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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판의 극성이 거셀수록 그와 맞서 싸우려는 이판의 저항 의지도 커진다. 관료·기업가·기술자… 들이 세상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도록 싸우자. 이제 고개를 들고 다시 싸우자. 80년대에 그랬듯이.”
그러나 이는 불교계 문제만은 아니다. 인간사 모든 곳에는 이판과 사판이 있다. 대학은 학문에 전념하는 곳이지만, 다른 한편 등록금을 관리하고 기부금을 받고 하는 경영을 필요로 한다. 음악은 소리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이지만, 악기·공연장 대여 같은 경영적인 요소를 포함한다. 사회운동 단체들은 순수한 정치 활동과 재정 조달 사이에서 고민한다. 이렇게 인간의 행위는 이판 측면과 사판 측면에 동시에 관련된다.
‘담론’조차 정치와 돈에 좌우돼
그 존재론적 이유는 인간의 모든 행위가 정신적·언어적 측면과 물질적·사회적 측면을 동시에 포함하기 때문이다. 종교·철학·과학·예술 … 등등은 모두 정신적인 행위이지만, 이 행위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물질적·경제적 장 안에서만 그들의 행위를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인간의 행위는 ‘담론의 공간’에서 이루어지며, 이 담론의 공간이 어떻게 조직되어 있는가가 각 문화, 각 시대의 성격을 좌우한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시대는 어떤 시대인가. 우리의 시대는 사판이 이판을 압도하는 시대이다. 대학 교수들은 모여서 수능 시험 ‘커트 라인’과 연구비, 총장 비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학부제가 실시된 이후 대학은 그야말로 시장 바닥이 되었다. 예술가들은 모여서 어떤 화가의 그림이 얼마에 팔렸다느니, 어떤 회사 건물 앞에 세울 조각 작품에 돈이 얼마가 걸렸다느니 등등을 이야기한다. 과학자들은 기업과 정부가 내거는 프로젝트를 따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판 일보다는 사판 일에 눈을 반짝이는 시대, 모든 것을 사회과학적으로만 분석하는 시대, 모든 것을 돈이 좌우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이런 경향은 학문 연구 경향 자체에서도 드러난다. 오늘날 학자들은 어떤 철학책의 내용, 과학적인 발견들, 예술 작품의 의미… 등등을 잘 논하지 않는다. 대부분 이런 행위의 사회적·경제적 ‘배경’에 대해 논한다. 그리고 이런 작품들, 행위들을 당시의 사회적·경제적 배경의 ‘결과’로서 파악한다. 마치 모든 시대의 담론이 지금 우리 시대에서처럼 정치와 돈에 좌우되어 왔다는 듯이.
이것은 이미 때가 묻을 대로 묻은 기성 세대만의 문제인가? 그렇지 않다. 교수 생활을 할 때 신입생 지도 교수가 되어 상담한 적이 있다. 상담하기로 한 학생 중 절반이 불참한 것은 그렇다 치고, 상담하러 온 학생들의 질문 내용은 나로 하여금 더 이상 대학이라는 공간에 미련을 가질 수 없게 했다. 그 어느 학생도 학문에 대해서, 공부에 대해서 물어본 경우는 없었다. 오로지 학점 문제, 장학금 문제, 시험 문제뿐이었다. 이제 대학에 막 들어온 신입생들이, 저 푸르른 하늘보다 더 푸른 나이, 피어나는 꽃잎 하나에도 가슴 떨리는 나이, 그 나이에 말이다. 오늘날의 학생들은 대학을 졸업한 뒤에 퇴락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퇴락할 때로 퇴락한 상태로 대학에 들어온다.
‘순수’가 자리잡을 수 없는 한국 사회의 슬픔
이런 분위기는 ‘순수’라는 것이 더 자리잡을 곳이 없는 황량한 공간을 만들어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돈과 권력이 지배하는 시대, 사판이 이판을 질식시켜 거의 소멸시키고 있는 시대, 어디를 가나 돈 이야기와 권력 이야기만 흘러다니는 시대, 돈이 없으면 옴쭉달싹할 수도 없는 시대.
그러나 얼어붙은 땅에도 생명은 피어나는 법. 하나의 경향이 극에 달하면 그에 저항하는 경향 또한 고개를 쳐든다. 그것이 ‘一陰一陽謂之道’의 원리이다. 사판의 극성이 거세질수록 그와 맞서 싸우려는 이판의 저항 의지도 커진다. 이제 다시 싸우자. 관료·기업가·기술자 … 들이 세상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도록 싸우자. 관념은 힘이 약하다. 관념에는 질량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념은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마음을 움직이는 것보다 더 큰 힘은 없다. 우리는 90년대에 너무나 움츠리고 살아 왔다. 이제 무릎을 펴고 고개를 들고 다시 싸우자. 80년대에 그랬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