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전 <대화> 펴낸 리영희 교수
‘사상적 스승’ VS ‘의식화의 원흉’.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의 저자 리영희 교수를 둘러싼, 극명하게 엇갈리는 평가다. 그는 가족이 모두 월남했고, 6·25 전쟁 때 입대해 만 7년간 통역 장교로 연장 복무한 끝에 무공 훈장까지 받은 예비역 소령이고, 1960년 미국 대학에서 저널리즘 연수를 한 외신 기자 출신이다. 친미 반공주의자가 될 만한 여건을 고루 갖춘 셈이다. 그런데도 그는 부패와 폭력이 지배하는 군을 혐오했고, ‘아름다운’ 미국 뒤에 숨은 패권주의와 자국이기주의를 까발렸고, 그 하수인인 남한의 독재 정권을 비판했다. 냉전과 반공의 두터운 벽을 넘어 진실을 추적하고 세상에 알린 대가는 혹독했다. 두 번이나 언론사에서 해직당했고, 마흔을 넘겨 시작한 교수 직에서도 두 번이나 쫒겨났다가 복직했다. 그러는 와중에 여러 차례 투옥됐고, 1977년 겨울에는 검찰의 기소장을 받아든 날 모친이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접했지만 끝내 발인조차 지켜보지 못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모든 것이 ‘야만의 시절’에 벌어진 일이었다. |
세상이 좀 달라지고 정년 퇴직도 했으니 비로소 개인적인 삶을 즐기고 싶다던 그가 쓰러진 건
2000년 11월. 70 고개를 막 넘으려는 순간 느닷없이 뇌출혈, 이른바 중풍이라는 손님을 맞이한 것이다. 신체의 우반신이 마비되고 사고도
혼미해지고 언어의 장애도 찾아왔다고 했다. 서서히 회복되어 걷기나 말하기에는 별 지장이 없지만, 오른손의 떨림과 손가락 마비는 풀리지 않아 집필
활동은 못한다고 들었다. 그런 그가 얼마 전 <대화: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한길사)이라는 책을 펴냈다(손놀림도 불편하고 기억력도
시원치 않다면서 자서전 집필을 고사하는 그에게 출판사는 문학평론가 임헌영씨가 질문을 던져 기억을 환기시키고 독자의 관점에서 궁금한 것을 묻는
방식으로 진행하자고 간곡히 설득했다고 한다).
약속 시간을 넘겨 경기도 산본시 수리산 자락의 아파트를 찾았더니 초인종을 누를 필요도 없이 현관문이 열려 있었다. 거실 쪽에서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텔레비전 화면에 노래방 자막이 흘러가고 있었다. 부부가 한 쌍의 잉꼬처럼 노래를 부르던 중이었다. 혈색이 참 좋아보인다고 했더니 인근의 온천에 다녀왔단다. 장애인 3급 표시가 붙은 차량을 직접 몰고서. 불편한 오른손과 발은 보조로만 쓰고, 주로 왼손과 발을 사용하는데, 운전은 중추신경과 물리적 운동기능을 일치시키고 근육운동을 돕는 탁월한 재활 수단이란다. 환갑이 넘어서야 배운 운전인데 요즈음 그 덕을 톡톡히 본다고 자랑이다.
구술로 그 방대한 분량의 책을 집필하려면 꽤나 번거로웠을 텐데요.
몇십 년 자기 손으로 쓰던 사람이 대담 형식으로 구술을 하려니까
어렵지. 아, 정말 애를 많이 먹었어요. 내용과 문법적 구성과 문장미가 글을 쓸 때처럼 안돼요. 정리해놓은 걸 보면서 다시 자료를 찾아 연월일과
사람 이름을 확인하곤 했지. 손놀림이 불편하니까 백과사전이나 단행본 논문을 들춰보기도 어렵고, 찾아도 어디 메모가 제대로 되나? 거의 그리는
수준이지. 왼손으로 오른손을 붙잡고 겨우겨우. 그래도 이왕에 시작한 일 완벽하게 해야지, 자다가도 ‘조사 -은보다 -가가 낫겠다’ ‘그때 그
사람이 이랬던 것 같다’ 싶으면 벌떡 일어나서 그 추운 겨울밤에 서재에 가서 고쳐야 직성이 풀려요. 그러니 작업 시간만도 2년이나 걸렸지. 집
사람이 재발할까 봐 굉장히 걱정했어요. 그때도 그러다 쓰러진 거니까.
(5년 전에도 그는 대학 학보사에 보내는 강연 원고를 마감에
쫒겨가면서 손질하다가 서재 책상에 엎드려 쓰러졌다.)
