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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커피점에서는 손님이 왕이 아닌 때가 있다. 매월 둘째·넷째 주 수요일 저녁 7시. 음악이 뚝 끊기고 커피점 한켠이 공부방으로 변한다. 주인은 손님보다 공부하는 이들에게 더 정성을 기울인다. 강사의 목소리가 커서 다른 손님에게 피해를 주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다. 1시간이 넘는 강의가 끝나자, 주인은 또 공부 관련 비디오를 상영한다.

서울 안암동 고려대 후문 뒤에 있는 커피점 보헤미안에서 벌어지는 풍경이다. 때를 불문하고 손님을 최고로 대접하는 것이 장사를 하는 이의 철칙인데도 보헤미안 주인 박이추씨(50)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커피 교실이 열리는 이 때만큼은 박씨가 커피점 주인이 아니라 커피의 ‘메신저’이자 ‘전도사’로 변신하기 때문이다.

1988년 커피 전문점을 열었으니, 커피와 관련한 그의 이력은 올해로 13년째이다. 그리 길지 않은 이력이지만 그동안 박씨는 ‘커피 장사’를 넘어 커피 문화의 씨를 뿌리고 전파하는 일에 힘을 쏟아 왔다. 커피 교실을 열어 강의하고 토론하는 것은, 그가 해온 일 여럿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열서너 명에 이르는 커피 교실 수강생 중에는 커피점을 준비하는 이들도 있지만, 커피 자체에 관심이 있어 찾아온 대학생·대학원생이 절반 정도를 차지한다. 수강료는 커피 한 잔 값인 3천원. 학습의 일환으로 시중에서 맛볼 수 없는 ‘케냐 AA’ 같은 희귀한 커피가 석 잔 제공된다. 이들이 배우는 내용은 커피의 역사·기술에서부터 커피와 학술·예술의 관계에까지 이른다. 박씨는 “참석자가 5~6명이면 적당한데 자꾸 늘어나서 걱정이다”라고 말했다.

커피점 주인이 장사와는 관계없는 커피 교실을 열고 자기가 가진 정보를 아낌없이 나누어주는 것이 이색적인 일이거니와, 이 사람의 삶 자체가 보통 사람의 눈에는 평범하지 않다. 그는 1950년 일본 규슈에서 태어난 재일 교포이다.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가 처음 선택한 일터는 목장이었다. “밤에 낙농 전문대학을 다니면서 규슈·홋카이도에서 목부로 일했다. 그때는 이스라엘의 키부츠 같은 협동농장에 온통 관심을 빼앗겼었다.” 아버지 대부터 일본에서 살아 왔지만, 자연 속에서 일하기를 원했던 그는, “내 나라가 아닌 곳에서 일하는 것이 왠지 자연스럽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서울대에 유학한 형을 따라 그가 한국에 건너온 것은 1971년. 서울대 재외국민연구소에서 한국 공부를 하면서 박씨는 경기도 포천과 강원도 문막에서 목장을 세워 곡식과 젖소를 키웠다. 그러나 협동농장의 꿈은 한국에서 신기루 같아 보였다. “옥수수를 서른 번만 심으면 내 인생이 끝나겠구나 하는 불안감이 밀려 왔다. 새 인생을 찾아나서야 했다.”

1983년 무렵이었다. 당시 대도시에서는 카페가 유행했다. 우유를 생산하던 그는, 음료인 커피에서 가능성을 보았다. 1970년대까지 귀했던 우유가 1980년대 들어 일상적인 음료가 되었듯이, 커피도 곧 대중화하리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1986년 일본으로 다시 건너간 그는, 1987년까지 도쿄에서 커피 전문 학원을 다니며 커피를 공부한 뒤 1988년 서울 혜화동에 커피점을 열고 커피의 길에 들어섰다.
한국커피문화협회 만들어 ‘커피학’ 공동 연구

한국에 커피 콩을 볶는 집이 거의 없던 그 시절, 박씨는 일본과 한국의 선배들을 찾아다니며 학원에서 못 배운 기술을 익혀야 했다. 그가 선배들로부터 배운 것은 기술뿐만이 아니었다. “커피에는 사람을 사로잡는 깊은 에너지가 숨어 있다. 그 에너지를 연구해 사람들에게 그 진가를 알려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혜화동보다 비교적 한적한 안암동 뒷골목으로 커피점을 옮긴 것은, 커피를 직접 볶으며 연구할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박씨는 연구 성과를 나누려고 소규모 모임을 만들었다. 한국커피문화협회라 이름 붙인 이 모임은, 1995년 커피점 경영자·커피회사 관계자 등 4명으로 출범해 지금은 회원이 20명으로 늘어났다.

초대 회장에 취임한 박씨는, 회원들과 더불어 공부 모임을 만들었다. ‘커피학 입문’. 커피 선진국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와 서로의 연구 성과를 나누는 모임이다. 더불어 박씨는 제자를 키우기 시작했는데, 그가 배출한 제자 10여 명은 지금 전국에서 ‘활동’ 중이다.

이 땅에 뿌리를 내리려는 재일 교포에게 모국은 따뜻한 곳만은 아니었다. 나고 자란 환경이 다른 데다, 모국어마저 서툴렀기 때문이다. 모국에 정착하려 했던 재일 교포 대부분이 일본으로 돌아갔지만 그는 여기에서 결혼하고 자식을 낳았다. “목장이든 커피점이든 나는 내 직업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다. 자부심과 실력이 없으면, 모국이라고 살기 쉬운 곳은 아니었다”라고 그는 말했다.

남이 가지 않는 길을 가려고 애를 썼다는 그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먹고 살 정도만 되면 만족한다”라고 말했다. 박씨는 올 연말 강원도나 경북의 한적한 바닷가로 커피점을 옮길 생각이다. 한국 사람의 입맛에만 맞는 것이 아니라, 외국 사람도 만족하는 국제적인 커피를 만들어보겠다는 목표를 세웠기 때문이다. “제자들에게 갖는 불만이 바로 이 점이다. 그들은 한국인의 입맛에만 맞추려 한다. 커피는 국경이 없는 음식인데 미국인·일본인도 만족하는 커피를 만들어야 진짜 프로페셔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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