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유학과 관련해 영화배우 최유리가 애 학부모들로부터 돈을 챙겨 미국으로 도망친 것으로 알려진 사건이 국내 에서는 큰 파문을 일으켰지만
막상 미국 내, 특히 동포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사는 로스앤젤레스에서는 별다른 화제를 불러일으키지 않고 있는 것이 퍽 대조적이다. “최유리가
7백만 달러를 갖고 로스앤젤레스에 와 숨어 있다”는 소문 정도가 나돌고 있을 뿐 일상생활에 쫓기는 많은 동포들은 “별난 사건들 이 꼬리를 물고
터지는 고국에서 또 그렇고 그런 일이 생긴 것” 정도로밖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다.
로스앤젤레스 총영사관 정국진 교육원장은 “지구촌이 좁아지고 있는 때 외국어를 익히고 다른 나라의 관습을 이해하는 국민 이 많아져야 한다는
면에서 자격 있는 학생들이 유학을 많이 와서 배우고 가는 것은 나라 장래를 위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력 없는 사람들이 도피성
유학을 하는 것은 본인을 위해서나 사회를 위해서나 좋은 일은 아니다”라고 차분한 목소리로 개탄한다. 그는 “도피성 유학으로 물의를 빚고 있는
한국학생은 극히 일부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할 뿐 그 숫자는 파악할 길이 없다고 말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도피성 유학생들의 대부분이
친지방문이나 여행을 목적으로 부모를 따라 미국에 온 사람이며 귀국할 날짜에 떠나지 않고 학교에 입학해서 주저앉기 때문이다.
고등학교까지 의무 교육제도를 택하고 있는 미국에서는 6세부터 16세까지의 학령기 아동이 학교(공립)를 찾아와 소정의 등록증을 적어내면
무조건 입학을 시켜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다. 학령기 아동을 둔 부모가 자기 자녀를 학교에 보내지 않을 때는 처벌을 받게 되기
때문에 학교당국은 학생이 불법 입국한 외국인이든 미국시민이든 신분상의 문제를 일체 묻지 않고 간단한 소정의 양식에 답을 적어내면 입학을 허용하고
있다.
관광 비자를 학생비자로 바꿔 사립학교가 많은 미국은 어떻게 보면 돈 많은 사람에게는 더욱 매력 있는
곳이기도 하다. 기숙사가 따로 있고 감독을 해주는 일까지 도맡아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공립학교가 무료인데 반해 사립학교는 학비 ·기숙사비
등을 옹골지게 받아낸다. 그러니 이름 있는 사립학교를 골라서 입학을 시키면 국민학교서부터 줄곧 일류 상급학교로 진학하게 할 수
있다. 문제가 있다면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정규학교가 아닌 ‘사이비 학교’에 자녀들을 보내는 경우이다. 단돈 5만 달러만 은행에
예금해두고 적당한 건물을 임대하여 책을 모아 도서관 형식을 갖추고 당국에 학교설립 신청을 하면 누구든 학교를 세울 수 있는 곳이 미국이기 때문에
부실한 학교도 그만큼 많다.
지난해 로스앤젤레스에 재미동포가 윌셔고등학교라는 학교를 세우고 학생을 모집한 결과 1백20명이 모였는데 거의 전부가 한국학생들이었다.
이것은 학교가 영리사업으로도 충분히 매력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89년 이후 한국정부가 해외여행을 자율화한 뒤부터 곳곳에 유학알선업체들이 생겨나 날이 갈수록 일이 늘어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에만 이런
업소들이 10여개 생겨 유학생을 모집하고 있다.
초 ·중 ·고둥학생들을 상대로 I-20양식(입학허가서의 일종)을 발행 하고 토플시험없이도 학교입학을 할 수 있다고 광고를 내고 있는 이런
업체들은 관광 비자(B-2)를 학생비자(F-1)로 바꿔주는 일도 대행한다고 밝히고 있다. 대개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한국의 유학알선업체와도
관계를 갖고 있게 마련인데 유학 알선업을 하는 사람은 전문지식 여부와는 관련 없이 시청에서 ‘영업허가만 받으면 사무실을 차릴 수 있다.
