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1시에 ‘생활’을 여는 남대문시장 사람들의 하루
새벽 1시면 남대문시장 사람들은 어김없이 잠에서 깨어난다. 禹鍾浩(33)씨의 하루도 이 시간부터 시작된다. 대개의 사람들과는 낮과 밤이 뒤바뀌어진 삶이다. 禹씨는 새벽 1시20분쯤에는 이미 평창동 집을 떠나와 하왕십리 직영공장에 가 있다. 여기서 전날 주문한 제품을 한차 가득 싣고 가게에 도착하면 1시40분경. 새 매물을 <에스떼상가>에 있는 1평짜리 가게 벽에 붙이고 좌판에 보기좋게 진열하는 등 한바탕 법석을 떨고 나면 개장시간인 2시를 후딱 넘긴다.
이때부터 새로운 하루의 한판 전쟁이 시작된다. 새벽의류장을 찾아온 지방 중소상인들과 양품점 상인들을 상대로 영업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전 한때 일반소비자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알짜 장사는 이 새벽에 지방상인들과 이루어진다. 단돈 1백원이라도 물건을 싸게 받으려는 이들과 승강이를 벌이다보면 어느새 희뿌연 아침을 맞는다. 7시가 가까워진 것이다. 신출내기 고객도 있지만 대부분이 2~3년 동안 관계해온 단골손님들인지라 李씨는 야박하게 이익을 많이 남기진 못한다. 대량의 도매라는 특성 탓이기도 하지만 그들과의 끈끈한 정에다가 기본적으로 공존공생하는 관계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험한 남대문 바닥의 신입생을 이만큼 키워준 것도 이들인 것이다. 썰물처럼 빠져나간 이들 도매고객들을 배웅하고도 李씨는 쉴 틈이 없다. 새벽 시장기를 해결하고는 가게를 부인 朴貞姬씨에게 맡긴 후 다시 동대문, 광장시장 등의 원단상가로 출정을 떠나야 한다. 오전 11시전에는 이 원단과 디자인이 공장에 전해져야 다음날 새벽에 팔 물건을 생산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매일 17시간을 시장에서 보내
15시간의 빠듯한 납품기한을 대기 위해 이들의 24시는 초를
읽어야 할 지경이다. 공장에 내일 받을 옷을 주문하고 나서도 또다른 구상을 하러 뛰어다녀야 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치열한 아이디어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다. 솜뭉치가 된 몸을 이끌고 귀가하는 시간은 대략 5~6시경. 잠자리에 들어가는 것은 7~8시경이다. 평일의 그는 친구의
반가운 전화도 텔레비전도 모두 사절이다. 미래의 삶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유보해둬야 한다. 하루 17시간 이상을 시장에서 보내는 ‘억척인생’
禹씨지만 동고동락하는 부인 朴씨가 간혹은 안됐다는 생각에 울적해지기도 한다. 자신도 버티기 어려운 고된 삶을 푸념 하나 없이 살아내고 있음에
고마움을 느끼지만 내색하기는 어쩐지 쑥스럽다. 禹씨부부의 하루살이는 노동강도로 보면 재생산이 어려울 정도로 힘든 삶이다. 그러나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남대문시장 사람들 대부분이 이런 삶을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로 붐비고 시끌버끌한 것이 시장의 생리. 이곳 남대문시장도 예외는 아니다. 다른 점이라면 새벽 1시부터 대낮을 방불케하는 치열한 상전이 벌어지는 것이라고나 할까. <패tus시티> <커먼플라자> <대도숙녀복상가> <페인트타운> <짱띠캐주얼> 등 화려한 이름을 내건 의류전문상가들은 새벽 2시면 밀려오는 손님을 맞기 위해 눈코뜰 새 없이 바쁘다. 장사시샘은 남편바람기에 대한 질투보다도 무섭다고 하는 말이 있듯 상가간의 경쟁도 그만큼 격렬하다.
