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전문가 3인 좌담/“비정규직·영세 사업장 노동자 조직화 힘써야”
한국의 노동운동. 누구는 이를 황혼기라 하고 누구는 이를 청년기라 한다. 어느 쪽이 되었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최근의 노동운동이 미증유의 위기에 빠졌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위기의 본질과 그 해법은 무엇인가. 노동계에 대해 그간 애정 어린 질책을 아끼지 않아 온 노동 전문가 3인이 5월12일 모여 난상토론을 벌였다.
참석자
박태주(한국노동교육원 교수, 전 대통령비서실 노사개혁태스크포스팀 팀장)
배규식(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원)
전순옥(참여성노동복지터
대표)
전순옥(전) :
올 초 민주노총이 출범 이후 최초로 대국민 사과를 한 데 이어 이번에는 한국노총이 국민
앞에 고개를 숙였다. 노동계가 잇달아 곤욕을 치르는 것을 두고 각종 음모론이 불거지는 등 말이 많은데, 그보다는 역사적인 배경에서 이번 사태의
원인을 찾아야 할 것 같다.
특히 한국노총은 민주노총과 분리해서 봐야 한다. 한국노총은 처음부터 정부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졌다. 박정희
정권이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노동조합을 재편성하는 과정에서 탄생시킨 것이 한국노총이다. 그러다 보니 한국노총은 처음부터 정부의 비호 아래
자본과 타협 내지 야합을 하면서 일반 조합 노동자들을 지배해 온 역사를 갖고 있다.
이 과정에서 지도부 상당수가 권력화했다. 한
예로 1970년대 전국섬유노련 위원장 김 아무개씨는 고급 자가용을 서울에 한 대, 부산에 한 대 각각 굴리면서 일반 노동자의 수십 배에 달하는
임금을 받았다. 이것이 한국노총의 역사이므로 나는 이번 사태가 전혀 놀랍지도 새롭지도 않다.
현재는 한국노총에도 개혁적 지도부가 들어선 상태이지만, 이같은 역사적 뿌리가 너무
깊다 보니 과거를 떨치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
박태주(박) :
한국의 노사 관계는 흔히 노정(勞政) 관계로 얘기돼 왔다. 그런데 노정 관계가 최근 크게
변했다. 이것이 이번 사태를 부른 첫 번째 원인이라고 본다. 과거의 권력은 노조를 탄압하는 한편 그 이면에서 노조 내부의 비리·부패를 묵인 또는
방조하는 식으로 노조를 통제해 왔다. 그런데 최근 정치가 전반적으로 민주화하면서 정부가 그런 식으로 노조를 통제할 필요가 없어졌다. 다시 말해
노정 관계가 투명해지면서 노조의 비리와 부패를 숨겨줄 이유가 없게 된 것이다.
두 번째로, 사용자도 노조 비리를 키우는 원인을 제공했다. 그간 사용자들은 노조를 가능한 한 통제하려
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금품·향응 제공, 노조 간부와의 담합 따위를 통해 노사 관계를 유지하려는 온정주의적 자세를 견지해 왔다.
그러나 정부나 사용자를 떠나 이번 사태를 부른 가장 근본적 원인은 노동자 자신에게서 찾아야 할 것이다. 노조
지도부의 도덕성 해이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구조적인 데 있다고 본다. 특히 기업별 노조가 지배적인 한국적 상황에서는 노조와 사용자가 현장에서
밀접하게 접촉할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유혹이 싹트기 쉽다.
더욱이 시대가 바뀌면서 노조의 성격도 크게 변화해 왔다. 과거 정부와 자본이 노조를 탄압하던 시기에는 노조를
사수하는 것이 노조의 지상 목표였다. 그러나 정치적 민주화가 진행되고 노조가 합법화하면서 이같은 권력과의 긴장 관계는 급속히 이완되기 시작했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운 것이 경제적 실리주의 내지는 개인적 물신주의이다. 비리가 터질 개연성이 높은 환경이 된 셈이다.
배규식(배) :
한국노총의 비리는
과거부터 정부나 검찰이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권력은 이를 눈감아 줬다. 이걸 노출하면 새로 출범한 민주노총을 도와주는 셈이 되니까.