로스앤젤레스 시내 윌톤국민학교 현직 교사로 13년간 재직하면서 ‘한미유학’이라는 업소를 차리고 있는 이삼랑씨는 주로 하고 있는 일이
“이민법상 합법적인 전학을 할 수 있도록 일을 돕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구체적으로는 방문자를 학생신분으로 바꿔주는 일을 하고 있다.
그는 이른바 도피성 유학에 는 두 가지 유형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첫째는 주한 미국대사관에서 F-1비자를 정식으로 받아서 온 그룹과,
둘째 는 부모를 따라 방문차 B-2비자를 받아서 미국에 와서 신분을 F-1로 바꾼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처음부터 F-1비자로 미국에 온 학생들은
정식 수속을 밟고 왔기 때문에 별로 큰 문제가 없지만 B-2비자로 왔다가 F-1비자로 바꾼 학생들 가운데서 문제가 지주 생길 수 있다고
한다.
“미국사정 알면 유학 보낼 부모 없을 것” B-2비자로 와서 학생이 된 사람들 숫자가 작년부터 부쩍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우선 방문자로 온 학생들은 영어가 모자라기 때문에 토플시험을 볼 수 없어 정규학교 입학이 불가능하며, 영어학원
정도를 택해 몇 년 동안 영어공부만 해야 하고 그러고도 토플시험에 떨어지면 별 수 없이 ‘사이비 학교’에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일부 악덕업자들이 대행수수료로 8백 달러 선에서 대학입학 허가서를 받아주는 일을 4천~5천 달러까지 받는 사례도 가끔 있고 폐교된 학교의
입학허가서까지 팔아 돈을 챙기는 경우도 있다.
한국학생뿐 아니라 다른 나라 학생들이 관련된 비행들이 자주 생기다보니 미 이민국은 이런 비행을 적발하는 전담수사반을 편성해서 단속에 나서고
있다. 최유리사건에 대해서도 미국경찰은 한국정부의 공식요청이 있으면 체포에 협력하는 것이 통례이지만 공식 협조요청이 있었는지의 여부를 묻는
질문에는 수사상 답변을 않는 것이 원칙이라며 로스앤젤레스경찰국 대변인은 확답을 회피했다.
한편 로스앤젤레스에서 서남쪽 20마일 떨어진 학군이 비교적 좋다는 토렌스시에서 영어 ·한국어 2개 언어로 국민학교 교육을 하고 있는 일을
감독하는 2중언어교육관 클라라 팍 박사는 “교육적 효과로 볼 때도 어린이를 부모와 떼어서 따로 둔다는 것은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것이 더
많다”면서 초 ·중 ·고둥학교 학생들을 유학 보내는 일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했다.
“중고등학교의 영어는 이미 대학에서 쓰는 영어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ABC 정도나 배워가지고 와서 곧장 중고등학교에 가면 그 아이가 어떻게
따라간다는 말인가. 그리고 미국 중산층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지를 안다면 감히 자식을 혼자 미국에 둘 부모가 없을 것이다.
가뜩이나 예민한 사춘기에 부모와 떨어진 상태에서 공부한다면 그만큼 탈선할 동기가 많지 않겠느냐”고 그는 말했다. 그는 또 “재작년 이 지역
한국계 초 ·중 ·고등학교 학생수는 약 1천3백 명이었으나 지금은 1천5백 명으로 늘어났고 학군이 좋다는 이곳 한 국민학교의 저학년 반은 학생
30명 중 20명이 한국학생인 데도 있다”면서 그러나 “도피성 유학으로 온 학생이 성적불량 등으로 문제가 되어 쫓겨난 일은 아직 한번도 없다”
고 밝혔다.
