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빛은 불안과 절망 상황에서 더욱 빛나는 법입니다. 80년대를 보내면서 지난 10년간을 회고해보면, 좌절, 공포, 불안,
분노, 실망, 초조 등의 먹구름으로 뒤덮인 10년이었습니다. 80년대 문턱에서 ‘봄의 정치’는 광주에서 무참하게 학살되더니, 민주화의 꿈을 안고
싸워온 사람들이 줄줄이 묶여가고, 쫓겨났습니다. 공포와 불안의 5공시대가 80년대 초장에 펼쳐졌습니다. 정치는 작전과 공작으로 밀려나고
말았으며, 통치의 이름으로 온갖 비리가 확대되었지만, 대체로 그것은 교묘하게 은폐되었습니다. 국민들은 숨죽이며 살아왔습니다.
원래 인간의 기본권을 무시한 정책은 그 속에 자멸의 씨앗을 반드시 키우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무섭던 겨울공화국 속에서도
개헌운동은 요원의 불길같이 전국으로 번지게 되었고, 마침내 87년 6월에는 젊은이들과 중산층이 힘을 합쳐 6 · 29 항복선언을 쟁취했습니다.
국민들은 잠시나마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헌데 이같은 희망은 그 해 12월 대통령선거를 치르는 과정에서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이
희망을 구체화해야 할 정치 주체는 말할 것 없이 그간 혹독하게 탄압받았던 민주세력이었는데, 대권욕의 포로가 된 지도자들의 분열로 민주세력은
갈라지게 되었고,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도 결과적으로 처참하게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국민들의 실망과 분노는 치솟아올랐습니다. 배신감마저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국민은 새로운 지도층을 갈망한다 이같은 상황에서 5공청산은 이미 물건너 갔던 것입니다.
청산되어야 할 5공의 주체로 하여금 6공의 주역이 되도록 민주세력이 도와준 꼴이 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6공은 처음부터 5공비리 청산을
미적미적 미루었습니다. 2년간을 그렇게 허송했습니다. 국민들은 그만큼 불안해지고 초조해지면서, 말로만 5공청산을 떠들어 대는 정치인들의 소음에
식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식상함은 5공비리 문제를 집어치우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은 시원스럽게 그리고 철저하게 청산하지 못하는 여야정치인들의
무능력에 대해 식상했고 분노한 것입니다. 결코 5공의 악유산을 은폐하거나 적당히 얼버무리라는 것은 아닙니다. 여하튼 12 · 15 대타협에서
국민들은 청산되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청산 작업의 주역이 될 때 생기는 불가피한 한계를 극명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또다시
찜찜한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은 빨리 흘러 90년대의 첫달이 어김없이 동터오고 있습니다. 최근(12월 중순)에 실시된 어떤 전국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국민들은 90년대를 이끌어갈 정치지도자들이 아직도 역사의 지평에 나타나지 않고 있음을 안타까워 하는 듯합니다. 90년대 대통령으로 적합한
인물 한사람을 지적해달라는 질문에 대해 1천5백명의 응답자중 42%가 그러한 인물이 없다거나 모르겠다거나, 여야 · 朝野를 막론하고 기존의 인물
이외에 제3의 참신한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물론 기존의 정치지도자 둥에서는 3김씨가 단연 우세합니다만, 세분이 받은 지지를 다
합쳐도 38%에 불과하며 최고득점자가 15%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세분 이외 다른 기성정치인들에 대한 기대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세분 다음으로 많은 지지를 받은 분은 3%의 지지만을 받았습니다. 기자들과 교수들을 대상으로 했던 그전의 조사들에서 부각되었던
인물들이,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이번 조사에서는 아주 형편없는 지지밖에 얻지 못했습니다. 한마디로 여나 야, 朝나 野를 막론하고 기존의
인물로서는 안되겠다는 것이 국민의 합의 같습니다. 90년대 역사지평에 새로운 지도층이 떠오르기를 국민들은 갈망하고 있습니다. 기존정당인도, 장군
출신도, 기업인 출신도 아닌 새로운 층에서 새 지도자들이 나오기를 갈망하는 듯합니다.
이것을 뒤집어 말한다면, 90년대를 맞는 이 시점에 국민들은 정치불신, 정치적 냉소주의라는 중병을 앓고 있다 하겠습니다. 누가
이 중병에서 국민을 구해내야 합니까? 그것은 말할 것 없이 정치결정의 기관차에 타고 있는 집권층의 최고지도자와 그리고 세 김씨들이 이시대적
과업을 떠맡아야 합니다. 극심한 범죄문제, 위험한 온갖 공해의 피해, 심각한 이념갈등, 계급갈등, 세대갈등, 지역갈등 그리고 탈냉전으로 나아가는
세계역사 흐름을 거역하려는 이 땅의 냉전세력의 단말마적 저항의 몸부림 등을 그들이 해결해나가지 못할 때 90년대는 80년대보다 더 큰 고통을
국민들에게 안겨다줄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들 중에서도 노대통령의 역사적 책임은 막중하다 하겠습니다.
설계는 대담하게, 실천은 착실하게 그런데 시간이 없습니다. 이제는 누가 궂은 일들을
해결해주기를 뒷전에서 바라며 기다릴 만큼 한가하지 않습니다. 양소매를 걷어부치고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미흡한 전시대 비리청산을 위시한 민주개혁을
보다 철저히 추진해나가면서 大局정치의 구체적 효과를 국민에게 흐뭇하게 안겨다주어야 합니다. 새해부터는 남은 임기를 정당의 총재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국민의 대통령이라는 시각에서 과거청산은 시원스럽게, 미래설계는 대담하게, 현재 실천은 착실하게 해내야 합니다. 여야, 조야를 가릴 것
없이 두루 인재를 기용하여 안으로 민주개혁을 보다 구체화하고 밖으로는 북방정책을 보다 과감하게 추진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북관계 개혁에 파격적인 성과를 이룩해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도 지난날의 냉전이데올로기와 냉전식 제도장치들을
발전적으로 해체시키면서 세계평화 흐름에 선도적 역할을 해내야 합니다.
그리하여 민족과 국민에게 희망을 주고, 세계와 역사에 흐뭇한 흔적을 새겨놓아야 합니다. 온 몸이 진흙탕을 뒤집어쓰는 한이
있더라도 소매를 걷어부치고 앞장서서 大局의 정치, 희망의 정치를 펼쳐 보이면서 90년대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