곧 민주노총 고립화가 정부 전략인 상황에서 한국노총의 도덕성에는 점점 더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전
: 실제로 정부 권력이나 자본
권력이나 그간 한국노총을 이용해 민주노총을 제압하려 한 측면이 있었다. 민주노총이 불참을 선언해도 자기네는 노사정위원회에 순순히 참여하는 등
한국노총은 이전 집행부까지만 하더라도 정부·자본에 협조적인 자세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현 지도부는 다르다. 출범할 때부터 개혁 의지를 분명히 밝혔고 민주노총과도 공동 보조를 취하려는 노력들을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정부·자본으로서는 생각이 달라졌을 법하다. 곧 한국노총을 계속 살려 자기네 이용 가치를 채울 것인가, 아니면 이 기회에 도덕성 문제를 치고
들어가 노조를 무력화할 것인가? 이같은 판단의 갈림길에서 나는 정부와 자본이 후자를 선택했다고 본다.
박:그게 요즘 노동계 일각에서 제기하는
음모론 아닌가?
전:나는
그것을 음모론이라고만은 생각지 않는다. 정부나 자본으로서는 그간의 관계를 청산하려는 측면이 분명히 있었다고 본다.
박:그러나 최근의 검찰 수사를 기획
수사로 볼 수 있는 단서는 현재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음모론에 기대는 것은 노조의 안이한 대응을 불러올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나는 민주노총에 묻고 싶다. 올 초 기아자동차 채용 비리 사건이 터졌을 때 민주노총 지도부는 철저한 자정 노력과 광범위한 조직 혁신 사업을
벌이겠다고 국민 앞에 약속했다.
그러나
지난 5개월간 민주노총이 한 일이 무엇인가? 기아차 사건의 재발이 노동운동의 위기로 곧바로 연결될 수 있다는 위기 의식을 가졌다면 어떻게 아무런
자정 노력 없이 현대자동차에서 똑같은 비리가 다시 터져 나오게끔 사태를 방치할 수 있는가?
배
: 나 또한 양대 노총이 이번
사태를 너무 안이하게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민주노총과 관련된 비리 사건은 한국노총과는 궤를 달리한다. 오랜 기간 정부와 결탁하며 뒷거래를
누려 온 한국노총과 달리 민주노총은 내부 민주주의가 약화하면서 일부 간부들을 중심으로 도덕적 해이가 일어난 측면이 강하다.
그렇다고
민주노총이 면죄부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아차·현대차 채용 비리는 고 박종철군 고문 치사 사건이나 한나라당의 차떼기 파동처럼 조직
전반을 뒤흔들 수 있는 엄청난 사건이다. 이럴 때 ‘억울하다’는 식으로만 대응했다가는 노동운동이 더 고립되는 상황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전:더 큰 문제는 이 과정에서 노동자
스스로 노동운동에 등을 돌릴 위험성이 높다는 것이다. 현재 양대 노총은 정부나 매스컴이 사태를 악화하고 있다고 믿는 것 같은데, 외부에서
비판한다고 노동운동의 위기가 오는 것은 아니다. 위기는 내부에서 온다. 일반 노동자들이 권력화한 노조 지도부에 대해 위화감을 느끼고 나아가
노조가 왜 필요한지에 대해 회의하게 된다면 이것이야말로 진짜 위기가 될 것이다.
박:민주노총의
내부 민주주의가 약화한 데는 분열된 정파 구조의 영향도 크다고 본다. 과거 정치권이 그랬듯 오늘날의 노동운동은 끊임없이 돈을 요구하는 구조로
변모하고 있다. 과거 정치권의 보스가 자금을 조달해 자기 계보를 관리했던 것처럼, 대기업 노조나 상급 단체들이 현재의 정파 구조를 유지하고
발전·확대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돈이 필요하다.
그러다 보니 이들이 권력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비리의 유혹에 노출될 가능성은 점점 커진다. 이번에 기아차·현대차 비리에 연루된 것은 흔히 말하는 일반 간부가 아니다. 이른바
특정 정파에 속한 간부들이다.
