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까지도 영국의 극비 정보기관 MI5의 책임자는 ‘K’라는 두문자로 통했다. 그의 이름을 누설하는 것을 비밀보호법에 따라 금지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K의 이름이나 활동에 대해 아는 사람은 총리를 포함한 몇몇 사람뿐이었다. 1909년 이 정보기관이 생긴 뒤로 이같은 전통은
불문율로 지켜져 왔다.
그런데 최근 MI5 역사 84년 만에 처음으로 책임자의 이름과 활동이 공개돼 관심을 끈다. 주인공은 올해 58세인 스텔라
리밍턴여사. 최근 마이클 하워드 내무장관과 함께 기자회견을 자청해 자기가 책임자로 있는 MI5의 활동에 대해 알릴 것은 알리겠다고 공언했다.
그는 이같은 다짐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로 자기 얼굴과 이름이 언론에 나가는 것을 허용했다. 그날 기자회견에 나간 기자들도 이러한 파격적
제안에 화들짝 놀랐다. 이 정보기관을 공개하는 것 자체도 뉴스였지만, 막상 카메라 앞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MI5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육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숏 커트 머리에 진주 귀고리를 달고 큼직한 결혼 반지를 낀 모습에서는 정보기관의 책임자라는
분위기가 전혀 풍기지 않았다.
한 카메라 기자는 그의 첫 인상에 대해 “그날 리밍턴 국장은 매우 차분한 모습이었다. 그는 어느 상점에서도 흔히 만날 수 있는
외모여서 다시 보면 그를 알아볼 수 있을지 의문이 갈 정도였다“라고 말했다. 영국의 선정적 대중지 <선>은 그가 최근 한 칵테일
파티에서 샴페인 잔을 들고 환히 웃는 모습을 실었다. 바로 얼마전까지도 팔목까지 내려오는 긴 소매에 얼굴을 뿌옇게 처리해 알아볼 수 없게 한
그의 사진을 싣던 관례에 비추어 볼 때 괄목할 변화가 아닐 수 없다.
리밍턴 여사는 92년 2월에 은퇴한 페트릭워커 경의 뒤를 이어 MI5의 책임자가 됐으나 그의 과거 경력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기자회견장에서 그는MI5의 활동을 간략히 소개한 35쪽짜리 소책자를 기자들에게 배부했다. 서문에는 ‘이 기관에 대해 갖가지 억측이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그것에 대답할 경우 이 기관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활동에 영향을 줄 염려가 있어 말하기 곤란하다’고 적혀 있었다.
이 책자에 따르면 MI5는 5개 정보 부처로 나뉘어 있고, 전체 요원의 절반 정도인 1천여 명이 여성이다. 특히 3백40명의 요원을 보유한 정보
총국은 수사와 신규 요원 채용 업무를 담당한다.
이번에 MI5가 일반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게 된 요인은 대강 세가지다. 먼저 냉전체제가 무너진 뒤로 국내외적으로 영국을
전복할 만한 위험 요소가 크게 줄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둘째, 지난해 불화설에 휩싸였던 찰스 황태자 내외의 전화를 MI5가 도청했다는 혐의로
여론의 집중 화살을 받은 후 실추된 신뢰성을 회복할 필요가 있었다. 즉 알릴 것은 과감히 알려 업무와 관련한 불필요한 오해를 살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었다. 마지막으로 지난 89년부터 이 기관도 자체적으로 보안법 적용을 받게 돼 더 이상 비밀 기관으로서의 ‘특권’을 누릴 수 없게 됐다는
점이다.
MI5는 냉전이 끝난 뒤로는 아일랜드의 무장 테러단체인 북아일랜드공화국(IRA)의 테러 활동을 방지하는 일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현재 MI5가 거느린 2천여 요원 중 약 5%만이 정부 전복 음모를 색출하는 작업에 종사하고 있다. 이번에 MI5는 일반이 짐작했던대로
지난 수년간 도청과 우편 검열을 해왔다는 사실이 새롭게 드러났다. 리밍턴 국장은 MI5를 소개한 소책자에서 앞으로 이 기관이 마약 거래나 조직
범죄에 대한 수사는 맡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지만, 도청과 우편 검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卞昌燮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