‘움직이는 마네킹’이라는 어여쁜 점원들의 호객하는 몸짓도 볼꺼리다. 현란한 네온사인, 굉음에 가까운 노래소리, 상가 구석구석에 산더미처럼 쌓인 형형색색의 옷, 큰 도매상과 작은 도매상이 흥정을 대는 소리로 왁자지껄한 이 시간이 한밤중임을 깨닫는 사람은 이곳에 아무도 없다. 이곳은 새벽장을 여는 사람들과 지방 의류상이라는 두 억척인생들이 맞부딪치는 싸움터다. 새벽장을 찾는 사람들은 인천 · 대구 · 광주 · 진주 · 부산 등 전국 각지에서 기차나 관광버스를 대절해 상경한 지방의류도매상들이다. 지역별로 차이는 있지만 한사람당 1~2만원꼴로 빌린 관광버스의 앞유리는 무슨무슨 지역의류도매상연합회란 딱지가 붙어 있다. 이들은 대부분 직접 가게를 경영하고 있는 사람들로 그 지역 특성에 맞추어 팔릴 만한 옷을 찾아 사냥에 나선다. 눈매가 사뭇 날카롭다. 신출내기를 빼고는 대부분 단골가게가 있다. 여기서 잠깐이나마 그동안의 회포를 풀고 최신 유행을 귀띔받기도 하며 무슨무슨 디자인의 옷을 달라고 주문하기도 한다.
‘진창길 시장’에서 국제적 명소로 발전
대구 광복시장에서 물건을 떼러 올라온
洪仁子(35)씨는 억센 경상도 사투리로 “일주일에 한번꼴로 남대문 시장에 오는데예, 오늘은 쓸만한 물건을 많이 확보해서 다행 아닙니꺼.
여자옷이라는 게 워낙 변덕스러버서 어려움이 많아예”라며 푸근한 웃음을 지어낸다. 새벽 5~6시경엔 먼길을 달려온 이들 지방 중소상인들이 자신의
보금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부산해진다. 퇴계로 큰길을 가득 메운 관광버스와 승용차에 쌀가마니만한 옷보따리 수십개씩을 실어올리는 상인들이 일대
장사진을 이룬다. 여기서 우리는 잊어버렸던 과거를 만난다. 지게꾼들은 1~2천원의 삯을 받고 기꺼이 무거운 짐을 지게에 올려놓는다.
나그네들이 주린 배를 채우는 음식장사들도 손길이 바빠진다. 컵라면, 김밥, 국밥, 칼국수 등을 서둘러 먹어치우고 바삐 떠나야 하는 나그네들에겐 오히려 고마운 이웃들이다. 상인들의 시린 손발을 녹이는 반쯤 핀 연탄을 파는 상인도 저자거리를 누빈다. 가격은 6백원, 불티나게 팔려나간다. 필요에 따라 서는 곳이 시장이지만 사람들은 이렇게 서로 얼키고설켜 도움을 주고 받으며 어울려 살기 마련이라는 평범한 진리가 새삼 확인된다.
姜錫周(61) 할아버지. 남대문시장 사람들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다. 姜씨가 지목되는 이유는 그가 ‘서울 남대문시장 주식회사의 부사장이라는 무게탓도 있지만 단하나 남아 있는 대물림 상인이라는 점에서 가히 독보적이다. 姜씨는 작고한 부친 姜信一씨가 물려준 건어물가게인 동흥상회를 두배로 키울 만큼 경영을 잘해왔다. “젊었을 때는 한때 너무 어렵고 고생스러워서 달아나기도 했어. 하지만 지금은 선친의 가업을 이은 것이 자랑스러워. 큰 것은 아니지만 내게는 소중하지.” 잠시 숙연해진 姜씨는 터줏대감으로 통할 정도로 남대문시장의 역사를 줄줄이 꿴다. “6 · 25의 상혼이 남아 있던 50년대 후반의 남대문시장은 점포라고 해봐야 건어물상회들이 몇군데 있었고 과일상이나 베옷 등을 파는 포목 노점상이 고작이었지. 비만 오면 장화 없이는 못다닐 지경이었고 장바닥에 가마니를 깔아야 간신히 장이 섰거든. 그런데 지금은 어때. 현대식 옷가게가 즐비하게 들어섰고 올림픽을 치르면서 국제적 명소가 됐지. 격세지감도 이만저만이 아니야.”
시장 1세대들은 대부분 자신이 못 배운 것을 대물림할 수 없다는 생각에 사무쳐 있다. 대도숙녀복상가의 어떤 아주머니 아들이 대학을 들어갔다느니 노점상인 누구 딸이 고시에 붙었다는 얘기는 신바람나는 화제가 된다.
