지금, 우리와 더불어 분단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있는 독일민족은 분단의 극복을 앞당기기 위해 세계적 대세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하고
있다. 서독연방정부의 콜 총리가 3단계 연방통일방안을 발표하면서 동 · 서독 경제통합을 우선적으로 추진하고 있는가 하면, 동독 모드로프 총리는
동 · 서독 국가연합형의 ‘조약공동체’를 제안하고 있다. 소련 고르바초프 공산당서기장의 페레스트로이카운동에 의해 불붙기 시작한 동구권의
체제대변혁에 부응하여 현재 동 · 서 양독관계는 놀라운 속도로 체제공존을 넘어 이미 체제연합의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 세계냉전의 초점이던
베를린장벽의 개방에서 웅변적으로 보여주듯이 독일은 이제 두개의 독일이 아니라 동 · 서유럽 대통합의 진행 속에서 ‘하나의 새 독일공동체’를
이룩해가고 있는 것이다.
한반도정세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두번째 변수로서는 소련 고르바초프개혁체제등장 이후의 중 · 소관계 변화를 들 수 있다.
고르바초프는 지난해 5월 북경을 방문, 鄧小平과 더불어 만30년만에 처음으로 중 · 소정상회담을 개최하여 60년대 이래 지속된 긴장관계를
해소하고 양국관계를 정상화했다. 특히 고르바초프가 북경의 인민대회당에서 행한 “중 · 소 국경지대의 군비를 무한히 零으로까지 줄여나가겠다”는
요지의 일방적 군축선언은 향후 동북아시아의 군사적 긴장완화에 큰 영향을 줄 것이다.
중 · 소 양국간의 전 국경선에 걸쳐 비무장지대가 설치된다면 이는 세계전략개념상 중대한 변화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특히
국제정치적으로 민감한 동북아지역의 전략적 요충인 한반도에서 남북한간의 냉전적 군사대결구조를 해소하기 위한 획기적인 전환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방향에서 현재 중 · 소 양국은 다같이 한반도의 비핵평화지대안을 강력히 주창하고 있다.
중 · 소 긴장완화와 함께 한반도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칠 또하나의 변수로 미 · 소의 냉전종식 선언에 따라 예상되는 미국의
아시아 · 태평양지역 전략변경을 들 수 있다. 미국은 90년대에 개막될 탈냉전적인 미 · 소 새협력시대에 맞춰 국방예산을 대폭 삭감,
유럽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동아시아지역에서도 군사적 개입을 상당한 규모로 축소조정할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군사력 팽창은 새로운 긴장초래 동아시아에서의 미국의 군사개입 축소는 동아시아 3대
핵보유국인 미 · 중 · 소 세 강대국의 평화공존관계를 전제로 할 때 가능해진다. 그런데 미 · 중 · 소 3국은 전략적 측면에서 현재 사실상
3각 평화공존관계를 지향해가고 있다. 이미 70년대말에 체결한 미 · 중 평화조약에서 양국은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시아지역에서 어느 강대국도
패권주의를 행사하는 것을 반대한다는 기본입장을 명시했고, 소련도 지난해 5월의 중 · 소정상회담에서 중국의 독립자주외교노선을 지지하고 반패권주의
입장을 명확히 밝혔다.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시아지역의 평화유지라는 전략적 목표를 둘러싸고 미 · 중 · 소는 이처럼 완전 이해일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90년대에는 동북아시아 새평화질서의 구축을 위해 미 · 중 · 소가 한반도의 군사적 완충지대화 혹은
비핵 평화지대화에 대해 합의할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 남북한의 주도적 역할이 필요하다는 것은 의심이 여지가 없다. 민족적 차원에서
볼 때 한반도의 군사적 완충지대화는 남북한 평화공존의 전제조건이며 궁극적으로 조국통일에의 길을 터놓을 것이다.
