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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비평]

 
혹은 학교에서 와주십사 하는데, 강연의 주제는 ‘자유’라고 한다. 그러니까 와서 아무 얘기나 해달라는 것인데, 그것은 오직 내가 ‘작가’이기 때문일 뿐, 다른 아무 이유도 없다. 그렇지만 작가는 가르치는 자라기보다는 배우는 자에 가깝고, 소설을 한 권 썼다고 해서 누구 앞에서 떠들 권리를 자동으로 갖게 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작가들은 말보다는 글에 능하다(그러니까 방에 틀어박혀 글을 쓰고 있겠지만). 그런데도 책을 새로 내거나 하면 흔히 강연 요청들을 한다.

어쩌면 이것은 작가가 선비이거나 또는 최소한 선생이던 시절의 유물일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부터가 남다른 배움의 표지이던 시절의 흔적일 텐데, 그러나 지금은 누구나 글을 쓰는 시대, 굳이 작가의 강연을 들어야 할 이유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이야기는 모두 책으로 낼 수 있는 시대에 굳이 그것을 입으로 떠들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군부 독재 시절에나 가능했던 장면들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작가들이 강연보다는 낭독을 한다. 책이 새로 나오면 그 책을 들고 순회 낭독 여행을 떠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작가들은 ‘자유’ 주제의 강연을 준비할 필요가 없다. 자기 책 중에서 한 부분을 골라 서점 같은 곳에서 독자들 앞에서 읽는다. 서점들은 따로 공간을 마련하지 않고 매대를 조금 밀어 약간의 공터를 만드는데, 책더미 사이에 작가와 독자가 옹기종기 모여앉아 있는 모습이 정겹게 느껴지기도 한다. 소설가뿐 아니라 대단히 분명한 메시지를 가진 정치·사회과학 쪽 책의 저자들도 그렇게 한다. 독자들은 몇 십분 동안을 참을성 있게 듣고 궁금한 것이 있으면 작가에게 질문한다. 작가는 답변하고, 그 모든 것이 끝나면 자기 책을 들고 온 사람들에게 사인을 해준다. 작가가 강연을 하는 사회와 낭독을 하는 사회. 연원을 따져 들어가면 더 깊은 문화적 전통이 드러나겠으나, 일단 지금으로서는 우리 사회에 낭독의 문화를 들여오는 것은 어떨까 깊이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얼마 전 동료 작가들과 함께 독일 라이프치히 도서전에 다녀왔다. 그곳에서 우리 작가들은 청중 앞에서 자기 소설을 한국어로 읽었다. 그러면 발성이 좋은 독일인 연극배우들이 그 작품을 독일어로 읽었다. 청중은 알아듣지 못하는 한국어 낭송도 참을성 있게 들었고, 독일어 낭송은 귀 기울여 들었다. 그런 태도는 오히려 우리 작가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우리를 변화시켰다. 작가들은, 한국으로 돌아가 새로운 책을 내게 되거든, 강연보다 낭독을 하자고, 그렇게 출판사와 서점, 학교 들을 설득해 보자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한 분이 흥미로운 제안을 내놓았다. 아예 새 책 발표회를 낭독회로 대신하자는 것이다. 지금은 새로운 책이 나오면 그것의 교정쇄를 일간 신문 문학 담당 기자에게 미리 보내 책이 나올 때쯤 기사를 쓸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는데, 이것을 없애고 기자와 독자 들을 모두 한 곳으로 불러 그곳에서 작품을 낭독하고 필요한 책 혹은 자료를 배포하는 것이다. 독자들은 낭독회에 참여해 누구보다 먼저 신작의 한 귀퉁이를 맛볼 수 있고, 한쪽에 마련된 가벼운 음식을 먹으며 다른 독자들과 담소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개봉 영화의 시사회를 닮은 이런 행사가 과연 출판계에도 잘 먹힐지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신선한 기획이 될 것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이야기가 여기에 이르자 다른 작가들이 끼어들었다. 한 작가로는 ‘흥행’이 잘 안될 수도 있으니 세 사람으로 팀을 짜 투어를 다니면 좋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고, 신문이나 방송에 중계를 하면 관심이 높아질 것이라는 의견도 나왔다. 어쨌든 그 자리에 참석한 작가 중 누구도 낭독 문화 도입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이 나로서는 신기했다. 그야말로 ‘낭독 발견’이었다. 자기 책을 조용히 읽는 작가와 그것을 귀 기울여 듣는 독자의 만남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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