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서울시장이 ‘청계천 재개발 사업 비리’ 회오리에 휘말리면서 한나라당내 ‘대권 삼국지’의 줄거리가 바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명박 서울시장 측근들에게 대권으로 가는 모든 지름길은 청계천으로 통한다. <황강에서 북악까지>라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자서전을
빗댄 ‘청계천에서 북악까지’라는 말도 돌았다.
이렇게 청계천은 이시장에게 대권 가도의 디딤돌이었다. 오는 10월1일 치러질 준공식에만도
16억원을 쏟아 붓는다. 자연스럽게 10월 대망론도 퍼졌다. 청계천에 물이 흐르면 지지율이 상승하고, 이명박 대세론이 형성될 것으로 측근들은
보았다. 하지만 검찰 수사로 이런 계획에 차질을 빚게 생겼다. 디딤돌이었던 청계천이 걸림돌로 바뀌면서다.
한나라당 대권 삼국지의
주인공이었던 이명박 시장이 흔들리고 있다. 재·보선 결과와 겹치면서 박근혜 대표·손학규 경기도지사와 각축하는 당내 대권 판도에도 지각 변동이
일어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당내에서는 대권 삼국지의 줄거리가 바뀌는 ‘복선’이라는 조심스런 전망도 나온다. 각 진영에서는 이번 검찰 수사의
득실을 따지느라 분주하다.
손학규 지사는 ‘반사 이익’
암초를 만난 이시장이 주춤하는 사이, 가장 큰 반사 이익은 손학규 경기도지사가 얻었다. 박근혜 대표측이나
이명박 시장측도 이를 인정하는 분위기이다. 우연인지 양윤재 부시장이 검찰에 체포된 날, 손지사는 언론의 눈길을 모았다.
지난 5월7일 손지사가 공식 회의에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파격을 보였기 때문이다. 웬만한
일에는 얼굴을 붉히는 법이 없고 논리 정연한 손학규 지사가 이 날은 얼굴이 벌개졌다. ‘실세 총리’ 이해찬 총리와 수도권 발전대책을 논의하다가
손지사가 “정부의 기만적인 수도권 대책에 단호히 맞서겠다”라며 회의 도중 자리를 박차고 나간 것이다.
박근혜 대표에 비해서는 대중성이 떨어지고, 이명박 시장에 비해서는 결단력이 부족하다는 평가가 많았던 손학규 지사가 이 날 보여준 파격은
뉴스가 되기에 충분했다.
손지사측에서는 이번 기회를 전환점으로 삼는 분위기이다. 그동안
손지사는 정치 현안에 대해 ‘묵언수행’을 해왔다. 자기 목소리를 내기보다 경기도지사로서 직무만 묵묵히 수행해 온 것이다. 실적을 쌓다 보면
지지율 상승은 시간 문제로 여겼다. 그러나 지지율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한때
도지사 재출마설까지 나돌았다. 손지사측 사정에 밝은 인사에 따르면, 일부 참모들이 도지사 재출마 카드를 제시하며 ‘차차기’를 준비하자는 의견을
냈다. 그러나 개헌이 되어 중임제가 되면 8년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차차기’는 영원히 멀어진다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고 한다.
하지만 이해찬 총리와 대립각을 세우며 공세 모드로 돌입하면서, 손지사측은 묵언 수행을 끝냈다. 행정수도 특별법에 대해 박근혜
대표와 보조를 맞추며 반대파를 향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번 파격을 두고 당내에서는 ‘손학규 스타일이 바뀌었다’고 말한다. 손학규 지사측 관계자는 “앞으로는 정치
현안에 대해 종종 발언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반사 이익을 얻었지만, 손지사측의 가장 큰 근심거리는 역시 낮은 대중성이다. 박근혜 대표측이나
이명박 시장측도 손지사 지지율에는 한계가 있을 것으로 본다. 그렇다고 두 진영이 마냥 안심하지는 않는다.
한나라당 밖에서 일고 있는 뉴라이트 운동과 손지사가 손을 잡으면 판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고 본다. 그렇게 되면 손지사
지지율 상승은 시간 문제라는 것이다.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대권 주자 가운데 뉴라이트와 이념과 노선이 가장 맞아떨어지는 주자는 손학규
지사다”라고 말했다.
입지 굳힌 박근혜 대표, 보폭
확대
이명박 시장과 대선 주자 1,2위를 다투고 있는 박근혜
대표도 당분간 입지가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명박 시장측과 손학규 지사측은 요즘 진공 청소기에 가까운 박대표의 대중 흡인력을 실감하고 있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가 지난 5월10일 실시한 조사에서 박근혜 대표의 직무 수행 지지도가 61.3%로 치솟았다.
