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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구로공단에 ‘아울렛 명소’ 개척…공장형 아울렛으로 진화 계속

마리오는 어떤 기업인가
■비전:대한민국 최고의 패션·유통 그룹
■사업 구조
●패션 사업(까르뜨니트·까르뜨옴므·비까르뜨)
●유통 사업(아울렛 마리오1·마리오2)
●건설 사업(마리오 패션타워·마리오 디지털 타워)
■1980년 창업, 종업원 290명
■대통령 표창(모범 중소기업인 부문)·서울특별시장 표창(지역경제발전 및 이업종 교류활동 기여)

 
서울 금천구 디지털산업단지는 예전의 구로공단이 아니다. IT(정보 기술) 벤처 기업과 패션 기업이 운집한 첨단 산업단지로 급속히 탈바꿈하고 있다. 4~5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쇠락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1990년대 이곳의 제조 업체들이 다투어 공장을 해외로 이전한 데다 1997년 경제 위기마저 덮쳤던 것이다. 특히 봉제·섬유 업체가 몰려 있던 2단지는 직격탄을 맞았다.

불 꺼진 2단지를 패션 메카로 재구축하는 데 앞장선 기업이 주식회사 마리오다. 마리오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던 이곳에 2001년 ‘패션 아울렛’이라는 새로운 유통 업태를 선보여 패션 의류 고객들을 불러들이는 데 성공했다.

마리오의 이런 시도는 겨우 숨만 붙어 있던 섬유·봉제 회사들에게도 돌파구를 제공했다. 공장 일부를 유통 매장으로 전환하는 등 활력을 되찾은 데다 동대문·남대문·대구에 이어 구로가 정부가 키우려는 4대 패션밸리로 선정된 것이다.

까르뜨니트로 여성 니트 시장 평정

불과 3~4년 사이 한국의 패션 유통 지도를 바꾸어놓은 마리오이지만, 1990년대만 해도 이 회사는 니트 의류 제조업체일 뿐이었다. 여성 니트 의류인 ‘까르뜨니트’가 이 회사의 대표 브랜드이자 주력 제품이다. 2003년 남성 캐릭터 캐주얼 브랜드인 ‘까르뜨옴므’를 런칭했지만, 마리오에는 20년 가까이 까르뜨니트밖에 없었다.

패션 업계에서 마리오 홍성열 회장(50)을 ‘니트맨’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회사가 니트 의류 분야에서는 절대 강자이기 때문이다. 시장점유율이 50%를 웃돌 때도 있었지만, 현재도 40%대를 유지하고 있다.

촌동네(충남 당진)에서 11남매 가운데 일곱째로 태어난 홍회장이 1980년 사업을 시작할 때 사업 밑천이라고는 형제들에게 빌린 2백만원이 전부였다. 서울 대방동 지하 방에서 편물기 4대로 시작한 마리오상사는 일본 수출 판로가 열리면서 회사 모양을 갖추어갔다.

세계적인 패션 브랜드를 만들겠다는 홍회장의 의지는 1985년 까르뜨니트로 구체화했다. 백화점 매장에서 중년 여성들에게 까르뜨니트가 고급 니트 의류의 대명사로 각인되면서 마리오는 패션 의류 회사로서 궤도에 올랐다.

까르뜨니트 하나로 마리오를 2000년 3백억원 매출 기업으로 키운 홍회장은, 적어도 패션 업계가 보기에는 엉뚱한 사업 다각화 전략을 폈다. 2000년 7월 마리오 아울렛 착공식으로 유통업 진출을 선언한 것이다. 2001년을 분수령으로 마리오는 유통 사업이 패션 사업보다 커지는 매출 구조의 지각 변동이 일어났다. 급기야 지난해 매출 비중은 71 대 29로 유통사업이 압도적으로 커졌다.

