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수도권에 집중된 1백80여 공공기관을 지방으로 이전하는 ‘대역사’를 추진하자, 각 지자체가 공기업 등을 유치하기 위해 사활을 건 로비전을 벌이고 있다.
“다른 지역에서는 어느 어느 기관을 신청했는지 알 수 있을까요?”
각 지방자치단체가 수도권 공공기관을 유치하려고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
취재하는 기자에게 한 지자체 관계자가 넌지시 물었다. “다음 주에 나오는 저희 책을 보시죠”라며 웃고 넘겼지만, 오죽했으면 그런 말을 꺼냈을까
싶어 마음 한 구석에 미안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만큼 공공기관 이전을 둘러싸고 지자체간 신경전이 치열하다는 얘기였다.
독도 문제와 한·일 외교 갈등으로 온통 세상이 들썩거려도, 요즘 각 지자체의 관심은 오로지 한 곳에 집중되어 있다. 어떻게
하면 알짜배기 공공기관을 우리 지역으로 끌어오느냐이다.
출범할 때부터 ‘지방 분권’
‘지역 균형 발전’을 강조해온 노무현 정부는 충남 공주·연기에 행정복합도시를 건설하는 것과 병행해 수도권에 집중한 1백80여개 공공기관을
비수도권으로 분산하는 ‘대역사’를 추진 중이다. ‘총인구의 47.6%, 공공기관의 85%, 100대 기업 본사의 91%가 밀집한 수도권의 과밀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공공기관부터 먼저 지방으로 이전해야 수도권도 살고 지방도 산다’는 것이 여권의 논리다. 그 근거는 2003년
12월29일 국회를 통과한 국가균형발전특별법(특별법)에 두고 있다.
특별법에 따르면, 이전 대상 기관은 원칙적으로 수도권에 소재한 모든 공공기관(2백70여개)이다. 하지만 이
가운데 수도권 안의 문화유적지나 묘지, 방송시설, 공항(국립현충원·KBS·인천국제공항공사), 수도권 내 낙후 지역이나 폐기물 매립지에 소재한
기관(파주 접경 지역의 감사교육원, 김포매립지에 있는 한국환경자원공사), 민간 성격이 강해서 강제로 이전시키기 곤란한
기관(대한투자신탁·제일은행), 지방에 유사한 기능을 수행하는 별도 법인이 있는 기관(한국디자인진흥원·국립국악원)같이 예외 규정이 적용되는 일부
기관을 뺀 나머지 1백80여개 공공기관이 실제 이전 대상이다.
칼자루를 쥐고 있는 대통령 직속
국가균형발전위원회(위원장 성경륭)는 지난 3월8일 노무현 대통령에게 업무 보고를 하는 자리에서 어떤 기관을 어느 지역으로 내려보낼지 구체적인
이전 계획을 4월 중순께 발표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 일정이 한두 달 늦추어지게 생겼다. 이 문제를 협의할 국회 특위(신행정수도건설 후속대책
및 지역균형발전 특위)가 한나라당의 불참으로 삐걱대고 있는 데다, 이 특위의 활동 시한이 일단 5월 말까지로 정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때까지 각 지자체는 막판 로비전에 ‘올인’할 조짐이다.
현재 국가균형발전위원회가 세워놓은 공공기관 지방 이전의 큰 원칙은 두
갈래다. 한국전력공사·한국도로공사·한국토지공사같이 이전 효과가 큰 공기업은 시드 배정하듯이 시도 별로 하나씩 먼저 배분하고, 나머지 기관은 지역
특화 산업에 맞게, 그리고 지역간 형평성을 고려해서 유관 기관들을 하나로 묶어 집단 이전시킨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이미 정부
제3청사가 있거나, 행정복합도시 건설이 예정되는 대전·충남을 제외한 11개 시·도에서는 각기 자기 지역에 유치하려는 공공기관 명부를 만들어 본격
유치 활동에 돌입했다(도표 참조).
현재 각 지자체로부터 러브콜이 쇄도하고 있는 공기업 1순위는 한전이다. 연간 매출액이
24조원에 달해 해당 지자체가 거두어들일 수 있는 지방세만 천억원 정도 예상되는 데다, 직원 수도 2만명이 넘어 지역 경제에 미칠 파급 효과가
엄청나기 때문이다. 지난해 한전이 낸 지방세는 9백1억원이었다. 지자체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한전 하나면 다른 공기업 5~6개 효과다” “한전이
오면 그야말로 살림살이가 펴는 것이다”라는 얘기가 절로 나온다. 이 때문에 부산·경남을 비롯해 광주·전남, 대구·경북, 전북 등 7개 지역에서
한전 유치를 위해 발 벗고 나섰다. 특히 부산 대 광주·전남간 유치 경쟁은 지역 대결 양상까지 띠고 있어 3월22일 당·정 회의에서는 ‘뭔가
냉각 조처가 필요하다’는 얘기가 나왔을 정도였다. 한전이 남부·서부 등 6개 발전 자회사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본사 이전에 따른 경제 효과는
기대했던 것보다 적을 수도 있는데, 지자체들이 너무 과대 평가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한국토지공사(토공)와
대한주택공사(주공)도 인기가 높다. 강원도와 충북을 비롯한 6~7개 지역이 토공과 주공 유치를 희망한다. 토공은 2003년도에 지방세를 5백억원
가량 냈고, 주공은 작년에 지방세를 2백억원 가량 납부했다. 유치하려는 쪽에서야 기대에 부풀어 있지만, 떠나보내야 하는 수도권 지자체는
울상이다. 특히 토공·주공말고도 한국도로공사(지방세 85억원 납부), 한국가스공사(지방세 23억원 납부) 등 굵직굵직한 공기업이 밀집한 경기도
성남시는 재정에 막대한 타격을 입게 생겼다.
