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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정부, 중국 '백서' 발표에 전전긍긍 ··· 대만관련법에 묶여 난감

대만과 중국 본토간 거리는 고작 160㎞이다. 중국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대만을 무력으로 점령할 수 있는 거리다. 바로 그 대만 해협을 사이에 두고 연초부터 중국과 대만이 또다시 험악한 국면에 들어서자 미국이 전전 긍긍하고 있다.

중국 국무원이 지난 2월21일 난데없이 ‘대만이 통일 협상을 무기한 연기할 경우 무력 접수도 배제하지 않을 것’이라는 위협적 내용이 담긴 백서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이 백서가 3월18일 대만의 총통 선거를 앞둔 정치적 협박용이라고 해도 대만 안보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미국이 그냥 지나치기에는 섬뜩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사실 미국은 1996년 초 중국이 총통 선거를 앞둔 대만을 겨냥해 미사일 무력 시위에 들어갔을 때 뒤늦게 대응했다가 국내 여론의 반발에 직면해야 했다. 미국은 항공모함 2척을 부랴부랴 대만 해협으로 파견해 사태가 격화하는 것을 막았지만, 초기 대응이 안이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4년 전의 늑장 대응이 신경 쓰인 듯 미국 정부는 중국 국무원의 경고가 나오기 무섭게 즉각 반응했다. 때마침 중국을 방문 중이던 스트로브 탈보트 국무부 부장관은 중국 정부 지도자들을 만나 1996년 사태가 재발되지 않도록 자제해 달라고 강력히 요청했다.

이번 사태에 미국 의회 분위기도 험악하다. 지난해 어렵사리 타결한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협상과 관련해, 의회가 늦어도 오는 8월까지 중국을 최혜국 대우 제한 국가 명단에서 제외해 정상 교역국으로 전환해 주어야 하는데 공화당 보수파가 이를 방해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윌리엄 로스 상원 재무위원장이 “중국의 세계무역기구 가입과 정상적 무역 지위에 대한 상원의 승인을 ‘기정 사실’로 볼 수 없다”라고 경고한 것도 심상치 않다.

사실 1979년 중국과의 국교 수립 이후 대만을 계륵과 같은 존재로 여겨온 미국은 공개적으로는 ‘하나의 중국’ 정책을 지켜 왔지만, 그러면서도 대만을 소외시키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써왔다. 중국과의 국교 정상화 직후 미국 의회가 대만관계법을 통과시킨 취지도 실은 중국이 대만을 무력으로 접수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대만 안보에 대한 미국의 의지를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는 중국도 지금까지는 ‘무력 접수’ 원칙만을 선언한 채 우선은 대만과의 통일 협상에 전력을 기울여 왔다. 그 원칙이란 대만이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할 경우나 외세가 대만을 무력 점령하려 할 경우를 말한다.
그러나 중국 국무원은 ‘대만 백서’를 발표하면서 ‘대만이 통일 협상을 무기한 연기할 경우 군사력 사용을 포함해 모든 과감한 조처를 취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천명해 기존 원칙에 또 하나를 추가했다. 물론 이 백서는 통일 협상의 시한을 못박거나 일정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1997년 영국으로부터 홍콩을 접수하고, 지난해 포르투갈로부터 마카오를 반환받은 중국은 이제 대만 접수를 향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처럼 중국과 대만이 일촉 즉발의 험악한 상황에 처해 있는데도 미국이 어느 한쪽을 노골적으로 지지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미국은 1972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중국 방문 때 발표한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대만과의 외교 관계를 끊었고, 나아가 중국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허용했다.

그렇다고 해서 한때 둘도 없는 맹방이었고 자유 세계의 일원인 대만을 무시할 수도 없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다. 비록 대만과의 국교는 단절했지만 미국은 대만관계법에 따라 대만 자위에 필요한 무기 공급을 계속해 왔다. 민주당 샘 게젠슨 의원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1994년부터 4년 동안 미국이 대만에 수출한 무기 총액은 20억 달러에 이른다. 그뿐인가. 미국은 외교·군사 이외의 분야에서 대만과의 교류를 적극 장려해 왔다. 대만과 미국의 교역량은 5백40억 달러에 이를 정도다.
당사자인 대만은 오히려 여유만만

그런데 이처럼 대만 문제로 골치를 썩여온 클린턴 행정부는 최근 의회가 통과시킨 대만 관련 법안 때문에 더욱 운신이 어렵게 되었다. 지난 2월1일 하원이 찬성 3백41표 대 반대 70표라는 압도적인 차로 ‘대만 안보 향상 법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1979년의 대만관계법을 보완한 이 법안의 핵심은 미국·대만 군부 간의 직통 회선 개설과 양국 군사 교류 제한 철폐이다. 공화당의 톰 딜레이 총무가 주도한 이 법안은 역대 미국 정부가 견지해온 ‘하나의 중국’ 원칙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중국 정부는 이 법안이 하원을 통과하자마자 조셉 프루어 주중 미국대사를 소환해 강력히 항의하고, 중국의 주권을 침해하고 내정에 간섭하는 행위라며 미국을 맹렬히 비난하고 나섰다.