그런가 하면 로스앤젤레스 근교 플러톤시에 있는 서니힐스공립고등학교는 3년 전까지 한국학생이 1백50명이었는데 지금은 5백 명이 넘는 상태로
전교생의 4분의 1이나 된다. 역시 비버리힐스에 버금가는 부촌으로 알려진 팔로스버데스시 팔로스버데스고등학교에도 한국학생이 갑자기 불어나기 시작,
최근에는 입학을 원하는 한국학생들에게 필요 이상의 문서들을 가져오라고 성가 시게 굴어 입학을 단념케 하려는 눈치가 뚜렷해 보인다는 것이다. 이
학교는 캘리포니아 주 내에서 대학진학률이 가장 높을 뿐 아니라 학력경연대회에서 항상 두세 손가락 안에 드는 우수한 공립학교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 대저택을 가진 어느 동포는 한국에서 온 학생 6명을 하숙시켜서 한 사람당 1년에 2만 달러씩 받는 변칙영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한국학생들 수가 늘어나고 대부분의 학생들이 우수한 공립학교로 몰리는 것은 이민 오는 동포들이 많아지면서 생기는 일이다. 도피성
유학으로 온 학생들 때문에 이런 일이 말썽이 된다는 말은 아직 없다.
미국생활 20 년이 되는 전 동양통신 워싱턴 특파원 박원홍(월터팍부동산학교 교장)씨는 “직원 가운데 조카를 맡아 국민학교 공부를 시키는
사람이 있지만 어린 학생이 말이 달려 고생하면서 남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는 기특한 일은 있어도 다른 문제는 없는 것 같다”고 말하고 “도피성
유학 같은 것은 한국사회가 지닌 고질적인 문제, 즉 아무나 다 대학만 가면 된다는 생각이 없어 지지 않는 한 좀처럼 사라지지 않을 것”이 라고
말했다.
극작가 장소현씨는 “한국사회의 근원적 문제인 입시제도와 졸부들이 설치는 풍토에다가 국제 감각이 모자라는 학부모 때문에 문제가 생기고, 또
집 한채 팔면 수십만 달러씩 쥐고 오는 현실 등이 이런 문제를 더욱 부채질한다”고 한국내의 부조리를 탓했다.
‘가라오케’ 술집 한국학생 초만원 도피성 유학생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 만 빗나간 일부 젊은이들은
돈을 물 쓰듯 하고 거들먹거리면서 동포사회에 ‘구린내’를 물씬 풍기고 있다. 로스앤젤레스 몇몇 룸살롱은 이런 젊은이들로 주말이면 바글거리는데
통이 큰 것을 자랑이라도 하듯 몇 백 달러 씩 팁을 뿌린다는 것이다. ‘대벌’ ‘역마차’ ‘힐탑’ 등이 그런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 밖에도
디스코테크 ‘식스애비뉴’ ‘플라밍고’ ‘타임’ ‘아마존’ 등이 이들이 붐비는 단골술집이다. 노스리지대학이 있는 대학촌의 ‘서울 ·서울
·서울’이리는 가라오케 술집은 이 대학 영어연수학원에 다니는 한국학생들로 항상 초만원을 이루는 곳으로 소문나 있다.
카 스테레오 장사를 하는 한 동포는 며칠 전 7만 달러나 하는 새 BMW차에 3천 달러짜리 카 스테레오를 달아주었는데 차 주인이
바로 ‘이런 젊은이’였다고 말했다. 몇 달 전 똑같은 차에 똑같은 스테레오를 달아주었는데 차를 들이박고 새 차를 또 사서 가져온 것을 자량삼아
말하더라는 것이다.
비록 얼마 안 되는 숫자이기는 하지만 마약을 즐기는 학생 중에는 심지어 숙제조차도 다른 학생에게 돈을 주고 떠맡기는 일이 있다고 한다.
놀기 좋아하는 도피성 유학생 들은 으레 끼리끼리 떼 지어 다니면서 다른 학생들과 어울리는 일을 기피하여 위화감을 조성, 빈축을 사기가 일쑤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