지역별 특화 산업과 관련해서는
한국관광공사·한국해양연구원·농업기반공사·영화진흥위원회 등이 베스트 10에 꼽힌다. 관광 특구를 지향하는 강원도·제주도·광주·경북은 한국관광공사를
반드시 유치해야 한다는 입장이고, 이미 국제 영화제를 운영하고 있거나 영상산업 도시로 도약을 꿈꾸는 부산·전북·광주·제주는 상징성이 큰
영화진흥위원회 유치에 발 벗고 나섰다. 한국해양연구원은 국제 해양 도시 건설을 외치고 있는 경남·경북·부산·제주가, 농업기반공사는 상대적으로
농업 인구가 많은 경북·광주·전북·충북이 눈독을 들이는 상황이다.
이처럼 이번 공공기관 이전이 단순한 분산 배치의 의미뿐
아니라 그 지역 특성에 맞는 ‘혁신 도시’ 건설과 밀접하게 연관되면서, 유치 전쟁의 맨 앞줄에 서 있는 지자체 단체장들은 좌불안석이다. IT
도시냐, 문화 도시냐, 관광 도시냐 하는 그 지역의 미래가 단체장 손에 달려 있다고 지역 주민들이 믿기 때문이다. 더욱이 내년 지자체 선거에
재도전하려는 단체장이라면 이번에 확실하게 실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해당 지역 출신 정치인 역시 마찬가지 운명이다. 때문에 각
지자체마다 지역 유지들로 구성된 추진기구를 띄우고, 청와대와 총리실, 관계 부처, 여야 정치권, 유치 희망 공공기관 등을 찾아다니며 사활을 건
유치 작전을 전개하고 있다. 대부분 비슷한 과정을 밟고 있지만, 지역에 따라 차별화를 꾀하는 경우도 있다. 대구·경북은 초반에 각개 약진을
하다가 중간에 추진위를 함께 구성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대규모 공기업은 연대 작전을 펴고 소규모 기관은 각자 희망 사항을 관철하는, 이원화
전략을 도입한 것이다. 상대적으로 도세에서 밀린다고 걱정하는 제주도는 한국관광공사 하나에 목숨을 거는 모양새다. 제주도 관계자들이나 강창일 의원
같은 이 지역 출신 정치인들은 한결같이 한국관광공사만 오면 대성공이라면서 ‘관광공사’를 입에 달고 다닌다.
각자 머리를
짜내다 보니 한 지역 안에서도 엇박자를 내는 경우가 왕왕 있다. 울산의 경우 한나라당 정갑윤 의원은 “한전 유치를 위해서라면 방폐장을 건립하는
것까지도 논의해보자”라며 적극성을 띠는 데 반해, 울산시측은 “한전은 너무 경쟁률이 세니 다른 공공기관에 주력하자”라는 견해를 보였다.
광주·전남에서도 박광태 시장이나 박준영 전남도지사가 한전 유치에 올인하고 있는 가운데, 광주 출신 염동연 의원(열린우리당)은 “한전도 좋지만,
석·박사가 40~50명 근무하는 연구원이 와서 그 성과물을 근거로 기업을 설립하는 게 더 파급 효과가 크다”라는 얘기를 꺼냈다가 지역
언론으로부터 뭇매를 맞기도 했다. 충청권의 한 의원은 “이 문제와 관련해 당 안에서 여러 번 회의가 열렸는데, 구체적인 내용으로 들어가면 서로
자기 지역 이해관계가 걸려서인지 정보를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같은 당 의원끼리도 이런데 국가균형발전위가 잡음 없이 발표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지자체별 유치 경쟁이 본격화하면서 총리실과 국가균형발전위원회는 문턱이 닳을 지경이다. 성경륭
위원장을 비롯한 국가균형발전위원들은 만나자는 사람이 하도 많아 몸값이 하늘로 치솟았다. 때마침 전국을 돌며 토론회를 열고 있는 열린우리당 당권
주자들 역시 가는 곳마다 공공기관 이전에 관한 질문을 받고 적당한 대답을 찾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극성을
떨어도 정치권이나 지자체 차원의 로비가 실제 선정 과정에 미치는 영향은 한계가 있으리라는 것이 중론이다. 지자체의 유치신청서 접수→해당 공공기관
의견 청취→국회 특위 차원의 논의라는 사전 단계를 거쳐, 국가균형발전위 소위 심사→균형발전위 전체회의 심사→국무회의 의결이라는 절차를 밟아
최종 결정되기 때문에 정치 논리가 개입할 여지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여권의 한 고위 인사는 오히려 얼마나 설득력 있는 논리로
제안서를 썼느냐가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나라당 지도부가 최근 공공기관 이전 논의에 불참하기로 결정한 것도 정치권의 말발이
먹힐 억지가 별로 없는데 괜히 책임만 나누어 지게 될 것을 염려한 때문으로 해석된다(상자 기사 참조).