이에 클린턴 대통령은 이 법안이 상원을 통과해 자기 앞으로 넘어올 경우 서명을 거부해 의회로 되돌려 보내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이 법안이 통과될 경우 올 상반기 중국에 정상 교역국 지위를 부여해 미·중 관계를 반석 위에 올려놓으려던 계획이 몽땅 어그러지기 때문이다.

이 법안을 신속히 통과시킨 하원에 비해 상원의 입장은 다소 신중하다. 공화당 트렌트 로트 상원 원내총무는 괜히 이 법안을 통과시킴으로써 미·중 관계를 복잡하게 만들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미국내 강력한 친대만 로비 단체인 ‘포모사 홍보협회’는 “상원 통과 여부와 관계없이 대만안보향상법안이 하원을 통과한 것은 미국이 대만의 안보를 수호할 것이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보낸 것이나 다름없다”라며 기뻐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중국이 초강경 위협 수단을 동원하고 있지만 정작 대만은 느긋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대만 양안위원회 수 치 위원장은 2월23일 <뉴욕 타임스>와 가진 회견에서 “우리는 대만을 주권국으로 생각한다. 그들(중국)이 싫어도 할 수 없다. 중국은 지금이야말로 대만을 통일할 수 있는 시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그것은 오산이다”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대만이 여유 만만해 하는 것은 미국이라는 든든한 ‘배경’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미국내 친대만 로비 조직을 믿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2월22일자 <워싱턴 포스트>는 미국 의원과 의원 보좌관, 공화당 정치 참모, 전직 정보 관리, 친대만 로비스트, 그리고 보수계 언론인 20여 명으로 이루어진 신생 친대만 로비 단체 ‘블루팀(Blue Team)’이 얼마 전부터 워싱턴에서 은밀히 활약하고 있다고 폭로해 관심을 끈다.

보도에 따르면, 최근 하원을 통과한 대만안보향상법안 초안을 블루팀이 작성했다는 것이다. 또 지난해 봄 블루팀의 로비를 받은 뉴트 깅그리치 하원의장이 크리스토퍼 콕스 공화당 정책위원장으로 하여금 중국이 미국의 핵기술을 절취한 사건을 조사하도록 위임한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콕스 의원은 당시 특별 보고서를 통해 중국이 조직적으로 미국의 첨단 핵탄두 제조 기술과 미사일 관련 기밀을 절취했다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켰다. 이 보도는 또 언론 가운데 보수계를 대변하는 주간지 <위클리 스탠더드>와 일간 신문 <워싱턴 타임스>가 이들의 견해를 대변하는 창구라고 밝혔다.

이 보도가 폭로한 블루팀 회원들 가운데는 콕스 의원의 전 보좌관인 리처드 피셔,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자문위원 피터 브룩스, 상원 외교관계위원회 자문위원 마크 라곤, 레이건 행정부 시절 국방 관료를 지낸 프랭크 개프니, 중앙정보국(CIA)에서 중국 담당 분석가를 지냈고 지금은 로버트 베넷 상원의원의 보좌관인 윌리엄 트리플릿과 같은 쟁쟁한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다. 가장 궁금한 것은 이들의 활동 자금을 누가 대느냐 하는 점인데, 놀랍게도 그 주인공은 리처드 스케이프라는 억만장자라고 한다. 극우파이기도 한 그는 우익 이념을 위해서라면 한번에 수백만 달러씩 기부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물론 블루팀 같은 친대만 단체들의 극성에 클린턴 행정부의 중국 정책이 휘둘린다고 볼 수는 없다. 아직은 중국을 적대적 개념의 경쟁자라기보다는 전략적 동반자로 보려는 견해가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래 미국 의회가 중국을 상대로 취한 일련의 조처들은 블루팀의 영향력이 상당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워싱턴 포스트>의 분석이다.
“대만 총통 선거 겨냥한 심리전” 분석도

아무튼 4년 만에 또다시 불거진 중국과 대만 간의 날카로운 외교전을 놓고 미국은 양쪽에 자제를 촉구하며 일단 사태를 예의 주시하겠다는 입장이다. 물론 중국이 1996년처럼 대만을 무력으로 위협하는 상황이 벌어지면 즉각 단호한 대응 조처를 취할 방침이다. 그러나 중국이 경고 문건을 발표했으면서도 과거처럼 무력 시위를 벌이지 않고 있다는 점에 미국은 내심 안심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미국내 일각에서는 중국측의 이번 행동이 총통 선거를 앞둔 대만 유권자들을 겨냥한 것이 아니냐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즉 초강경 메시지를 띄움으로써 대만 유권자들로 하여금 친독립파인 야당 후보에게 등을 돌리고 독립 문제에 신중한 입장을 보여온 집권 국민당의 리엔찬 후보를 찍어야 한다는 압력을 가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중국의 이번 행동에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다면, 미국이 구태여 과민 반응을 보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 일부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저명한 중국 문제 전문가인 스탠퍼드 대학 마이클 옥센버그 교수가 2월22일 <워싱턴 포스트>와의 회견에서 “중국이 과거처럼 미사일이 아닌 말을 통해 대만을 위협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번 백서는 중국이 통일 협상의 조건을 선점하려는 전술인 것 같다”라고 분석한 것은 음미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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