그런데 한반도의 군사적 완충지대화를 전제로 하는 동북아시아 새평화질서 구축에 있어서 한가지 저해요소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경제대국 일본의 군사대국화 문제이다. 논리적으로 볼 때 미국의 군사적 개입축소에 따라 야기될 동아시아지역에서의 안보공백지대를 일본이
메꿔야 하는 것은 국제 전략적 균형의 관점에서 당연한 결론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미국은 일본의 ‘안보무임승차론’을 제기하면서 일본의 방위력 증강 및 동아시아에서의 일본의 안보역할 부담증가를 요구하고
있다. 일본도 미국과 지역분담을 한다는 의미에서 이미 80년대초 이래 방위력 증강을 공언해오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향후 일본의 군사력은 세계 일반정세의 강한 군축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크게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만일
경제대국 일본의 군사력 증강이 도를 지나치게 되면 이는 현존의 국제전략균형을 깨뜨리게 됨으로써 동아시아에 새로운 긴장을 조성하는 불안요소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방위력 증강과 관련해서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일본의 대소전략 연장선상에서 한 · 미 군사안보관계를 한 · 일
군사협력관계로 대체하여 상정하는 발상이다. 이런 발상은 한반도의 남북관계를 대소전략의 일환으로만 간주하여 주한미군의 철수후 생기는 한반도의
안보공백을 일본이 메꿔야 한다는 논리에서 출발하고 있다. 현재 미국의 보수성향의 캐토 연구소 연구원인 둑 반도가 최근 발행된 <포린
폴리시>지에서 이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주목할 만한 북한의 개방화 추세 주한미국 철수와 함께 한 · 일 군사협력관계를 내세우는
논리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로 보거나 또는 우리의 기억 속에 아직도 생생한 韓末 외교사의 뼈아픈 경험에서 볼 때 우리민족의 이익을 근원적으로
훼손하는 주장이다. 한 · 일 군사협력관계란 동아시아전략적 차원에서 본질적으로 대한민국이 동북아에 있어서 일본의 대소봉쇄를 분담하는 지역국가로
변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한 · 일군사협력관계의 시작은 동북아시아 신냉전체제의 개시 및 한반도에서의 시작은 동북아시아 신냉전체제의
개시 및 한반도에서의 새로운 긴장조성을 뜻한다. 그런 상황하에서는 민족적 차원에서의 조국통일은 몽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미국의 주한미군
철수는 미국을 대체하는 일본의 군사안보 역할을 통해서가 아니라 남북한 평화공존관계의 확립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민족통일을 촉진하기 위해, 우리는 민족내부정세에 대해서도 면밀히 살펴보아야 한다. 현재 민족내부정세를 주목해 보면 여기에서도
남북관계 개선과 궁극적으로 통일을 위한 긍정적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첫째, 북한 사회주의체제의 개방화 추세를 들 수 있다.
북한은 1984년에 합영법을 제정하여 서방으로부터 자본 및 기술도입을 추진했는가 하면 최근에는 두만강하류 국경지대인 하산지구에
서방국가와의 경제합작 및 교류를 위한 경제특구의 설립을 결정하는 등 경제개방화를 위해 과감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 물론 이와 같은 북한의
개방조치가 한정적이긴 하지만 그러나 북한체제의 기조를 개방화 방향으로 전환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한 이는 장차 남북간의
경제협력체제를 형성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둘째, 북한체제 내부에서 사회주의적 근대화가 이루어짐에 따라 세대교체와 함께 점차 이데올로기 지향적인 소위 항일 빨치산 세대가
사라지고 실용주의적이고 전문지식을 갖춘 테크노크라트계층이 등장, 하나의 사회적 중추세력을 형성해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 합리적인 신진
테크노크라트층은 이미 국가정부의 상층부에까지 진출하고 있으며 북한의 정책결정과정에서 실무적인 핵심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들은 장차 북한사회에
脫이데올로기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남북한 협력체제 창설에 있어 크게 기여할 것으로 생각된다.
셋째, 북한의 대남정책에 있어서 서서히 변화의 징후를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북한은 남북한간의 무제한적인
군비경쟁과 과도한 군사비 지출로 인해 북한경제가 난관에 봉착하고, 남북한간의 경제력 격차가 크게 확대되자 한반도군축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는 것
같다. 88년 10월 16일 盧泰愚대통령이 남한의 역대 태통령중 처음으로 남북대화에서 한반도군축문제를 다룰 용의가 있음을 표명하자 북한은 즉각
이에 대응, 11월7일 중앙인민위원회,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정무원의 연합회의에서 공동명의로 한반도의 평화보장 4원칙 등 상당히 구체적인
군축안을 제안했다.
