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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일의책] <일본인에게 역사란 무엇인가>^

 
일본의 역사 왜곡은 도를 더해가고 고위 관리와 일부 지식인들의 망언도 계속 이어지며,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그만둘 가능성도 거의 없어 보인다. 일본인 모두가 후안무치한 것은 물론 아니겠지만, 가끔은 이런 생각도 해본다. ‘도대체 일본인들의 심성이 어떻게 생겨먹었기에 저럴까?’ 감정을 즉자적으로 배설하는 게시판 댓글 수준으로 말하자면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다’는 식으로 답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일본인들의 의식 전반을 지배하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히도쓰바시 대학 명예교수로서 서양 중세사 분야의 저명한 학자인 아베 긴야는 이 책에서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을 주고 있다. 그 답의 핵심어는 세켄(世間)이다. 산스크리트의 ‘로카’라는 말에 연원을 두고 있는 세켄은 일본의 고전 문헌에 수없이 등장한다. 일본인 이외의 다른 나라 사람에게 세켄의 뜻을 정확히 이해시키기는 어렵다고 저자 스스로도 말하고 있지만, 아주 거칠게 옮기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유대’라고 할 수 있다. 세켄은 증여와 상호보답 원칙, 장유(長幼) 질서, 공통된 시간 의식 등 세 가지 요소 혹은 행동 원리로 이루어져 있다.

 
좀더 쉽게 이해하자면 폭력 조직을 떠올려 보면 된다. 증여와 상호보답 원칙은 부하에 대한 폭력 조직 보스의 절대적 신임과 보스에 대한 부하의 절대적 충성에 해당한다. 장유 질서는 폭력 조직의 철저한 위계 질서에 해당한다. 그리고 공통된 시간 의식은 폭력 조직 내부의 관계만 의식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세켄은 의식 차원에서나 현실 차원에서나 개인은 없고 집단만 있는 상태라고도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세켄 의식을 공유하는 일본인들은 자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데 익숙하지 않고, 전체 의견과 다른 자신만의 의견을 표현하는 데 소극적이다. 눈에 띄게 행동하는 것을 삼가고 가능한 한 다른 사람들과 차별되는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는 것이다. 해외 여행을 떠난 일본인들이 관광 안내인이 들고 있는 깃발만 쳐다보고 다닌다는 조롱 섞인 우스개를 떠올려 봄직하다. 사회 전체가 우경화하고 고위 관리들의 망언이 이어져도 대다수 일본인들이 무관심한 듯 보이는 것의 밑바탕에는 세켄 의식이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저자의 말을 들어보자.

그들은 왜 세켄 의식에서 못 벗어나나

‘근대적인 조직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인간관계에 따라 일이 진행될 경우에는 논리가 아닌 정이 지배하고 있다. 이는 인사 채용의 경우뿐만 아니라, 인사 전반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일이 왜 일어나는지 생각해보면, 여기에도 역시 세켄이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세켄에서 개인은 독립된 존재가 아니므로, 인척 관계나 출신 대학에 따라 평가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채용된 사람은 모두의 기대대로 세켄이라는 관계 틀 속에서 행동하게 된다.’ 

대략 1853~1877년을 전후로 진행된 메이지(明治) 유신 이후 서양 문물을 전면적으로 수용한 일본이 왜 전통적인 세켄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을까? 저자는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계기로 서양의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였지만 정신적인 문제에서는 그렇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예컨대 1890년 공포된 교육 칙어를 통해 국수적인 정책 방향을 제시하면서 개인보다 천황과 국가가 우선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일본인들은 1884년부터 ‘individual'의 번역어로 개인(個人)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지만, 번역어만 지니게 되었을 뿐 서양적인 의미의 개인 관념을 본격적으로 수용한 것은 아니었다.

 
결국 일본인들은 고대부터 의식과 생활 속에 깊이 뿌리 내린 세켄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그 결과 스스로를 객관화하거나 역사를 자각할 줄 모르게 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저자의 말을 들어보자. ‘일본인들은 오랫동안 사람과 사람의 일반적인 만남을 거의 모든 일에서 우선해 왔습니다. 역사 문제 역시 일상 생활에서는 거의 의식하지 못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를 식자층은 일본인의 역사 의식 결여라고 파악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을 통해 일본인이 좀더 역사에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인들이 세켄 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저자는 세켄을 대상화·객관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세켄을 역사로 대상화하고 개인을 발견할 때 비로소 일본인들의 역사 의식이 온전하게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저자는 한국인들도 ‘한국의 특유한 생활 의식을 분명한 모습으로 객관화해 보기’를 권한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실천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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