거센 현대화 물결 앞에 ‘살아남기’ 안간힘
격동의 80년대를 경험하면서 남대문시장도 변혁의
거센 바람을 맞고 있다. 1만2천8백평 부지에 점포수 9천2백65개, 상인수 8천6백45명, 하루 이용자수 50만명, 1일 거래량
3백억원(추정)의 국내 최대상권이 남대문시장의 현주소이지만 거대자본의 백화점이나 대형수퍼마킷 등 신흥세력의 ‘세련된’ 도전에 뒤로 밀리는 현상이
역력해졌다.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 이곳에서는 한창이다. 시설현대화와 함께 캐털로그 제작 등 지방 판촉활동에 무척 열심이다.
앉아서 장사하던 시대는 지났으며 패션감각을 익히러 해외로 나가야 한다는 인식은 이미 낯설지 않다. 많은 상인들이 일본은 물론이고 프랑스, 이태리 등 국제패션중심지로 견학여행을 떠난다고 에스떼상가 金石峰회장은 말한다. 또 아예 생산지를 임금이 싼 태국 등 동남아와 파라과이 등 남미로 옮겨 수출판로를 개척하는 거대상인들도 나타나고 있다는 남대문시장(주) 崔炳滿 기획과장의 말이고 보면 이곳 남대문시장에도 변신의 회오리가 거세게 불어닥치고 있음을 실감케 된다. 남대문시장측은 앞으로 옥상주차장(80억원)과 상설상품전시장(4억원)을 신설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고 밝힌다. 이 거센 현대화 과정에서 주목할 현상이 또 있다. 시장 1세대가 2세대로 ‘물갈이’되어가는 세대교체 현상이다. 남대문시장은 젊은 고학력 인력으로 넘치고 있다. 대물림이 끊어진 탓도 있지만 이 보다는 남대문 의류시장이 ‘알짜’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30~40대가 상권을 잡는 주류가 되고 있으며 과거 거친 ‘장돌뱅이’에서 세련된 유통인으로 빠르게 변신을 꾀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패션시티> <페인트타운> 등 현대화된 의류상가 구석구석을 이들 30대의 신세대들이 누비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리를 칠하고 싶다. 당신을 칠하고 싶다’는 다분히 감각적인 패션구호도 이들이 만들어냈다. 캐주얼상가의 경우는 저연령화 추세가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20대 후반 여성들의 진출도 두드러진다. 대도숙녀복상가의 金暎子회장은 “이들 신세대 상인들은 적어도 전문대학에서 디자인 등 관련 분야를 전공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빠른 두뇌회전과 젊다는 기동력을 재산으로 제품의 질을 높이기 위한 계획을 치밀하게 세우고 있으며 패션정보에 민감, 히트상품을 많이 내고 있다”고 밝힌다. 이들은 남보다 더 열심히 뛰고 특별한 재질이 있어 성공한 사람들로 평가된다. <패션시티>의 한 상인은 이곳에서 이른바 반짝하는 아이디어 상품을 내면 “돈방석에 앉는 것을 시간문제”라고 귀띔한다. 억대재산을 만들어 으리으리한 집에 사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다는 얘기다. 허름한 외양과는 달리 알토란처럼 살이 찐 ‘속부자’가 많다는 항간의 인식이 어느 정도는 사실인 듯하다. 물론 이들의 축재과정에는 자료를 발생시키지 않는 음성적 거래로 탈세를 해 거대한 지하경제의 온상이 되고 있다는 부정적 이미지도 없지 않지만 그 사실여부를 여기선 일단 접어두기로 하자.
손짓발짓 요란한 ‘다다구리’ 상인들
남대문 시장의 오후 2시는 나른해지는 시간이다. 부지런한
주부들이나 점심시간을 이용해 알뜰구매를 하는 직장여성들도 빠져나가 남대문시장 상권의 64%를 점하는 도매의류상가가 거의 문을 닫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한가한 오수에 빠져드는 이때쯤이면 일부 문을 연 상가에서 울긋불긋하고 기괴한 차림새의 판촉사원(샌드위치맨)들이 나와 소매고객을
끌어들이기 위한 막바지 안간힘을 펼친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남대문시장은 서울의 보통시장으로 빠르게 탈바꿈한다. 새벽의류장의 기세에 눌렸던
그릇상가, 건어물, 인삼 등 식품상가들이 활기를 띠는 것이다. 꽃시장도 마지막 ‘떨이 꽃’을 팔기위해 부산하다. 또 외국방문객의 눈길을 끄는
전통민속품 코너가 붐비는 시간도 이때쯤이다. 한국에서의 추억을 간직시키기 위해 이곳의 상인들은 어설프나마 외국어도 곧잘 한다. 흰 두루미가
그려진 백자, 녹이 쓴 듯한 갈색의 분청자기, 오색칠을 한 원앙새 등이 인기품목이라고 한 상인은 말한다.