그러니 예전에는 오죽했겠습니까. 언론사 재직 시절 주변에서 많이 피곤해
했다는데.
나 자신도 들볶았지만 주변도 굉장히 피로하게 만들었지. 그러니 정권은 또 얼마나 피곤했겠어, 하하하. ‘의식화의 원흉’이라고
하게도 생겼지, 뭐. 치밀하고도 정확하게 필요한 고증과 자료를 다 집어넣고 그동안 알려지지 않거나 감춰놓은 걸 다 폭로해 냈으니. <남북한
전쟁능력 비교연구>라는 논문을 써냈을 때의 일인데, 어느 눈오는 날 아침에 문 열고 나가보니 눈이 소복히 쌓인 안마당에 봉투가 하나 떨어져
있어. 뭔가 봤더니 군하고 정보부하고 합동으로 회의를 열어 내 논문을 일일이 검증하고 검토한 기록이라. 2급 비밀 딱지가 그대로 찍힌 채로 와
있더라구. 그 안에서도 내게 동조하고 공감한 사람이 있었던 게지. 그 논문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날 고발했어요. 물론 모든 기관에서 다 검토를
했지만 시비를 못 걸었지. 모든 걸 완벽하게 했으니까. 우리 자료가 아니라 미국 정부의 최고급 극비 문서를 가지고 썼으니까.
(기자 시절 ‘도서관에서 가장 책을 많이 빌려보는 기자’로 알려졌던 그의 꼼꼼한 자료 섭렵과 치밀한 논증을 둘러싼 일화는 숱하다.
대표적인 것이 1978년 가을 반공법으로 수감되었을 당시 영하의 감방에서 아무 참고 자료도 없이, 심지어 문제가 된 자신의 저서도 차입받지 못한
상태에서, 종이 8장 사이에 먹지 7장을 끼워서 한 자 한 자 새기듯 작성한 2만4천2백자에 달하는 상고 이유서다. 그가 꼽는 최고의 저술이기도
하다.)
언론계 일각에서는 과거 정권보다 노무현 정부가 언론에 더 억압적이고 적대적이라는 비판의 소리도 있는데요.
몇
가지 예만 들어보면 되지. 그때 지금처럼 대통령의 이름만 부르는 식의 기사를 쓸 수 있었나? 대통령을 희화화할 수 있었나? 어떤 사회 현실
문제를 쓰고서 당장 그날 밤 중앙정보부에 체포돼서 고문당할 걱정을 안할 수 있었나? 지금 이런 걸 썼다간 반공법으로 징역을 살지 않을까, 미리
자기 검열을 해서 위축되는 일이 있나, 이거지. 나는 지금 한국 언론계는 다소 자유를 착각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남용하고 있는 거야.
저널리스트가 스스로 가해야 하는 자기 규제와 절제, 책임, 정확성 같은 게 전혀 없어. 이런 것에 대해 정부가 반론을 제기하면 자유의 억압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건 언론 쪽에 문제가 있는 거지 정권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예요.
책에 군사 정권의 고문자들을
‘사디스트’라고 표현했던데...
사디스트지. 고문뿐만이 아니야. 모든 독재 정권의 집행자들이란 건 사디스트적 본성이 없으면 그걸 집행할 수
없으니까.
(그는 회고록에 30년 세월이 흘렀지만 자기가 끌려갔던 남영동 대공분실 자리를 지날 때는 절로 고개를 돌리게 된다고
술회했다.)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는 정형근 의원의 경우 직접 고문을 하거나 지시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본래 그런 자들은
그렇게 말하는 거지, 뭐. 그걸 시인할 만한 인간들이 그런 짓을 하는가? 그런 건 얘기 할 건덕지가 안되잖아요?
국가보안법과 그 전신인 반공법으로 호되게 곤욕을 치렀으니 물론 폐지에 찬성하는
입장이겠지요?
(폐지)해야지만, 의석이 겨우 절반을 넘을까 말까 한데 무리수를 쓸
수가 있나. 시간과 대세를 살펴가면서, 여유 있게 너그럽게 힘을 운영해야지. 무리수를 써서 억지로 통과시켜 봐도 다음 총선에서 지고 다른 반대
세력이 정권을 잡으면 또 국회에서 바꿀 수 있다고. 그러니 총체적으로 정치를 잘해서 국민의 지지를 얻어서 다수당이 돼야지. 이제는 군부 독재
때처럼 무리수를 쓰면서 전면 투쟁하고 그런 과정을 통해 목적을 달성하고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시대가 아니란 말이에요.
요즘 한·일에 문제가 안팎에서 최대 쟁점입니다. 그토록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한·일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자꾸 도지는 근본 이유가 뭘까요?
