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전서 양민 3백여명 살해한 캘리 중위 … 美 콜럼버스에서 벤츠 2대 끌며 유지행세 월남전쟁이 한창이던 지난
68년 미군의 의해 저질러진 밀라이 양민대학살사건의 지휘자였던 윌리엄 캘리(46)가 미국 조지아주 콜럼버스에 살면서 성공한 보석상으로 변신되어
있다는 게 최근 《피플》지에 잡혔다.
1백57㎝의 작달만한 키와 남에게 결코 좋은 인상은 주지 못할 것 같은 얼굴 모습, 20년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군복 대신
고급 정장을 하고 있다는 것과 안경을 걸쳤고 나이에 걸맞게 살이 올랐다는 정도일 뿐, “캘리는 건재하다”는 항간의 소문을 그대로 확인시켜주었다
한다.
당시 중위였던 그는 약80명의 완전무장한 부하들을 인솔하고 밀라이라는 작은 마을을 공격, 3백47명의 베트남양민을 무차별
학살했다. 그로부터 1년후 군사재판에 기소되어 계획적인 살인행위임이 인정돼 종신형을 선고받았었다.
그러나 그가 철장에 갇힌 기간은 단 3일, 당시 대통령이었던 닉슨은 자택연금이라는 방식으로 곧 그를 석방케 했으며 3년후에는
그것마저 풀어주었다. 당시 밀라이학살사건에 대한 미국여론은 완전히 양분되어 있었다. 반전파들은 그를 살인광이라고 비난하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그를 주인공으로 하는 팝송, 뮤지컬, 책 등이 쏟아져 나왔다. 심지어 청혼을 하거나 누드사진을 보내는 여자들이 줄을 이었고 벤츠를
선물하는 장군도 있었다.
마이애미 출신인 캘리는 공부와는 담을 쌓고 여자들 꽁무니나 쫓아다니던 문제아였다. 중학교 때 ‘컨닝’을 하다 발각돼 낙제를 한
후 여러 학교를 전전했고, 간신히 진학한 대학에서의 생활도 신통치 않자 1년만에 도중하차하고 66년에 월남전에 자원했다. 이곳에서 비로소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맹활약을 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소위로 임관되었으니 그의 생애에서 가장 흥분할 만한 일이었다. 작전지도도 제대로 읽을 줄
모르는 캘리가 장교가 됐다고 비웃는 사람들도 많았으나, 그처럼 전쟁에 적합한 인물도 드물다 할 만치 전투장을 누볐다. 더욱이 상관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불 속에라도 뛰어들 것 같았다는 게 그를 아는 사람들의 평이었다.
당시 미군 중에는 캘리 같은 유형의 군인들이 적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럴 때 “난 베트콩의 목을 원한다”는 4성장군 웨스트
모어랜드의 발언마저 나와 공명심에 불타는 군인들을 자극했다. 게다가 그즈음 캘리의 부대는 밀라이 부근에서 계속 밀리고 있는 터여서 잔뜩 독이
올라 있던 중이었으니, 밀라이 소탕작전에 캘리는 적임자였다.
처음에 밀라이에 낙하된 캘리의 부하들은 적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잠시 주춤했다고 하며 아무런 적정도 없었다는 것이다. 후에
밀라이사건을 폭로하여 퓰리처상을 받았던 시모어 허시에 의하면, 이때 한 병사가 갑자기 베트남 양민 1명을 총검으로 찔러 살해하면서부터 주춤하던
분위기에서 돌연 대학살로 변해버렸다고 한다. “한마디로 미친 것 같았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쏘아댔다”는 게 허시의 설명이었다. 이때 캘리는
차마 총을 쏘지 못하고 있는 부하에게 총을 들이대며 위협하기도 했다.
“물론 부녀자와 노인들이 태반이었다. 그러나 유사시 그들이 우리를 죽일 수 없다고 누가 단정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 그의
항변이었다.
캘리는 대학살을 진두지휘하면서 22명을 직접 사살했다. 재판 당시의 증언에 의하면, 4시간에 걸친 대학살후 시체더미에서 기어나온
두 살 난 아이를 도로 그 속에 집어던진 다음 사살해버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재판에 넘겨진 25명중에는 캘리에게 소탕작전을 명령한 장교들도
있었으나 그 혼자만 실형을 언도받았었다. “내가 입을 열면 재판을 뒤엎을 수도 있다”는 묘한 말만 남긴 채 그는 지금까지 학살사건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캘리와 함께 밀라이사건에 가담했던 병사들은 거의 다 암울한 생활을 하고 있다. “나는 착한 아들을 군대에 보냈으나 군은 내
아들을 살인자로 만들어 되돌려주었다”는 한 어머니의 말처럼 가족들마저 그들을 꺼리는 경우가 많았다. 대부분이 그후 이혼을 하거나 가족과 떨어져
살게 되었다. 적개심 · 절망감 등으로 약물중독자가 되거나 정신병원 신세를 지는 사람들도 많다. 그중에는 몇 번씩이나 자살을 시도한 사람들에다가
실제로 자살한 사람도 있으며 피살된 경우도 있다. 그에 비해 정작 캘리는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요즘 그는 2대의 벤츠를 가진 보석상으로 콜럼버스에서 유지 행세를 하며 가족과 함께 중상류의 생활을 즐기고 있다.
주민들에 의하면 그는 화려한 사교모임에도 자주 모습을 드러내는가 하면 부인과 함께 약수를 뜨러다니는 데도 열심이라고 한다. 축구와 자동차경기를
좋아하며 아홉 살 난 아들의 숙제를 꼼꼼히 돌봐주는 사립학교 학부형이기도 하다.
‘상명하달에 충실했을 뿐’이라는 군인정신을 내세워 세월이 흘러가기를 기다리면 그토록 참혹한 학살사건도 용서되는 것인가? 그때나
지금이나 캘리가 그 사건으로 인해 고통을 치른 일은 거의 없는 듯하다. 굳이 캐본다면 해마다 밀라이학살 기념일이면 찾아오는 기자들을 따돌리는 일
정도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