이시장측이나 손학규 지사측은 열린우리당의 실정과 재·보선 영향이라고 평가한다. 일시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박대표의 직무수행 지지도가 상승한 데는 재·보선이 영향을 크게
미친 것이 사실이다. 지지율 변동 추이를 보더라도, 지난해 총선 이후인 5월 지지율이 73.5%였다가 계속 하락했다. 수도권사수투쟁위원회
의원들과 가파르게 대립하면서 4월13일 조사 때는 직무 수행 지지도가 47.4%까지 내려갔다. 그러다 재·보선을 거치면서 20% 가까이 치솟은
것이다.
다른 두 진영은 박근혜 대표의 이같은 장점이
곧 단점으로 바뀔수 있다고 본다. 감성에 호소하는 ‘박근혜식’ 지지율은 기복이 심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박대표 진영도 이른바 실적을
쌓는 탄탄한 지지율 올리기에 주력하고 있다. 당분간 국내 현안보다는 국제 현안을 다루면서, 지도자로서 보폭을 넓힐 심산이다. 지난 3월 미국을
방문한 데 이어, 이달 말에는 중국을 방문할 계획이다.
파죽지세 형국인 박대표는 당내 반박(反朴) 그룹에 대해서도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나아가 원론적인 수준이었지만, 고건 영입론에 대해서도 찬성했다. 이같은 태도는 이제는 누구와 경쟁하더라도 자신 있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졌다.
행정복합도시 특별법 문제로 박대표의 지도력이 흔들릴 때만 해도 박대표는 끝났다는 말이 두 진영에 돌았다. 킹메이커론이
조심스럽게 거론되기도 했다. 박대표가 대권 주자로 나서기보다 이명박·손학규 둘 가운데 한 명의 손을 들어주는 킹 메이커 역할에 그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재·보선이 끝나면서, 양 진영에서는 박대표에게 붙였던 ‘메이커’라는 꼬리표를 뗐다. 이제는 박대표가
‘킹’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오히려 박대표측이 추진하는 당의 체질 개선을 경계하는 처지가 되었다. 박대표측은 여당의
기간당원제와 흡사한 책임당원제를 도입하고, 박사모를 당내로 흡수해 상시적인 박풍을 일으킨다는 복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박대표가 넘어야 할 산도 높다. 바로
다가올 과거사 정국이다.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검은 그림자가 박대표를 휘감을수 있기 때문이다. 한 당직자는 “박대표도 살아 돌아와야 한다.
이시장이든 누구든 살아 돌아온 사람이 주자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검찰 수사로 곤경에 처한 이명박 서울시장측은 일희일비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길게 보며 대처하겠다는 것이다. 이시장측은 일찌감치 ‘검풍’을 예상했었다. 이시장과 가까운 복수의 관계자에 따르면, 이미
3개월 전에 검찰의 움직임을 파악했다. 이시장과 가까운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지난 2월 이시장을 만나, 검찰이 양부시장을 내사하고 있어 문제가
될 것 같아 인사 조처를 하라고 건의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시장은 양윤재 부시장의 결백을 확인했고, 재신임했다고 한다. 또 다른 관계자는
“그때 낙마시키면, 혐의 사실을 인정하는 꼴이 되어서 지켜보자는 쪽으로 결론을 냈다”라고 말했다.
한나라당 의원
“청계천 수사, 제2 병풍 될 것”
그래서 이시장측은 지금도 재판 결과까지 지켜보자며 양부시장의 결백을 확신하고 있다. 하지만 검찰 수사에 따라, 이시장은 참고인 자격으로
소환 조사를 받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적지 않은 타격을 입을 공산이 크다. 불도저에서 ‘문화 컴도저(컴퓨터+불도저)’로 이미지 변신을 하고
있는데, 건설 복마전이라는 전형적인 아날로그형 비리가 터졌기 때문이다.
이시장측 관계자는 “내년에 터지는 것보다는 낫다. 회복할 충분한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라고 말한다. 이런 발언의 배경에는 이시장 스스로
결백하다는 자신감이 있다. 서울시 행정부시장 출신인 한나라당 정두언 의원은 “두고 보라, 역풍이 불 것이다. 청계천 수사는 제2의 병풍이다”라고
말할 정도다.
하지만 비관적인 전망도 있다. 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이시장
지지율은 추진력과 실적을 토대로 했다는 점이 강점이었다. 그런데 그 실적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청계천 사업에서 비리가 발생했다는 점에서 회복
자체가 어려울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겉으로는 박근혜 대표나 손학규 지사쪽 모두 이명박 시장을 엄호하고 나섰다. 두 진영 모두
청계천 물로 ‘오일 게이트’를 덮기 위한 물타기 수사이고, 야당 탄압이라고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하지만 박근혜 대표나 손학규 지사의 속내는
복잡하다.
친박 진영의 한 당직자는 “겨우 차떼기 당 이미지를 벗었는데, 또다시 청계천 복마전에 빠져 또 차떼기 이미지가
되살아날까 걱정된다”라고 말했다. 지난 5월8일 검찰이 양윤재 행정부시장을 전격 구속하면서 시작된 청계천 수사가 이처럼 한나라당의 대권 구도에
미묘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