해방되면서 친일파와 민족 반역자를 정화하지 못하고
일본 지배의 유제를 그대로 유지했다는 데 문제의 뿌리가 있는 거지. 독일처럼 다 청소하거나 혁명을 해서 그 세력을 다 처단했더라면 이런 일이
생기질 않아. 아니, 법률·인간·제도·사상·문화 모든 분야에서 일본 걸 그대로 쓰면서 어떻게 일본에 대항할 수 있고, 주체적인 자세를 취할 수가
있나? 그런 근본 문제가 있는 가운데서나마 뭔가 제대로 고쳐나가려면 우리 국민의 근성부터 고쳐야 한다고 봐요.
일본이 아니라, 우리 국민의 근성 말인가요?
정부까지 포함한 전체 국민의 행동 양식에서 흔히 나타나는 ‘냄비 근성’ 이 문제예요. 냄비적 천박성! 이번
일(시네마 현의 ‘다케시마 선포일’)만 하더라도 떠드는 것만큼의 속이 있다면 딱 한 달만이라도 일본 상품 불매운동을 전국민이 해보여야 하는
거야. 중국은 1921~1922년에 일본으로부터 능멸을 당하자 일본 상품 보이콧 운동을 전면으로 벌였어요. 그런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정신 상태가
있어야 해. 일본에 가서 뭐 이러자 저러자들 하는데, 그거 며칠 갈지 모르겠어. 난 손가락 자르는 따위의 행동을 아주 멸시해요. 아무 의미도
없는 짓이야.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압도적인 군사적 압력을 견디어낸 영국인들의 뚝심, 여기에 일본인의 치밀한 지략을 함께 발휘해야 해.
우리는 뚝심도 없고, 긴 안목에서 국가의 전략을 짜나가는 능력을 갖고 있지도 않아. 그게 문제야.
노대통령의 첫 방미 직후 강한
어조로 외교적 미성숙을 지적해 화제가 됐는데.
그랬댔지. 좀 싫은 소리를 했더니 신문들이 일제히 받는 바람에... 정신이 똑바로 든
한국인이 보기에는 그 하나하나가 못마땅했지. 케네디-박정희 회담도 떠오르고. (리영희는 5·16 직후 박정희 국가재건회의 의장이 미국을 처음
방문할 때 수행 기자 3인 중 한 명으로 특파되어 ‘조속한 민정 이양과 한·일 국교 정상화를 미국측이 박정희 정권에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특종 보도했다. 그는 이때 일을 책에 이렇게 술회했다. ‘케네디는 흔들의자에 두 다리를 쭉 뻗은 채 누운 듯이 앉아서 가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박정희라는 인물을 관찰하듯 지긋이 바라보아요. 한편 박정희는 주한미군들이 애용하는 레이밴이라는 금색 도금 테두리의 짙은 색안경을 끼고, 빳빳한
등받이 의자에 앉았어... 그러고 보면 박정희의 짙은 안경은 자기 열등의식의 표시이고 강자 앞에서 서게 된 약자의 정신적 동요를 감추기 위한
장치였던 것 같아.’)
요즈음은 뭐라 안 그러시네요.
미국에 대해서도 뭔가 할 소리는 하는 자세를 취하니까. 일본에 대해서도
그렇고. 지난번 무슨 사관학교 연설은 특히 인상적이었지. 어떤 의식의 전환이랄까, 국제 감각, 동북아와 한반도의 위기 상황과 그 구조에 대한
인식이 깊어졌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싶어. 결과적으로 이라크에 파병을 조금은 해놓았기 때문에, 큰소리, 아니 큰소리까진 아니고 조금 제
목소리를 내게 되는 게 아닌가 하는 거지. 난 이라크 파병에는 물론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전쟁을 그토록 강력히 반대하는 건 6·25의 경험 때문인가요?
전쟁을 한번 겪고 나면 모든 것이 무효로 돌아가고, 뒤틀리고, 깨어지고 무가 되어버리기 마련이에요. 전투
현장에서 일어나는 비극보다는 전쟁 뒤 대중의 생활과 그 사회의 구조적 기능적 틀이 파괴되는 양상이 더 참혹하지요. 전쟁은 절대로,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도, 합리화될 수도 없어요. 설사 통일을 가져온다 해도 나는 절대 반대요. 그것이 나의 신념이야. 한국 사회에서 광적인
반공주의자나 극우적 사고 방식을 지닌 이해관계 집단들은 6·25 전쟁이 끝난 지 5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북한과의 전쟁이나 군사적 대립을 국가와
국민의 상시적인 삶의 기본 정신으로 고수하고 강조하곤 해요. 전쟁의 참혹함을 직접 체험한 인간들이 증오와 적대의 감정을 선동하는 걸 보면 나는
정말 울고 싶은 심정이 돼요.