아무튼, 정부측이 제시한
이행 방안에 따르면, 올 상반기 중에 이전 계획을 발표한 후 8월까지 해당 공공기관과 지자체 간에 구체적인 이전 협약을 체결하고, 늦어도
2012년까지는 이전을 완료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계획대로 되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적지 않아 보인다. 당장 이전 대상에 오른 공공기관
노조들이 반대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맞벌이 부부는 두집 살림을 해야 하고, 자녀들 교육 여건이 나빠지고, 수도권에 몰려있는 관련 기관들과의
업무 협조에 비효율이 생긴다는 등의 이유에서다. 3월22일에는 전국공공노조연맹이 주도하는 공공기관 이전 반대 시위가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앞에서
열리기도 했다.
‘과연 되겠나’ 하는 냉소적 시각도 걸림돌이다. 계획대로 가더라도 실제 이전은 노무현 대통령 말년인
2007년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버티다 보면 유야무야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적잖이 퍼져 있는 것이다. 공기업 유치에 앞장서고 있는 지자체
간부들조차 ‘독재 권력도 못했는데, 민주 정부가 할 수 있을까’라며 반신반의하는 분위기다.
이 때문에 여권에서는 ‘과거와
다르다’ ‘반드시 간다’는 인식을 확산하는 데 먼저 주력하고 있다. “이번 공공기관 이전은 과거와 달리 법에 근거한 것이다” “이전 협약은 이번
정권 안에 체결하기 때문에 위반하면 엄청난 불이익을 당하게 된다” “이주자들이 교육·주택·배우자 취업 등에서 불편이 없도록 각종 혜택을
주겠다”라며 협박하고 어르는 전략을 병행하고 있는 것이다. 노대통령이 직접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써서 지방 분권에 대한 의지를
밝힌 것이나, 이해찬 총리가 3월30일 시·도 지사 회의를 소집해 의견을 나누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여론의 지지가 없으면 명분도 힘도
별무 소용이라는 것을 이미 뼈저리게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숙이·고제규·차형석 기자
한 당직자는 “공공기관 이전은 뜨거운 감자다. 덥석 만졌다가는 데기 십상이다. 식기를 기다리는 것이 최선책이다”라고 말했다. 3선 3인방(김문수 이재오 홍준표)이 주도하는 ‘수도 지키기 투쟁위원회’(수투위) 의원들의 눈치도 보아야 한다. 지도부는 정부와 여당이 이전안을 내면 따질 것은 따지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개별 의원들의 사정은 각기 다르다. 공공기관 이전 자체를 반대하는 수투위 의원들은 하루 빨리 발표가 나기를 기대하고 있다. 발표 이후 거세질 후폭풍을 염두에 둔 것이다. 유치에 실패한 지자체들의 불만을 발판 삼아 불씨를 되살리겠다는 복안이다. 수투위 소속 배일도 의원은 “전국을 돌며 릴레이 집회를 열겠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지방에 지역구를 둔 한나라당 의원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한 영남권 의원은 “지역구 관심사가 온통 우리 지역에 무슨 기관이 오느냐에 쏠려 있다. 유치를 위해 생색이라도 내야지 수수방관하면 역적으로 몰릴 판이다”라고 말했다. 당 안에서는 소지역 갈등까지 불거지고 있다. ‘공공기관의 로또’라고 불리는 한국전력을 유치하기 위해 TK와 PK 의원들이 경쟁하기도 한다. 당을 뛰어넘어 여당 의원들과 협력관계도 구축했다. 부산 지역 한나라당 의원들은 여당 의원들과 역할 분담을 해 한전 유치에 발 벗고 나섰다.
수투위 의원들로부터 ‘낮에는 야당, 밤에는 여당’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한나라당 의원들이 혈안인 데는 그것이 바로 재선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규모가 큰 공공기관 이전은 재선을 위한 보증 수표나 다름없다. 행정도시특별법에 이은 공공기관 이전 논란으로 한나라당은 한 지붕 두 가족을 넘어 세 가족이 되어가는 형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