이른바 ‘도깨비시장’이라는 E상가를 필두로 숭례문상가 등 수입상가도 성업을 이룬다. 도깨비시장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이곳은 가구와 건축자재만 빼고 없는 것이 없는데 세관공무원이 들이닥치면 5초안에 이 많은 물건이 감쪽같이 자취를 감춘데서 연유했다는 것이 정설로 통한다. 5시가 가까워지면 어디서 나왔는지 노점상들도 여기에 가세, 퇴근 후의 고객들을 반갑게 맞는다.
비좁은 길바닥에서 2박자로 박수를 치고 발을 구르며 “골라요 골라. 메이커 메이커. 마지막 떨이 무지 싼거. 아줌마 지금 안 사면 이불속에서 후회해”를 쉴새없이 외쳐대는 남대문시장의 명물 ‘다다구리’ 상인들도 여기서 만난다. 20대의 앳된 처녀들을 농짙은 재담으로 유혹하는 다다구리 총각(?)상인과 볼을 빨갛게 붉히며 서둘러 사고야 마는 아가씨들의 진풍경도 이때 나와봐야 볼 수 있다. 수없이 밀려드는 인파속에서도 금새 찾아낼 수 있는 ‘강아지할아버지’ 金炳禧(69)씨는 이미 상당한 저명인사다. 6 · 25 상이용사인 그가 입은 옷에 달린 수십개의 주머니는 팔려가기전 강아지의 일시 거처다. 한달에 1백마리는 족히 판다는 그도 사연을 많이 가진 이곳 사람들 중 하나다. 황해도 평산이 고향이라는 노점상 李보배(76)할머니도 굵게 주름진 얼굴에서 우리 어머니 시대의 온갖 풍상이 느껴지지만 자신의 과거는 애써 묻어두려는 金할아버지와 닮음꼴이다. 사연보따리는 끝내 풀지 않은 채 옷보따리만 풀 뿐이다.
이곳 반짝장의 노점상들은 권리금이 기천, 심지어 억대의 점포상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영세상인들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 사람들은 장돌뱅이의 설움이 그대로 내비친다. 그러나 그저 모든 걸 잊고 싶다는 뜻인지 장사에만 열심이다. 워낙 없어 자리다툼도 벌이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않는다. 어려운 사람들의 동병상련 때문일까. 성탄절과 연말연시 대목을 만나 흥청거리는 현대식 대형상가의 캐롤소리는 이들의 삶과는 너무나 먼 저만치에 있다. 제각기 치열한 삶을 엮어내는 이곳도 명암이 교차되는 우리시대 사회상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율리 피커링이라는 미국인은 “남대문시장은 조선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의 변화가 생생히 반영돼 있는 곳”이라면서 한국
경제의 발전에 비추어 그 미래도 밝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특히 군중속의 한사람을 자신의 고객으로 끌어들이는 이곳 상인들의 상술은 가히 예술에
가깝다고 경탄도 아끼지 않는다. 쇼핑하기에는 안성마춤인 이곳에서 하루종일 쏘다니고 나면 온몸이 쑤시지만 산타 클로스가 부럽지 않은 상품
꾸러미들로 갑자기 부자가 된 듯한 넉넉함을 느낄 수 있다는 피커링씨의 말은 싸면서도 다양한 상품을 가진 남대문 시장을 과장하지 않고 말해준다.
‘유통1번지’ 남대문시장의 밤은 포장마차 불이 하나둘 꺼지면서, 하루의 스트레스를 다 풀지 못한 취객들의 비틀거리는 발걸음을 뒤로 남기면서
끝나간다. 1~2시간후의 또 한판 승부를 위해 짧은 잠을 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