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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제약사가 비만 치료제를 제조하려고 하자 다국적 제약사가 ‘기술 침해’라며 제동을 걸고 나섰다.

 
지난 3월16일, 한나라당 안명옥 의원은 보도 자료를 긴급 배포했다. 내용은 의미심장했다. 다국적 제약사들이 특허 보호가 끝난 자신들의 약품을 보호하기 위해 ‘전방위로 통상 압력을 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안의원은 그 증거로 지난 3월8일 주한 유럽연합(EU) 유럽위원회 대표부 도리언 F. 프린스 대사가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과 산업자원부 장관, 보건복지부 장관·식품의약품안전청장에게 보낸 서신을 공개했다. 서신의 내용은 정중한 듯 보였지만 강력했다.

 
안의원의 보도 자료와 프린스 대사의 서한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보도 자료의 내용과 서신 내용, 그 뒤에 감추어진 맥락을 알고 나면 이 일이 얼마나 중대한 의미를 띠고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안의원은 보도 자료에서 ‘다국적 제약사, 2003년 참조가격제 저지-2005년 개량 신약 죽이기?’라는 자극적인 제목을 단 뒤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식약청은 국내 A제약사가 허가를 신청한 비만치료제 리덕틸캡슐(리덕틸·한국애보트)의 개량 신약에 대해 특별한 문제 제기 없이 절차를 진행하다가, 2월17일 동 품목 허가에 이견이 있다며 절차를 돌연 중단하고, 제조 허가 지연을 A제약사(한미약품)에 통보했다. 지난 2003년 다국적 제약사 로비에 따른 보건복지부장관 퇴진설까지 부른 참조가격제 이후, 다시 한 번 외국 제약사들의 전방위 압력이 가해지는 형국이다.’

공개된 프린스 대사의 서신에도 여러 내용이 담겨 있었다. ‘애보트의 제품(리덕틸)이 신약재심사기간 규정을 통해 6년 동안 독점 보호를 받아야 한다’ ‘식약청이 한미약품의 제품(슬리머캡슐)에 대한 허가를 애보트가 제출한 (리덕틸) 자료를 근거로 결정하려고 심사숙고하는 것이 염려스럽다’ ‘식약청이 슬리머캡슐(슬리머)을 개량 신약으로 허가해주면 데이터 독점성이 약화되어, 외국 투자자들에게 부정적인 신호를 주게 될 것이다’ 등이 그것이다. 여러 이야기였지만, 메시지는 분명했다. 슬리머에 대해 개량 신약 제조 허가를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넉 달 전에 불거졌다. 지난해 12월 말, 한미약품은 식약청에 자사가 개발한 비만치료제 슬리머를 개량 신약으로 허가해 달라고 요청했다. 슬리머는 식욕을 억제해 비만을 치료하는 리덕틸의 염(활성 성분)을 바꾸어 만든 약품. 개량 신약이란 특허 기간이 지난 오리지널 약품의 염을 바꾼 약을 말한다.

그동안 식약청은 임상 1상(약의 용량과 독성 여부, 체내 약물의 동태 등을 관찰하는 실험)과 3상(환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실험) 자료만 있으면 염을 바꾼 약품에 대해 개량 신약 허가를 내주었다. 오리지널 약품의 자료를 기본으로 삼고, 임상 자료만 갖추면 허가를 내준 것이다. 한미약품은 식약청의 승인을 받아 진행한 임상 1상과 3상 자료를 첨부했기 때문에, 슬리머가 당연히 개량 신약 제조 허가를 따낼 것으로 믿었다. 그런데 지난 2월17일, 식약청은 뜻밖의 내용을 전달했다. ‘제조 허가 지연’을 통보한 것이다.

이유는 간단 명료했다. 슬리머가 리덕틸과 동일한 약인 데다, 리덕틸이 ‘신약 재심사 기간’(PMS:의사들이 약을 사용해 보고 이상 보고를 하는 기간. 한국은 6년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보통 제약사들이 비용을 댐) 중이어서 슬리머 제조를 허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오리지널 약들은 보통 20년 동안 물질특허 보호를 받은 뒤, 세계무역기구 규정(WTO Trips)에 따라 재심사 기간 동안 기술 보호를 받는다. 따라서 성분이 동일한 약은 재심사 기간에 제조·출시할 수 없다. 결국 슬리머는 리덕틸의 재심사 기간이 끝나는 2007년 7월 이후에나 출시가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식약청은 정 허가를 받고 싶으면 리덕틸과 슬리머가 다르다는 증거로 ‘(오리지널 약

 
의 자료보다 많은) 동등 이상의 자료를 제출하라’고 통보했다. 한미약품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리덕틸의 활성 성분(염산 시부트라민)과 슬리머의 활성 성분(메실산 시부트라민)이 달라 별개 약이라고 항변했다. 그리고 ‘오리지널 약품의 기술이 공개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동등 이상의 자료 제출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식약청은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식약청의 승인을 받아 1상과 3상을 하고, 개발비가 20억원이 넘게 들어간 일이어서 당황스럽다”라고 이관순 한미약품 연구센터 소장은 말했다.