성공했지만 2000년 당시로서는 패션업계가 그를 이상하게 볼 만도 했다. 백화점도 할인점도 아닌, 아울렛(재고 처분점)이라는 생소한 유통 업태였던 데다, 패션 상권이 형성된 명동이나 남대문·동대문이 아니고 버려진 땅 구로였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를 아끼는 지인들은 물론 거래 은행과 컨설팅 회사 관계자들도 극구 말렸다. 하지만 홍회장은 특유의 불도저식 기질로 밀어붙였다.

1년 후인 2001년 7월 마리오 아울렛이 문을 열었지만, 업계의 부정적 시선은 여전했다. 한마디로 ‘되겠어?’였다. 그런데 명동이나 동대문을 찾던 의류 쇼핑 마니아들이 마리오 아울렛을 찾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국내외 유명 브랜드 옷을 싸게 살 수 있다는 사실이 입소문으로 삽시간에 퍼진 것이다. 이후 마리오 아울렛을 빙 둘러 크고 작은 패션 아울렛이 경쟁적으로 생겨났고 구로 2단지는 새로운 패션 쇼핑 명소로 떠올랐다.

아파트형 공장 짓고 건설 사업에도 나서

선점 효과가 사그라들 법도 했지만 마리오는 끄덕없었다. 홍회장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초기의 부정적 시각을 걷어내고 리더 회사로서 위상을 유지할 수 있는 원천은 처음부터 유명 브랜드 입점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백화점의 상위 브랜드가 아니면 받지 않았다. 좋은 품질의 옷을 싸게 살 수 있는 매력이 없다면 누가 이곳까지 찾아오겠는가?” 물론 초기에는 어려움이 컸지만, 유명 브랜드가 하나 둘 모이면서 집적 효과가 생겼다.

 

홍회장의 실험은 계속된다. 지금은 마리오1이라고 부르는 아울렛 바로 옆에 지난해 8월 마리오패션타워를 건립한 것이다. 이 센터 3개 층은 마리오2로 불리는 아울렛이다. 고객이 보기에는 마리오1과 다를 것이 없지만 분명 크게 다르다.

이 센터 4층부터 14층까지 의류 제조 업체 공장이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옷을 만들어 아래서 파는, 제조와 유통이 결합된 ‘공장형 아울렛’은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에게 이득이다. 생산자는 재고 비용과 물류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어 좋고 소비자도 한 곳에서 여러 브랜드의 옷을 싸게 살 수 있어 좋은 상생 시스템인 것이다.

홍회장은 건설 사업에도 손을 댔다. IT 벤처 업체들이 이미 둥지를 틀고 있는 1단지에 마리오디지털타워라는 ‘아파트형 공장’을 짓고 있다. 건물 중앙을 뚫어 채광과 환기가 좋으며 1천평의 공개 공지에다 1백50여 입주 업체들을 위해 다양한 지원 시설을 들여놓는 이 공장은 올 10월 완공 예정이다.

마리오는 최근 분양 공고를 냈다. 홍회장에게 건설 사업에 본격 진출한 것이냐고 묻자 손사래부터 쳤다. 디지털타워 부지는 그가 싸게 사들인 땅인데, 부가 가치를 높이기 위해 마리오가 시행자(시공자는 GS건설)가 되어 건물을 짓는 것이지 건설업 진출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상당수 기업이 그랬지만 마리오도 1997년 외환위기 때 부도 위기를 겪었다. 1998년 매출 격감으로 60개 매장 가운데 12개가 부도를 냈던 것이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부도 위기를 넘기고 1999년 한숨 돌린 그는 돈 될 물건들이 널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당시 구로공단에는 폐업한 공장들이 그야말로 헐값에 매물로 나와 있었다. 홍회장은 땅을 사는 데 올인했다. 그 땅들이 마리오1과 마리오2, 디지털타워라는 것이다.

홍회장이 요즘 가장 몰두하는 경영 현안은 디지털타워를 성공적으로 분양하는 것이다. 이 분양 대금으로 마리오패션타운3을 건립해 마리오 패션타운 마스터플랜의 대미를 장식하려는 것이다. 이 계획이 차질 없이 추진된다면 대한민국 최고의 패션·유통 기업이라는 마리오의 꿈은 현실로 바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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