냉전논리의 획기적 전환 필요 그 주요내용은 첫째 미군과 핵무기의 단계적 철수, 둘째 병력과
장비의 동시감축, 셋째 중립국감시위원회의 군축사찰권 등 확대, 넷째 외군군과 외국으로부터의 장비도입 중지 등이다. 이 군축안은 비록 군사적
신뢰구축, 군축방법 및 사찰제도 등에 있어서 미흡하고 불확실한 결점을 갖고 있으나 북한의 군축의사를 알게 하고 남북관계 개선의 신호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신중히 검토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조국이 분단된 지 45년이 지난 오늘날, 한반도에 깊은 이해관계를 가진 주변 강대국들은 이제 그들 상호간의 미묘한 역학관계
변화로 말미암아 어느 한나라도 한반도에 대해 주도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바로 한반도통일을 민족자결에 의해 자주적으로 이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도래하였음을 의미한다. 물론 한반도의 땅 위에 세워진 두개의 상이한 이념을 가진 국가체제가 각기 독자적인 생존의 뿌리를 내렸기
때문에 통일은 오늘 내일에 이루어질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상이한 이념과 제도를 가진 두 개의 국가체제가 통일로 나아가려면 체제공존, 체제연합
그리고 체제통합이라는 지루하고 긴 과정을 끈기있게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조국통일에의 긴 도정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남북한의 두 국가체제간에 평화공존을 이룩해야 한다. 70년대초 이래 우리는
남북관계 개선과 민족통일을 위해 수많은 화려한 방안을 제의하면서 남북대화를 개최해왔으나 아직도 가시적 성과를 거의 달성하지 못한 채
남북평화공존의 단계에도 이르지 못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남북한 당국이 냉전적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민족공동의 이익을 망각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북한이 평화공존관계를 이룩하려면 무엇보다도 냉전논리에서 민족공동이익 논리에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민족통일의 중간과정으로서 남북한 평화공존관계를 이룩하는 길은 민족공동이익 논리에 입각, 한반도의 군사적 완충지대화를 지향하는
남북한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데에 있다. 지정학적 관점으로 보아 한반도는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동북아시아의 심장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전시에는 군사적 완충지역, 평시에는 대륙과 해양국간의 경제 · 문화적 교량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天惠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한반도의 군사적 완충지대화를 통해 우리는 비록 분단의 조건하에 있더라도 정치 · 외교적인 자유재량의 폭을 넓혀갈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민족의 숙원인 자주적 통일을 실현할 수 있다.
강력한 통일민족국가를 이룩할 경우 우리 한민족은 동북아시아에서의 주도권 행사를 둘러싸고 일어날 수 있는 강대국간의
세력경쟁에 의한 국제분쟁을 방지하는 일에 조정자 역할을 담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통일은 남북한 경제의 기적적 제2도약 약속 이런 측면에서 볼 때 한반도의 군사적 완충화는
민족통일 뿐만 아니라, 동북아 신평화질서 형성의 전제조건이라 하겠다. 여기에서 한반도의 군사적 완충화는 한국인의 민족이익과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공통분모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오늘의 남북분단현실 상황 속에서 한반도의 군사적 완충화는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가. 이는 현재의 한반도 주변정세를 감안할
경우 오로지 남북간의 과도한 군비경쟁을 지양하고 군사대치상태를 근원적으로 해소하는 군축을 통해서 가능할 것이다. 한반도군축이 성공적으로 실현되면
우리는 대한민국과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두개의 부분국가를 기둥으로 하여 ‘한민족 공동의 집’을 세워 본격적으로 조국통일에의 길로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민족 공동의 집’을 세우기 위해서는 한반도군축과 병행하여 남북한 경제협력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무관세교역, 자본 ·
기술 및 노동력의 이동을 기초로 하여 전개될 남북한 경제협력은 분단 이래 지속돼온 이질체제간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체제통합을 촉진 할 수 있는
관건이 될 것이다. 소련이 시베리아 개발 및 태평양 진출을 본격화하고 또한 중국이 동북 3省의 만주지역을 개발하기 위해 大運港을
국제자유무역항으로 개발하고자 하는 오늘의 동북아 경제정세를 감안해 볼 경우 남북한 경제협력체제의 형성은 한걸음 더 나아가 한반도로 하여금
동북아경제권의 중심교량역할을 담당하게 할 것이다. 이는 남북한 경제의 기적적인 제2도약을 가져와 우리 민족의 오랜 꿈인 민족통일과 조국번영을
실현케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