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간 호찌민 시 작가회의 의장 지낸 응우옌 꽝 상 인터뷰
응우옌 꽝 상(73)은 종전 후 25년 간 호찌민 시 작가회의 의장을 지냈다. 메콩델타 출신인 그는 열네 살 때부터 프랑스에 대항하는 베트민(1940년 호찌민이 결성한 베트남독립동맹) 활동을 시작했다. 그가 독립 투쟁 정신을 기르게 된 데는 당시 보석상을 하며 베트민 조직을 지원하던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1954년 독립이 되면서 그는 북 베트남(월맹) 정부에 ‘발탁’되어 북쪽으로 가게 되었다. 베트남전 때는 호찌민 트레일을 타고 남북을 왕래하며 문화선전대 요원 겸 종군 기자로 활동했다. 지난 3월18일 자택으로 찾아갔을 때 그는 해방 30주년 기념 문화대회 조직위원장으로 분주한 모습이었다.
프랑스에 저항하는 게릴라 활동을 하다가 1954년 독립 후 북 베트남으로 갔는데, 분단을 예상했었나?
당시 내 가족은 전부 사이공에
있었고, 나만 올라갔다. 예상을 안 한 건 아니다. 난 지금도 공산주의자라고 자처하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건 독립이었다. 미국을 몰아내야 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종국에는 우리가 승리하리라는, 그러면 고향에 갈 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버텼다.
돌이켜 보면 미국과의 전쟁은 프랑스와 싸웠던 독립 전쟁의 연속이었던 것
같다.
두 전쟁이 다 독립 전쟁이기는 했는데 끔찍함에서는
서로 비할 바가 아니었다. 내가 메콩의 정글에 살 때는 만돌린을 켜며 놀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한번은 프랑스 군인이 잡혀왔는데, 우리는 그와
같이 밥을 해 먹고 낚시질하며 지냈다. 항미 전쟁은 다시 떠올리기도 싫다. 폭격이 심할 때는 바로 옆의 동료가 죽고, 다음 날엔 뒤에 섰던
동료가 죽었다. 호찌민 트레일에서 문화선전대로 같이 일했던 예술가 10여명 가운데 3분의 2가 전사했다.
전쟁 기간에 주로 어디에 있었나?
1966년 호찌민 트레일을 통해 꼬박 두 달 반을 걸어 남쪽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6년 간
메콩델타의 정글에 머물러 있었다. 당시 난 종군 기자였다. 주로 남 베트남의 정치 상황 변화를 보고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종전 후 집으로 돌아갔을 때 감회가 어땠나?
어릴 때 헤어진 막내 남동생이 가장 보고 싶었다. 1972년 북쪽으로 다시 올라갈 때
동생을 꼭 한번 보고 싶어 집에 갔지만 볼 수 없었다. 그래서 1975년 종전되자마자 집에 도착해 동생 안부부터 물었다. 그때서야 아버지로부터
동생이 남 베트남군에 징집되어 내가 동생을 찾던 바로 그 1972년에 꽝치 성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거기가 남북간 교전이 가장 심한
지역이었다.
베트남전은 기본적으로 대미 항쟁이었지만 남북 간의 내전이기도 했는데.
정말 끔찍하고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우린 전쟁을 피할 다른
도리가 없었다. 월맹군은 정신적으로 완전히 무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월남 정부는 아무 것도 모르는 젊은이들을 징집해 놓고 훈련도 제대로 시키질
않았다. 누구를 죽여야 하는지 모를 정도로 의지가 약했다. 내 동생도 그렇게 죽어 갔다.
종전 후 남쪽의 공산주의자들은 북부가 주도한 급격한 사회주의체제 이식에 반대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남부인들은 오랫동안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아오지 않았나.
그렇다. 맞는 얘기다. 남부인들에게 충격을 주지 않기 위해 유연하고 단계적인 조처가 필요하다는 논의가 있었다. 폭격으로
수송 수단이 다 파괴되어 사이공에는 쌀이 동 나 있었다. 전쟁의 폐해를 복구하는 일이 더 시급한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실정에 맞지 않는 제도가
들어선 것이다.
통일 이후 많은 책들이 금서가 되는 등 남쪽에서 사상 통제가 심했다고
들었다.
그 시기 우린 ‘쓰나미’에 휩쓸리고 있었다. 거스를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엄청난 격랑이 밀려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자연의 이치이다. 가령 구미 진영의 소설책은 물론이고 남 베트남의 유명한
반전가수였던 찐 꽁 썬의 노래책을 소지하는 것도 불온한 행위로 간주되었다. 나 또한 그의 노래 테이프를 집안 깊숙이 숨겨두어야 했다.
베트남 지식인들에게 요즘 상황은 어떠한가?
그 시기에 비하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 셈이다.
남부인으로서 북부인들에 비해 남부인들에게 전쟁의 상흔이 더 깊다고 느끼지
않는가?
그 점에 대해서는 한 가지 유의할 사항이 있다.
남부인이라도 어느 쪽에 있었느냐에 따라 다르다. 전쟁에는 승자와 패자가 있기 마련이다. 피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내가 승자라 말할 때는
기본적으로 ‘미국에 대한 베트남의 승리’라는 맥락에서 말한다.
엄청난 대가를 치렀지만 어쨌든 베트남은 통일되었다. 남북한의 상황을 어떻게
보는가?
한때 베트남은 같은 공산 국가로서 북한과 친했다.
하지만 지금은 남한과 더 가까워져 있다. 북한의 현 실정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노 코멘트’다. 통일을 이루기 전에 서로 다른 정치 체제를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관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