배:한국노총도 선거 때면 엄청난 돈이
오간다고 들었다. 선거 때면 지방에서 올라온 대의원들을 고급 호텔에 모아놓고 비싼 술을 접대하는 관행이 이어지다 보니 입후보자들은 천문학적인
돈을 쓸 수밖에 없다. 이같은 돈 선거 양상은 산별연맹 아닌 단위 노조에서도 나타난다. 어떤 버스 회사에서는 노조위원장이 되는 데 1억원을 써야
한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들린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1차적인 이유는 위원장 개인에게 너무 많은 권한이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중앙집행위원 등이 있지만 감시 기능은 말뿐이다. 이를
막기 위해 회계 감사를 집중 강화할 필요가 있다. 6개월에 한 번씩 감사 결과를 보고하고, 비리 노조에 대해서는 시민단체 등이 참여한 외부
감사를 의무화하는 등 비리가 싹틀 여지를 원천 차단할 수 있는 감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박
: 노동운동의 위기가 도덕성 해이에서 비롯했다고 단순 판단하면 곤란하다. 요즘 보면 노조는 청정 지역에서 살아야 한다는 식의
희한한 이데올로기를 유포하는 언론들이 있는 것 같다. 이런 언론들은 겉으로는 노조를 위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노조를 없애고자 한다. 이는
위험하다. 비리는 비리대로 엄격하게 다루되, 노조를 도덕적으로 절대화해서는 안된다.
그보다
오히려 나는 노동운동이 사회적 연대의 가치를 스스로 저버렸기에 오늘의 위기를 자초했다고 본다. 곧 비정규직·중소기업 노동자 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끌어안을 수 있는 새로운 이념적 좌표를 세우지 못했기에 노동운동이 스스로 고립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배:가장
큰 문제는 대표성 위기이다. 현재 양대 노총은, 이들의 도움을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비정규직·중소기업 노동자들을 조직화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양대 노총이 대표성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무엇보다 기업별 노조의 틀을 깨고, 대기업 정규직 노조에 집중돼 있는 물적·인적 자원을 재배분해야
한다. 대기업 노조들로서는 억울한 측면도 있겠지만, 이들이 자기 것을 먼저 내놓아야만 문제가 풀릴 수 있다.
박
: 그렇다고 산별 노조가 만병 통치약인 것은 아니다. 한 예로 이미 산별 노조가 구성된 보건·의료·금속 노조 등을 보라.
이들이라고 비정규직 문제의 해법을 제대로 찾고 있는가? 그건 아니다. 오히려 산별 노조로의 이행은 대단히 시간이 걸리는 문제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따라서 자칫하면 산별 노조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현안으로부터 도피하는 길이 될 수도 있다.
지금의 기업별 노조 체제로도 할 수 있는 일은 많다. 대리 교섭, 연대 임금 정책 계발 등 당장 자기
사업장 내부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일부터 나서야 할 것이다.
전:노조의 힘은 조직률에서 나온다.
일단 노동 운동이 비정규직이나 영세 사업장 노동자들을 조직화하는 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나아가 나는 이번 기회에 양대 노총이
통합되기를 기대한다. 두 개의 노총이 있는 이상 부패의 사슬은 끊어지기 어렵다. 이를 이용하려는 정부와 자본의 유혹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기회에 양대 노총이 갖고 있던 각자의 기득권을 내려놓는 획기적인 결단을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영국
노동자들은 대처 전 총리가 영국병을 고치겠다고 노조에 칼을 대고 나서자 살아 남기 위해 통합을 이뤄냈다. 그 결과 조직의 힘도 강해졌다. 현재
영국 산별 노조 가입자 수는 적게는 20만~30만 명, 많게는 1백30만명에 달한다.
배:노동 운동의 진짜 위기는 2007년에 올지도 모른다. 2007년부터 복수 노조가 허용되고 노조 전임자에 대한 임금 지급이 금지되면 노동 운동은 또 한 차례 심각한 위기를 맞을 것이다. 어쩌면 중소 기업 노조는 생존이 위태로워질 판이다. 일본의 노동 운동도 복수 노조 허용 조처 이후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른바 제2노조가 등장하면서 좌파 성향의 노조, ‘센’ 성향은 노조들은 줄줄이 깨져 나갔다. 우리도 이같은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양대 노총은 향후 전개될 이같은 사태가 노동 운동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에 대해 제대로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지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