식약청 의약품안전과 최승진 사무관은 재심사기간인 약과 기본 성분이 같은 제품을 신약으로 제조 허가 받으려면 “개발 경위·물질 특성·안전성 시험·독성 시험·효력 시험 자료 등을 모두 제출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동안 식약청은 염이 다른 국산 약이 임상 1상·3상을 갖추면, 오리지널 약품의 기술을 기본 자료로 삼아 제조 허가를 내주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입장이 바뀐 것일까. 식약청은 재심사 기간중에 있는 제품의 기술을 보호하는 국제 협약 때문이라고 말했지만, 석연치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유가 밝혀졌다. 바로 안명옥 의원의 폭로처럼 외부의 압력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유럽연합 외에 애보트, 다국적의학산업협회, 주한 미국상공회의소, 미국의 제약 관련 행정 부서가 한국의 관련 부처와 식약청 등에 재심사기간 규정을 지켜 달라고 요청했다.

그런가 하면 미국대사관은 3월16일, 슬로머 문제를 ‘통상 압력’ 관점에서 기사를 작성한 기자들을 대사관 공보관 건물(서울 남영동)로 불러 기자설명회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대사관측은 오히려 ‘식약청이 부적절한 규정 해석을 하도록 (국내 제약사로부터) 압력을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재심사 기간 6년 동안 오리지널 약의 기술을 보호하려는 식약청의 입장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다국적 제약사 문제에 미국대사관과 관계 부처가 나선 것은 처음이 아니다. 2002년 3월11일, 토머스 허바드 미국 대사가 이태복 보건복지부 장관을 찾아가 약가 정책 수립 회의(약가 실무회의)에 다국적 회사를 참여시키라고 요청해, 허락을 받아냈었다. 석 달 뒤에는 미국 무역대표부 헌츠만 부대표가 장관실을 찾아가 건강보건심사평가원 ‘약가 기준’ 설정과 정책 수립 등에 다국적 제약사들이 참여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었다(그러나 이장관은 “어떠한 나라도 급여 기준 설정과 가격 조정 심사 제도 등에 해당 업체와 합의하는 예가 없다”라고 그의 요구를 물리쳤다).

오비이락이었을까. 그 일이 있고 난 지 한 달 뒤(7월11일) 이장관은 전격 경질되었다. 퇴임사에서 그는 자신의 퇴진이 다국적 제약사들의 로비 때문이라는 취지의 말을 했지만, 진실은 불분명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미국 정부와 다국적 제약사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어떻게 움직이는지 확실히 보여준 것이다. 왜 미국대사관과 무역대표부는 다국적 제약사 문제에까지 일일이 나서는 것일까. 다국적의약산업협회의 한 관계자는 “그들이 한국에 와 있는 이유와, 임무가 그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잘라 말했다.

다국적 제약사들이 재심사 기간을 신주 모시듯 하려는 이유는 분명하다. 한 의약품 전문가에 따르면, 국산 개량 신약과 제네릭(성분이 똑같은 카피약)들의 매출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큰 위협을 받고 있는 약품은 고지혈증 치료제 조코(한국MSD)와 당뇨병 치료제 아마릴(한독약품), 그리고 고혈압 치료제 노바스크(화이자)다.

조코는 2003년에 나온 국산 제네릭의 약진으로 매출이 30% 이상 줄었고, 아마릴도 70여 개의 제네릭에 ‘포위’되어 있다. 한 해 1천5백억원 가까이 매출을 올리던 노바스크는 아모디핀(한미약품)과 노바로핀(중외제약) 같은 개량 신약에게 시장의 30% 정도를 빼앗겨야 했다(그러나 화이자는 20% 안팎이라고 주장한다).

