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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과학계, 뼈 아픈 경험 통해 ‘과정의 도덕성’ 따지는 전통 확립

나치의 ‘죽음의 의사’ 요제프 멩겔레와 일본군의 731부대는 잔인한 인체 실험으로 악명 높다. 이들의 연구 기록은 피와 살점이 난무하는 슬래셔 영화를 방불케 한다. 살아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 실험이기에 현 과학계에서는 도저히 구할 수 없는 자료도 많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이 자료를 인용하는 것을 금기로 여긴다. 아무리 가치가 있다 하더라도 비윤리적인 방법을 통해 얻은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로버트 포조 박사(미국 미네소타 대학)의 사례도 과학자에게 윤리라는 덕목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해준다. 포조 박사는 저체온증 환자를 안전하게 회복시키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었다. 이전에는 환자의 체온을 이용하여 서서히 체온을 올리는 방법이, 더운 물이나 공기 등을 이용하여 강제로 체온을 올리는 방법보다 효과적이라는 견해가 다수였다. 그러나 실제 임상 치료에서 환자의 체온을 이용하는 방법은 성공률이 50%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포조 박사는 2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 다하우 수용소에서 독일 의사들이 자행한 저체온증 실험 자료를 참고하여, 외부 열원을 이용해서 강제로 체온을 올리는 방법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 덕에 저체온증을 효과적으로 치료하는 길이 열렸다. 하지만 <영국 의학 저널>은 포조의 논문을 게재하기를 거부했다. 연구 성과는 인정하되, 논문에서 제시한 근거를 비윤리적인 방법으로 획득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불변의 진리를 터득하기 위해 평생을 살아가는 과학자들에게 윤리라는 가치 판단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이유는 무엇일까? 과학은 보편타당한 사실을 다루는 학문이므로, 과학의 생명은 ‘재현 가능성’에 있다. 한 번 수행한 실험은 반복해서 동일하게 재현할 수 있어야 과학적 사실로 인정받을 수 있다

. 그런데 이 재현 가능성에는 물리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윤리적 관점도 들어 있다. 아무리 재현 가능한 실험이라도 과정이 부도덕하면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다는 뜻이다. ‘사람이 피를 얼마나 흘리면 죽는가’와 같은 의문에 답하고자 사람에게 상처를 내고 죽을 때까지 기다리는 실험을 허용할 수 없는 것이다. 

 과학자들의 윤리 규범은 의사들의 히포크라테스 선서만큼이나 절대적이다. 이는 외부에서 강요하기보다 주로 과학자 사회 내부에서 아픈 경험을 통해 자생적으로 생겨났다. 원자폭탄의 충격을 겪은 후, 원자폭탄 개발에 직접 참여했던 과학자들이 가장 격렬한 핵무기 반대파로 돌아선 사실이 좋은 예다.

나치 자료 참고한 논문 게재 거부

 황우석 교수의 배아 줄기세포 연구에 서양 과학 사회가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분명 황교수가 추구하는 연구는 인류에게 희망을 주는 구원의 메시지이다. 그러나 사실이든 여론에 호도되었든, 혹시라도 연구 과정이 과학자 사회의 윤리 규범을 어겼다고 판단되면 황교수의 업적은 인정받기 어렵다. 

 현재까지의 정황만 놓고 보면 황교수의 연구에 그리 큰 윤리적 결함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미국에서도 난자 매매는 이루어지고 있고, 황교수의 연구 과정에 법적인 하자도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실제로 윤리적 문제가 있었는가 하는 것과는 별개로, 의혹을 살 만한 부분을 사전에 해소하여 시빗거리를 만들지 말았어야 했다는 아쉬움은 남는다. 외신과 서양 과학자들이 물고늘어지는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그동안 국내 정서는 과학적 성과에 집착해서 ‘과학은 윤리적이어야 한다’는 이치를 소홀히 여겨온 것이 사실이다. 황교수의 연구에 대한 윤리 논쟁이 생명공학 분야에서 새롭게 치고나오는 한국에 대한 견제라는 시각도 있지만, 정치적 역학 관계와 과학자의 윤리는 별개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서둘러 국제 기준에 걸맞는 생명 윤리 규범을 만들고, 이를 엄격히 집행해 가야 한다. 아무리 훌륭한 결과라도 과정이 정당하지 못하면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지금까지 애써 쌓아온 황교수의 업적이 과정상의 서투름으로 빛이 바래지 않도록 차분히 지혜를 모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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