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이 운다>와 <달콤한 인생>, 두 영화의 시사회에 다녀왔습니다. 박찬욱 감독과 함께 한국형 하드고어
3종세트를 구성하고 있는 류승완 감독과 김지운 감독의 영화라서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이 갔습니다. 류승완과 김지운은 비슷하면서, 다른 행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류승완이 전형적인 인파이터라면 김지운은 아웃복서에 가깝습니다. 류승완은 주제를 향해 질주하지만 김지운은 주제에 이르는 여정을
즐기도록 만듭니다.
류승완은 독립영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로 일약 충무로의 기대주로 부상했습니다. 충무로는 정말 그를 온몸으로 껴안았습니다.
질퍽한 폭력 미학을 선보인 그에게 충무로는 주저 없이 메가폰을 맡겼습니다. 그러나 아마복싱에서 프로권투로 업그레이드가 잘 되지 않아 류승완은
삐걱거렸습니다.
<피도 눈물도 없이>와 <아라한 장풍 대작전>에서 그의 단순 질박함은 매력이 아니라 결함으로
작용했습니다. 상업주의와의 부적절한 만남은 그에게 영화적 퇴행을 가져오는 듯 보였습니다. 냉정하게 말해서, 류승완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서
한 치도 못나갔습니다. 그가 어서 빨리 풀게임을 뛸 수 있는 체력을 갖춘 인파이터 감독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피도 눈물도 없이>와 <아라한 장풍 대작전>이 2% 부족했던 이유를 저는 그의 사형들에게서 찾았습니다. <피도
눈물도 없이>의 강우석과 <아라한 장풍 대작전>의 정두홍은 류승완이 장편영화와 액션영화에 적응하는데 도움을 주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자신들 수준으로 류승완을 그치게 만드는 해를 끼치기도 했습니다. 장편영화와 액션영화의 관습에 류승완의 총명이 가려졌습니다.
<주먹이 운다>는 류승완이 프로권투의 풀게임은 어떻게 뛰는지에 대해 적응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영화입니다. <주먹이
운다>는 영화적 세련미가 돋보이는 작품은 아닙니다. 류승범의 캐릭터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와 별반 다르지 않고, 최민식의
캐릭터는 <올드보이>와 <꽃피는 봄이 오면>사이에서 진동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먹이 운다>는 무척 볼만한
영화입니다. 두 구닥다리 캐릭터가 뻔한 스토리를 펼쳐가지만 새로운 영화적 경험을 줍니다.
지금까지의 권투 영화는 이겨야 되는 자와 져 줘야 되는 자가 분명했습니다. 관건은 이겨야 하는 자가 얼마나 질듯 말듯 하다가
이기느냐였습니다. 그러나 <주먹이 운다>는 다릅니다. 관객들은 처음으로 이겨야 하는 자 2명이 싸우는 권투시합을 관람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경험은 새로운 느낌을 줍니다. 누구도 내칠 수 없는 권투시합은 긴 여운을 남깁니다. 관객은 링 위에서 펼쳐지는 삶의 비정함과 냉혹함에
빠져들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스타일이 분명한 류승완에 비해 장르 영화의 관습에 충실하면서도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어내는 김지운은 아웃복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조용한 가족> <반칙왕> <장화, 홍련>을 거치는 동안 김지운은 코미디와 호러의 장르적 속성을 따르면서도 2%
다른 김지운식 코미디와 김지운식 호러를 만들어 냈습니다.
류승완에 비해 김지운이 월등한 점은 스토리의 이음새가 촘촘하고 캐릭터의 구축이 견고하다는 점입니다. 배우를 쓰는 것도 맛갈나게 씁니다.
거칠게 말해서, 류승완이 참신한 인물을 데려와서 구태의연하게 쓴다면, 김지운은 구태의연한 인물을 데려와서 참신하게 씁니다. 류승범과 최민식이
<주먹이 운다>를 통해 동어반복을 하는 동안 이병헌은 <달콤한 인생>을 통해 스타일리쉬한 배우로 거듭났습니다.
김지운의 세련미는 <달콤한 인생>에서 극에 달합니다. 뮤직비디오에나 어울릴만한
진부한 스토리지만 관객은 그 스토리에서 진부함이 아니라 세련미를 느낍니다. 그 이유는 김지운이 <달콤한
인생>에서 관객이 새로운 느낌의 폭력을 경험하도록 이끌기 때문입니다. <달콤한 인생>을 통해 김지운은 김지운식 코미디와 스릴러에 이어
김지운식 느와르를 선보입니다.
보통 느와르 영화에서 관객은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이 되기 쉽습니다. 주인공에 대한 애정이 커진 만큼 주인공을 괴롭히는 악당에 대한 증오도 커집니다. 주인공이 때릴 때 통쾌해 하고
주인공이 맞을 때 함께 아파합니다. 이것은 홍콩영화가 1980년대를 거쳐 완성한 느와르 영화의 공식이기도 합니다. 여성제작자와 여성프로듀서가 결합한 <달콤한 인생>은 느와르
영화의 이 촌스러운 구도를 벗어납니다.
연극연출가 출신의 김지운은 ‘낯설게 하기’를 꾀합니다. 분명 주인공의 감정에 근접하기는 하지만 관객은 어느 정도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합니다. 스토리가 진행될수록, 주인공의 감정에서 멀어지고 오히려 악당의 감정에 가까워집니다. 폭력에 대해서도 객관적인 느낌이 유지됩니다.
<달콤한 인생>에서 폭력은 무조건 아픕니다. 주인공이 맞든 악당이 맞든 섬짓할 정도로 아픕니다. 그리고 주먹에서 총으로 바뀔 때, 그
충격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합니다. 관습화된 느와르 영화지만, <달콤한 인생>은 전혀 다른 느낌을 줍니다.
봄의 문턱에서 피가 튀고 살점이 문드러지는 느와르 영화를 추천한다는 것이 조금 거시기 하지만, 자신
있게 <주먹이 운다>와 <달콤한 인생>을 권하고 싶습니다. 할리우드 장르영화에서 한발짝 더 나간 한국형 장르영화의 성취를 확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부디 극장에 가셔서 철든 류승완과 성숙한 김지운을 음미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