 
국산 개량 신약과 제네릭이 선전하는 이유는, 약효는 비슷한데 약가가 오리지널 약의 80% 이하로 책정되기 때문이다(그만큼 환자에게 부담이 덜 된다). 의약품 전문가들에 따르면, 현재 특허가 만료되거나 곧 만료될 다국적 제약사 오리지널 약품의 시장 규모는 7천억원 정도. 식욕 억제 비만 치료제 시장은 약 3백억원 규모인데, 현재 그 시장은 리덕틸을 판매하는 한국애보트가 ‘독식’하고 있다. 국내 제약사들이 재심사 기간을 똑 부러지게 지키면 지킬수록 다국적 제약사의 수익이 늘어나는 것이다. 국내의 한 제약사 간부는 그 시장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다국적 제약사들이 ‘묘수’를 쓰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논란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을 것 같다. 3월22일,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노동건강연대·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등, 의료 단체 5개가 연합한 ‘건강권 실현을 위한 보건의료단체 연합’(보건련)은 ‘특허 연장으로 국민 부담을 가중시키는 불합리한 의약품재심사제도를 개선하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우리는 WTO Trips을 반대한다”라고 보건련의 이병도 정책위원은 말했다. 그 규정이 물질 특허가 만료된 다국적 제약사 약품의 독점 기한 연장을 공식 인정해, 국민들의 의료보험료를 챙겨가게 한다는 것이다. 그는 다국적 제약사들이 국내 약값을 Gn 수준으로 올리려 한다며, 개량 신약과 제네릭을 활성화해 약가를 떨어트려야 한다고 덧붙였다. 건보련은 이번에 식약청이 물러서면 선례가 되어 개량 신약이 설 자리가 줄어든다며, 식약청이 외압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식약청은 현재 깊은 번뇌에 빠져 있다. 과연 식약청은 어떤 결정을 내릴까. 제약·의료계와 국민들은 식약청의 고민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보험료를 가장 많이 청구한 약품은 고혈압 치료제 노바스크(5mg)로 1천3백16억원이나 되었다. 2,3위도 다국적 제약사 제품으로 항혈액응고제 플라빅스(6백33억원)와 당뇨병 치료제 아마릴(6백7억원)이 차지했다. 국내 약품 가운데 10위 안에 든 제품은 고혈압 치료제 자니딥으로 4백3억원을 청구해 4위에 올랐다. 지난해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2003년 다국적 제약사들이 청구한 보험료는 모두 1조4천1백68억원으로, 국내 전체 건강보험료(5조2천76억원)의 27%나 되었다.

다국적 제약사 관계자들은 단순히 ‘매출액’만 갖고 자신들을 고깝게 보면 안된다고 말한다. 한국 의료산업에 끼치는 긍정적인 영향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효과가 뛰어난 세계적인 신약을 신속히 공급해, 환자들의 생명을 늘리거나 지키는 일도 그 중의 하나다”라고 한국릴리 김경숙 부장은 말했다.

국내 의약품 유통 구조를 깨끗하게 만드는 데도 일조하고 있다. 한 다국적 제약사는 접대비를 공무원 3만원·의사 5만원으로 정해놓고, 그 이상 접대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골프 접대나 향응이 ‘옛날이야기’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대학병원 의사나 개원의 들을 세계적인 의료 관련 학회에 파견하는 것도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의료학회의 스폰서가 되어 좌장이나 스피커들을 내보내, 선진 의료 기술이나 신약 등에 대한 정보를 취득하도록 돕는 것이다.

자사의 일부 제품을 홍보하기 위해서지만, 일부 다국적 제약사가 펼치는 문화·사회 봉사 활동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다국적 제약사들을 ‘이익 집단’으로 보는 사람이 적지 않다. 비교적 비싼 약값 때문이다. 한 다국적 제약사 간부는 “신약 한 제품을 만드는 데 10억 달러, 10년 이상의 돈과 시간이 들어간다. 당연히 비쌀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2003년 말 기준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의약품을 판매한 회사는 화이자(미국)다. 3백96억3천1백만 달러 매출을 올려 전년 대비 40% 성장률을 기록했다. 2위와 3위는 GSK(영국)와 머크(미국), 각각 3백23억3천5백만·2백24만8천6백만 달러어치의 의약품을 팔았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의 다케다 약품공업이 가장 많은 매출을 올렸는데, 81억9천3백만 달러어치를 팔아 세계 15위에 올랐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약품은 고지혈증 치료제 리피토(화이자)이다. 리피토는 현재 한국을 비롯한 전세계 70여 나라에서 처방되고 있는데, 연평균 7천6백만 명이 복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 매출액은 1백20억 달러. 두 번째로 많이 팔린 약은 고지혈증 치료제 조코(59억 달러·MSD)였고, 세 번째 약품은 항혈액응고제 플라빅스(50억 달러·BMS)였다.

최근 다국적 제약사들은 전혀 새로운 제품으로 매출액을 끌어올리고 있다. 물질 특허가 끝난 제품이나 개량 가능한 약품을 업그레이드해 시장에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화이자는 제네릭(일종의 카피약)·개량 신약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고혈압 치료제 ‘노바스크’와 ‘리피토’를 혼합한 순환기 치료제 ‘카듀엣’을 올 하반기에 선보일 예정이다. “고혈압에 걸리면 고지혈증에 걸릴 확률이 많다. 그같은 환자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한국화이자 박천경 차장은 말했다.  MSD도 제네릭의 약진으로 매출이 줄자, 콜레스테롤 흡수 억제제 이지트롤과 합쳐 복합제 ‘바이토린’을 출시할 계획이다.

일부 회사는 합병·매수를 통해 몸집을 불릴 것으로 전망된다. 1995년부터 지난해까지 다국적 제약사 간에 이루어진 합병·매수는 모두 13건. 

2003년 매출액을 기준으로 했을 때, 국내에서 가장 성공한 다국적 제약사는 화이자(2천4백45억원), 한독약품(2천2백27억원),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2천2백22억 원), MSD(1천7백25억원), 바이엘코리아(1천7백억원) 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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