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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일의 시인 추사가 돌아왔다
대시인으로서 그의 면모를 유감 없이 과시하는 시집은 한학계의 원로 권우 홍찬유 선생(86·사단법인 유도회 부설 한문연수원장)이 감수하고, 그의 제자 정후수 교수(한성대·국문학)가 국역해 펴냈다. 책 이름은 〈추사 김정희 시 전집〉(전집·풀빛)이다. 스승과 제자는 5년 여를 들여 〈완당선생전집〉을 읽어 내려갔다.
우리말로 옮겨진 추사 시가 적지 않지만, 기왕에 남아 있는 추사 시 전편이 완역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자구(字句) 하나하나의 뜻과 유래를 상세한 각주(脚注)를 달아 풀이한 추사 시는 모두 3백78편, 〈전집〉 중 시 부분을 따로 뽑아 수록한 ‘부록’ 편을 빼고도 7백88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이 책의 미덕은 이처럼 추사 시를 한자리에 모아 그의 시 세계를 오롯이 보여준다는 점이다. 추사는 시(詩)·서(書)·화(畵) ‘삼절(三絶)’인 자하(紫霞) 신 위(申緯·1769~1847)와 함께 조선조 말엽을 대표하는 문인 예술가였다. 그럼에도 유독 추사의 ‘문자 향(香)’에 대해 소문이 적었던 까닭은, 추사의 시가 워낙 난해하기로 정평이 나 있어 내로라 하는 한학 전문가들조차 본격적인 국역 작업을 꺼려 전체상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권우 홍찬유, 최근 작고한 청명 임창순과 더불어 ‘한학 3대가’로 꼽혔던 우전 신호열 선생(작고)이 생전에 민족문화추진회에서 〈전집〉 국역 사업에 손댔다가 ‘시 번역’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이미 시중에 나간 〈전집〉 국역본을 회수했던 일도 있다. 이 책의 두 번째 미덕은, 이처럼 어려운 추사 시가 ‘3대가’ 중 마지막 생존자 홍찬유 선생에 의해 옮겨지고 다듬어졌다는 데 있다.
추사의 시에는 자하·초의(草衣) 등 당대를 주름잡은 명사들이 숱하게 등장한다. 제주도 유배지에서 울적한 심사를 노래한 시도 있고, 꽃을 보고 인생을 관조하는 시도 있다. 제주도 유배지에서 쓴 <수선화>는 대표적이다. ‘한 점 겨울 꽃이 떨기마다 둥글게 피었으니 / 그윽하고 담담하고 싸늘하고 준수한 것보다 훨씬 뛰어난 그 자태 / 매화는 고상하기는 하지만 오히려 뜨락을 벗어나지 못했는데 / 맑은 물에 참 모양, 바로 해탈한 신선일세.’
추사 시의 공통점은 군더더기가 없다는 것이다. 국역 작업을 감수한 홍찬유 선생은 “크고 넓은 자하의 시에 비해 추사 시는 작고 알뜰하다. 허튼 소리를 하지 않고, 자기 색채가 뚜렷한 점은 단연 조선 제일이다”라고 말한다. 글씨에서 ‘추사체(秋史體)’라는 독보적인 서체를 남겼듯이, 그의 시 역시 독창성으로 일가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방대한 분량의 〈추사 김정희 시 전집〉에서 의외인 것은 짤막한 서(序) 외에 추사 시에 대한 해설 또는 잡설을 일절 덧붙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추사 시 국역자들의 말 없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추사 시경(詩境)에 이르는 길은 닦아놓았으니, 그 그윽하고 심원한 경지는 독자들 스스로 알아서 느끼고 깨달으시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