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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들, 글로벌 광고회사 그늘 벗어나 ‘고토 회복’ 출사표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한국 경제의 중흥기와 더불어 대한민국 광고계는 초고속 성장을 이루었다. 그때부터 한국이 세계 광고계의 변방에서 주목할 만한 국가로 떠오르게 된다. 오길비&매더(O&M)·DDBO·덴츠·사치&사치·영&루비컴 등 세계 톱 랭크 대행사들이 그들의 글로벌 광고주인 P&G·존슨&존슨·네슬레·코카콜라 등 골리앗들을 등에 업고 속속 한국지사를 설립하게 된 때도 바로 이때다.
업계 순위 15~30위권으로서 주로 다국적업의 광고만 대행하며 기회만 엿보던 이들 글로벌 광고대행사들이 행동을 개시한 것은 외환위기 때였다. 한국광고계의 잠재력을 이미 간파하고 있던 이들은 대기업 계열사인 광고대행사들을 헐값에 사들이기 시작했다. 현대그룹의 금강기획, LG그룹의 엘지애드, 해태그룹의 코래드, 태평양의 동방기획, 애경그룹의 애드벤처, SK그룹의 태광멀티애드(현TBWA) 등 한국의 내로라 하는 간판 광고회사들이 속속 다국적 광고회사의 손에 경영권을 넘겨주었다. 광고계에서는 ‘한국 광고는 죽었다!’라고 탄식이 터져 나왔다. 삼성그룹의 제일기획을 제외한 10대 광고대행사의 대부분이 넘어갔고, 중견 대행사도 덴츠·하쿠오도·유로넥스트·사치&사치 등 일본과 유럽 대행사까지 가세한 공세에 지휘권을 넘겨주었다. 그 후로 약 10년이 흐른 지금 아직도 겉으로는 글로벌 광고대행사가 한국 광고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속을 보면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경영 위기로 광고대행사를 팔았던 대기업들이 글로벌 광고대행사들과의 대행 보장 기간이 끝나는 2004년을 시작으로 하나씩 다시 하우스에이전시를 설립했거나, 설립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한국광고시장의 특수성에 적응 못해
외국계 광고대행사들이 좌우했던 지난 10년의 광고계 이면을 돌아보면 이렇게 될 소지는 처음부터 다분했다. 외국계 광고회사들은 한국 광고계의 잠재력만을 보았을 뿐, 한국 문화의 독특한 특성을 간과했거나 소홀히 여겼다. 그들은 언어적·문화적 특수성이 세계 제일이라 할 수 있는 한국인의 정서를 몰랐다. 더구나 이들은 광고계의 구조나 현실을 알지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인수 당시 대표이사나 중역을 선임한 사례를 보면 이를 알 수 있는데, 해외에서 평생을 보내 무늬만 한국인이거나, 아니면 광고계 출신이 아니라 영어만 잘하는 한국 내 지인을 선임했다. 한국 광고의 여정을 모르는 사람에게 한국 광고의 키를 맡겼으니 선원들이 지금껏 파도와 싸우며 익혀온 노하우를 그들은 이해할 수 없었고, 선원들 역시 그 선장의 지시를 납득하기 어려웠다. TV-CM 한 편에 1년을 준비하던 그들은 한 달 만에 만들어 내야 하는 한국 광고주의 ‘빨리빨리’ 성향에 당황했다. 편당 제작비가 그들의 3분의 1이 채 되지 않는 우리의 영세한 제작 현실도 힘겨워했다. 합리적 사고로 똘똘 뭉친 그들은 혈연·지연·학연, 심지어 사돈의 팔촌까지 얽히고 설킨 이해관계를 이해하지 못했다. 일만 잘해서 되지 않는, 관계와 관계 속에서 풀어내는 대한민국 밤의 경제를 그들은 흔쾌히 결재하지 못했다. 결정적인 패착은 그들이 이익금을 재투자나 자산으로 편입하지 않고 매년 수익금 거두어가기에 급급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관점의 차이 때문이었다. 한국 경영인들은 회사를 키운다는 것에 관심을 둔 반면, 다국적 광고대행사 경영진은 주주들의 표정이 최대의 관심사였다. 결국 광고주와 직원들과 경영진 간의 삐걱거림은 필연적이었고, 그 불만은 다시 대기업이 광고회사를 설립하는 데 빌미를 제공했다.재벌들 다시 광고대행사 설립 붐
이미 현대자동차그룹이 이노션이라는 이름으로 대행사를 설립해 이를 대행하던 광고회사는 광고수주액이 절반으로 줄어 업계 3~4위권에서 10위권 밖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SK의 광고를 대행하던 광고대행사도 SK그룹이 대행사를 설립하기로 하면서 돌파구 찾기에 전전긍긍하고 있다. 광고업계에서는 앞으로도 여러 글로벌 광고대행사들이 ‘재벌의 역습’에 비슷한 쇠락의 길을 걷게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현실을 보면 과연 글로벌 광고대행사들이 헐값에 한국 광고회사를 샀던 것인지, 아니면 한국 기업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인지 모호해진다. 현재 금강기획·엘지애드·JWT·그레이·O&M 등을 거느린 WPP와 TBWA·BBDO동방·Lee&DDB 등을 거느린 옴니콤의 양대 축으로 대변되는 글로벌 광고회사들의 다음 행보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 와중에 잘 나간다는 소리를 듣던 국내 광고인들은 외국계 광고사들의 수익성 위주 경영에 회의를 느끼고 자신의 실력을 인정하는 광고주들을 설득해 2백억~3백억 대의 중형 광고대행사를 속속 설립하고 있다. 외국계 광고대행사들이 계속해서 그들의 방식을 고집할지, 한국의 특수성을 이제라도 인정하게 될지, 아니면 그 중간에서 어떤 타협점을 극적으로 찾아내게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