현실적으로 미·일 간의 동맹과 중국을 견제하는 움직임이 더 활발해지고 있는데...
미국이 군사
전략의 초점을 과거의 소련에서 중국으로 전적으로 향한 게 벌써 한 20년은 되거든. 거기에서 남한이 구조적으로 그 졸개가 되어서 소위 남방 3각
군사동맹의 일원이 되어버리면 중국이 바로 남한에 대해서 어떤 조처를 취할 것인가는 너무나 분명하지 않아요? 그걸 미리 알고서 (노대통령이)
미국을 향해 우리는 그런 전쟁에 졸개가 될 생각이 없다는 의사를 표시한 거죠. 뭐,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하고 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렇다면
옳은 생각이라는 거지요.
동북공정 때도
드러났지만, 중국의 패권주의도 미국 못지 않잖아요?
그것하고 미국의 패권주의와는
성격이 좀 다르지. 다른 정도가 아니라 아주 다르지. 그건 지난 날 영토 관계 역사를 관련국마다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하는 거예요. 남한에 대해서
무슨 군사 공격을 가한다거나 가할 수 있는 게 아니죠. 그런데 미국의 패권주의라는 건 군사적으로 그대로 전쟁으로 행동하려는 거니까. 그것도
아무런 역사적 근거도 없이, 해석의 대립이나 착오 같은 여지가 없는 상대를 향해서 말이야.
자주나 균형 외교보다는 강력한 한·미
동맹을 선호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지난해 시청앞 집회에는 성조기를 들고 나온 시위 군중도 있었잖습니까?
극우 반공주의자들이 그런 거지.
무슨 교회 목사가 끌고 나왔다던가. 아주 극소수의, 의식이 깨인, 사회적 책임을 지는 기독교인을 제외하면, 난 아마 한 95%는 된다고
생각하는데, 예수의 가르침을 전혀 도외시하고 사회적 책임을 나몰라라 하는, 물질 숭배와 물신 숭배가 지배하는, 하느님 대신 돈을 떠받드는 거의
대부분의 거대 교회, 미국이라는 상전을 신성불가침으로 모시고 있는 정신적 예속 상태의 기독교인들이 정말 문제인 거야.
(극우·반공·친미·꼴통 기독교인에게 딱 들어맞는 수식어를 공들여가며 찾던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난데없이 ‘이게 뭐이야’라면서 조명
파라솔의 빨간 불을 신기하다는 듯 다가가 들여다보았다. ‘진짜 번떡번떡 빛난다’고 원단 평안도 사투리를 곁들여 가면서.)
냉전시대에 중국 혁명 연구의 개척자로서 중국 혁명에 대한 새로룬 관점을 제시했지만한편으로는 지나치게 미화한 감도 없지 않습니다.
문화대혁명의 부작용 같은 건 거의 언급하지 않았는데...
문화대혁명 시기 평가와 그후 실제적 검증 사이의 괴리는 전세계 중국 연구자들에게
거의 공통된 현상이지요. 특히 다른 외국의 학자들에 비해 월등히 열악하고 한정된 범위의 정보밖에 없던 내겐 그후 알려진 홍위병의 반문화적 파괴
행위나 여러 가지 부작용은 정확히 파악할 방법이 없었어요.
그는
작금의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과연 우리 사회가 20, 30년 뒤에 인간이 인간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사회가 될는지 회의스럽다고 했다.
사람 사이의 애정·신뢰·존경·연민·아픔을 함께하고 서러움을 함께하는 감정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고 한탄했다. 인간을 이데올로기적인 존재로만
여기는 극우 반공주의적 가치관과 물질적 가치만 지배하는 미국식의 ‘벌거벗은 자본주의’가 결합한 결과라고 그는 진단했다. “이게 인간이
사는 사회예요? 이런 사회가 어디 있어요? GNP가 얼마고 연간소득이 얼마면 뭘해? 전부가 사기, 속임수, 그저 기회가 있으면 돈 몇푼 때문에
뺏고 죽이고, 혈육끼리 죽이고 타인끼리 죽이고, 어휴.”
벌거벗은 자본주의의 폐해를 줄이는 길이 과연
있겠는가고 물었더니, 해법을 유럽식 사민주의에서 찾는다. 우리 사회도 사회주의적 제도와 가치관을 자본주의 제도나 가치관과 5 대 5, 6 대 4
정도의 거의 동등한 위상으로 받아들이는 유럽식 사회민주주의 쪽으로 가야 한단다. 자유와 평등의 조화로운 해결 지점을 어떻게든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 무거운 주제여서 화제를 다시 그에게로 돌렸다.
