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몸을 미디어 삼아 작업하는 조 습·옥정호·송상희의 예술 세계
몰래 카메라 류의 프로그램이었던 것 같다. 요즘 한참 인터넷 게시판을 달구었던 연예기획사 대표와 소속 개그맨들이 등장해서, 문제의 그 기획사 대표인 선배 개그맨이 군기를 잡으려고 하자, 후배 개그맨 한 명이 강하게 반항한다는 ‘시추에이션’이었다.
작가 조 습의 작업은, 이를테면 이런 설정과 나란히 간다. 나아가 그러한 설정이 나오게 된 한국 사회 특유의 문화적 맥락과 그 여파까지를 포괄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대안공간 풀에서 열리고 있는 개인전 <묻지마>(5월31일까지, 02-735-4805)에서, 조 습은, 개그맨처럼, 자신이 설정한 상황에 직접 등장해 자기 신체를 소재이자 제재이자 매체로 삼아 사람들을 ‘웃긴다’. 물론 조 습은 공중파 방송에서 활동하는 개그맨에 비해 소재의 금기에 대한 제약이 상대적으로 적다. 아니, 주로 공중파에서 검열하는 소재를 다룬다. 그동안 작가가 다루었던 사건이나 상황은 군사 문화와 가부장제의 악독한 결합에 의해서 탄생된 것들로, 그는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고 있는 권력과 계급 그리고 섹슈얼리티의 기형화한 문제틀을 하나의 미장센 안에 뒤범벅해 구겨넣는다. 이런 그의 작업을 보고 사람들은 폭소를 터뜨리거나 실소를 금치 못하면서 동시에 화를 내거나 기분이 나빠지기도 한다. 한마디로 그의 작업은 관객을 도발하는 것이다. 조 습의 개인전은 1905년부터 2005년 사이의 주요한 사건이나 인물들을 배치하는 연대기적인 방식을 취하고 있다. 4·19와 5·16 그리고 광주민주화운동 등 정치적 사건들 사이사이에 마릴린 먼로의 한국 공연, 연쇄살인범 김대두 사건, KAL기 폭파 주범 김현희, 마라토너 임춘애 등의 사회 문화적인 아이콘들이 끼어든다. 흑백과 컬러 사진을 교차시키며 필름 스트립 식으로 배열한 이번 작업은, 외견상 조습의 작업이 점점 더 영화적으로 되어가고 있다는 주변의 평가를 입증한다. 스케일도 커지고 출연진도 ‘화려’해졌을 뿐 아니라 의상이나 분장도 격식을 갖추었다. 그러나 작품 규모 상 저예산 영화의 수준을 따라 가려면 한참 멀었을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영화적인 접근이 적절한 것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한국 사회 폐부 찌르는 풍자적 표현들
조 습의 작업에서 미디어는 영화 카메라보다는 몰래 카메라에, 그러니까 현실로 구성해본 가짜가 아니라 가짜로 구성해본 현실을 겨냥하는 쪽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이 통상적인 의미의 블랙 코미디가 아닌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조 습의 작품 앞뒤에서 현실은 좀더 강하게 우리를
압박한다. 그것은 현실의 연장이거나 예측이다.
“금기와 대적하려면 더 웃겨야 한다”
조 습과 옥정호의 작업을 놓고 엄숙주의자들은 작품의 재미 때문에 내용의 의미가 반감된다는 평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의 작품은 오히려
더 재미있고 더 기발하고 더 웃겨야 한다. 달리는 자본으로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금기와 홀로 대적할 작정이면 더욱 그렇다.
육영수 여사가 저격당하는 사건을 재연하는 송상희의 비디오 작업을 ‘아버지’ 박정희가 피살당하는 10·26 사건을 연출한 조 습의 사진 작업에 겹쳐놓고 볼 때, 그 성차의 구조는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그런가 하면 아들을 잃어버린 피에타를 통해 여신의 의미를 재구성한 송상희의 작업 옆에, 동상 앞에 ‘호호호’라는 팻말을 들고 서있는 여신을 설정해 놓은 옥정호의 작품을 나란히 놓고 볼 때, 여성 작가 송상희의 관점은 한층 부각된다.
특히 송상희의 작업은 역사적 사건을 다루든 아니면 신화나 설화를 기초로 하든 간에, 코믹하고 불쾌하다기보다는, 궁극적으로 괴이하고 초현실적인 느낌을 자아낸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는 위대한 인물이나 기호화한 도상을 다루는 작품보다 평범한 신체를 대상으로 하는 작업에서 강하게 부각되는데, 버스 안내양 복장을 하고 인천 바닷가에 서있는 작가를 멀리서 잡은 <푸른희망> 연작의 한 장면이 바로 그렇다. 자주색 유니폼을 입은 이 작가의 한쪽 소매가 비어있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이것은 갑자기 호러물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