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비평]
얼마 전, 누가 요즘 무슨 책이 재밌더냐고 묻기에 <헬무트 뉴튼 자서전>을 권했다. “헬무트 뉴튼이 누군데?”라고 그는 물었다.
나는 약간 잘난 척하며 “보그의 사진 작가야”라고 말했다.
그는 두 가지 점에서 놀란 눈치였다. 내가 <보그>의
사진작가 이름까지 꿰고 있다는 것, 그리고 <보그>의 사진작가가 자서전을 낸다는 것이었다. 전통적인 지식인인 그가 보기에
<보그>는 그저 시답잖은 여성 패션지에 불과하고, 거기 실린 사진이라는 것도 의류 브랜드의 카탈로그와 다를 바 없는 상업 사진이었을
것이다.
먼저 첫 번째 궁금증에 답했다. 그 책을 읽기 전까지는 나 역시 헬무트 뉴튼이라는 작자가 누군지 몰랐다고 말했다.
책을 사서 읽을 무렵, 그의 사진전이 열리기도 했고, 그 사진전의 주제가 ‘빅 누드’라기에, 그것도 전설적인 패션 모델들의 누드라기에, 비싼
입장료를 지불하고 전시를 관람했던 것이고, 물론 자서전도 그 무렵을 즈음하여 읽었고. 어쨌든 그래서 나는 팔자에도 없이 헬무트 뉴튼이라는 패션
사진작가를 알게 되었다고.
두 번째 궁금증. <보그>에 실릴 사진을 찍던 사진가도 자서전을 내는가. 실은 그게 이 글을 쓰게
만들었다고도 할 수 있다. 첫 번째 궁금증에 비하면 여기에는 훨씬 의미 심장한 그 무엇이 있다.
세월 따라
달라지는 자서전의 유행
아마 사람마다 요즘이 어떤 시대인지를 가늠하는 나름의 요령이 있을 것이다. 나는
전기나 자서전을 통해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살피는 쪽이다. 1980년대에는 혁명 영웅들의 전기가 인기였다. 호치민이나 마오쩌둥 등의 전기를
읽었다.
얼마 전에는 잠깐 체 게바라의 전기가 유행하더니 요즘은 달라졌다. 우선은 경제인들의 전기가 압도적으로 많아졌다.
빌 게이츠나 잭 웰치, 전설적 투자자 워렌 버핏 등 억만장자의 전기는 서점 어디서나 쉽게 만날 수 있다. 그거야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글로벌
경제 환경에서 당연한 것이라고 치자. 의외는 헬무트 뉴튼과 같은, 그야말로 세상이 천대하던 부류의 인물들을 다룬 전기와 자서전일 것이다. 그들은
대체로 ‘상업’ ‘광고’ 등과 친밀하고 시대의 담론을 선도하는 지식인들로부터 냉대받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마디로 장사꾼이나 건달에 가까운
대접을 받던 이들이 20세기 말과 21세기 초에 돌연 미운 오리에서 백조로 변신하고 있다.
지금 내 책상에는 향수 장사 장
폴 겔랑의 자서전인 <향수의 여정>이 놓여 있다. 5대에 걸친 향수제조업자의 집에서 태어난 장 폴 겔랑. 3천여 가지 향의 미묘한
차이를 구분할 수 있는 타고난 후각으로 유명했고 ‘삼사라’ ‘베티베’ 같은 전설적인 향수를 직접 만들어내기도 한 사람이지만, 어쨌든 한 명의
향수업자에 불과한 그의 자서전 가격은 무려 2만8천원이다(내 책 값의 네 배다). 그리고 그 자서전은 한국 외국어대 불어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박사를 마치고 프랑스 브장송 대학에서 수학한 분이 번역했다. 예전 같으면 알베르 카뮈나 앙드레 지드의 책을 번역하고 있었을 이
불문학 박사께서 이제 향수업자의 자서전을 번역하고 있는 것이다.
모르긴 해도 곧 조르지오 아르마니나 크리스티앙 디오르 같은
인물들의 전기나 자서전이 출간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상당한 판매고를 올릴 것 같다. 작가나 철학자와 같은 활자 시대 스타들의 자서전은 점점
출간이 뜸해지고 있는 반면, 디자이너·사진가·화가 같은 이미지 시대 스타들의 인생이 더 자주 전기 문학의 소재로 등장할 것이다. 정치가와 부자,
혁명가와 지식인 들이 분점하던 전기의 카르텔은 조금씩 깨지고 있다. 이미지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더니, 그 예언이 어느새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