사람들은 왜 리영희로 표기하기를 고집하는지 궁금해 합니다.
우선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너무나 많아. 전화번호부를 들춰보면 서울의
경우는 한 스무 장이 넘어가. 나는 너무나 많은 사람 중에 한 사람이고 싶지 않아요. 나만의 존재 이유와 나대로의 생존 방식이 있으니까. 게다가
평안도 우리 고향에서는 서울 중심의 두음법칙을 안 써요. 문장의 시작이든 끝이든. 문음일치, 우리말의 순수한 형식을 지키는 거지.
그럼 호주제 폐지도 찬성하시겠군요.
물론이지. 나는 모든 집단적 멘탈리티를 싫어해요. 인간의 개별적·개체적인 정체성을
대중속에 매몰해 버리는 집단이 싫은 거야. 지역, 출신 학교 모두 마찬가지지. 호주제 폐지, 물론 찬성이지만 더 나아가서 개인이 성을 창시할 수
있기를 바라요. 세상에, 그 흔한 성 몇 가지로 인간의 개별성이 분류되고 매몰되는 게 말이나 되오?
엄청난 육체적 시련을 겪으면서 뭔가 새로운 깨달음이 찾아왔나요?
첫째는 내 성격에 대한 쓰라린 회한, 가슴 아픈 반성을 하게 된 거죠. 내가 무슨 일을 차분하게 하지
못하고 성격이 참 급해요. 할일을 놔두다가 며칠 사이에 막 몰아쳐서 하니까 스트레스로 쓰러졌거든. 또 하나, 완벽주의! 아주 꼼꼼하고 정밀하고
치밀하게 작업하는 편이거든. 그런 특성이 특종도 하게 만들어 주었고 기능적 인간으로는 큰 장점이었지만, 자연인으로는 큰 결점이었다구요.
마지막으로는 욕심이 지나쳤고.
욕심이라뇨?
국민을 계도하려는 욕심이 지나쳤어. 일곱까지만 하고 나머지 셋은 알아도 놔두어야
하는데, 이걸 끝까지 밝혀 알리려고 했어요. 인간이란 자기 능력의 한계를 알아야 하는 거요. 웬만큼 했으면 그만둘 줄도 알아야 하는데 끝없이
추구하려는 지적 탐욕, 이게 과했던 거요. 어느 정도 나이가 되고 어느 만큼의 일을 하고 나면 사람은 놓을 줄을 알아야 해. 권력, 재산,
성취욕, 지적 욕심, 다 쥐고 있었잖아. 그걸 가슴에서도 놓고, 손에서도 놓고, 머리에서도 놓고, 대우주와 같은 존재와 일체화하는 것이요.
한마디로 노자(老子)의 무위!
모든 것을 내려놓기 위해 그는 아끼던 책들도 연구소나 필요한 사람들에게
거의 다 나누어주고, 서재의 책상도 들어내고, 구독하던 잡지도 다 끊고, 겨우 신문이나 본다고 했다. 독재정권 시절 해직 교수 문인들과 ‘거시기
산악회’를 만들어 이곳저곳 명산을 쫒아다니면서 울분을 달랬던 그이지만 몸이 불편해진 뒤로는 ‘수직 이동’은 하지 않고 ‘수평 이동’만 한단다.
“그래도 요즘처럼 날씨가 좋은 날에는 지금쯤 설악산·지리산에서 텐트 치고 소주병 까먹고 앉아 있겠구나, 상상하게 되지.
뭣보다도 그게 제일 부러워.”
그는 시종일관 유머를 잃지 않았다. 쉬임없이 셔터를 눌러대는 카메라 기자에게
자기가 언론사에 근무하던 시절엔 사진부장이 군용 필름을 조금씩 잘라서 넣어주었다고, 자기처럼 한 방에 명중시키는 특등 사수가 되어야 한다고
놀려댔다(실제 군복무 시절 그는 소문난 명사수였다). 디지털 카메라는 필름을 안 쓴다고 설명했더니 무척이나 신기해 했다.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그는 사진기자에게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나, 그거 정말 필름인 줄 알았더랬어. 펑펑 찍을 때마다 아까워서 마음을 퍽 졸였댔는데.”
프로필/
1929년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면 출생.
한국 해양대학 졸업.
1950~1957년 군 복무.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
조선일보 외신부장.
한양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 신문대학원에서 연수.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 등 저서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