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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소수 민족 구성 비율 급격히 변화…인종간 세력 다툼 치열, 갈등 불씨 활활

미국이라는 나라를 가장 잘 나타내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용광로라는 뜻을 가진 멜팅 팟(melting pot)이다. 멜팅 팟은 미국 사회의 약속이었다. 멜팅 팟이라는 말에는 인종 차별이라는 의미도 녹아 있다. 우리는 하나지만 우리 아닌 남은 차별해도 좋다는 은밀한 약속도 된다.

그동안 미국의 인종 갈등은 흑백 대결이라는 단순 구도였다. 그러나 오늘날 제3의 이민 러시가 몰고온 파장은 미국을 인종 별로 분파화하고 있다. 그러한 현상이 미국에서 가장 심한 지역은 로스앤젤레스를 포함한 사우스 캘리포니아이다. 이 곳은 원래 멕시코 땅이었으나 미국이 전쟁을 통해 빼앗은 곳이어서 멕시코인이 많이 살았다. 그리고 1965년 이민법이 개정되자 아시아로부터 이민이 급증했다. 같은 해 일어난 왓츠 폭동은 소수 민족에게 큰 상처를 준 대신, 소수 민족을 위한 각종 행정 제도·법규·교육 제도 신설을 부추겨 왓츠는 소수 민족의 메카로 떠올랐다.

히스패닉이 인구 41%로 주류 차지

1960년까지만 해도 로스앤젤레스 사회의 주류는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백인이었다. 그러다가 이민자가 몰려들면서 인종 구성은 급격한 변화를 보였다. 오늘날 이곳의 주류 인종은 히스패닉(스페인계 중남미인)으로 전체의 41%를 차지하고 있다. 그 다음은 백인 37%, 동양계 11%, 그리고 흑인이 10%이다.

소수 민족 구성 비율이 변화하면서 각 민족간 세력 다툼도 치열해지고 있다. 10년 전 사우스 센트럴 지역은 대표적인 흑인 거주지였다. 그러나 지금은 빈민층 흑인들과 갓 이민온 히스패닉이 뒤섞여 살고 있다. 중산층 흑인에게 밀린 백인은 더 멀리 떨어진 교외로 나가거나 아예 캘리포니아를 떠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일고 있는 이같은 현상은 미국 전역으로 번질 추세다. 이런 변화를 몰고온 주역은 당연히 새로운 이민 세대이다. 이들은 한 지역에 몰려 살면서 그들만의 상권을 일구고 지역 문화를 가꾸고 있다.

사우스 센트럴 캄튼 시는 50년 전만 해도 흑인이 주택을 사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었던 백인 중산층 거주지였다. 1948년 연방 대법원이 위헌 판결을 내려 법적인 장애는 철폐되었지만, 흑인이 이 지역에 진입하기는 당시로서 요원한 일이었다. 처음 캄튼에 들어온 흑인은 백인으로부터 갖은 학대와 질시를 받았다. 하지만 흑인 인구의 유입은 계속되었다. 60년대 들어 흑인은 마침내 백인의 ‘항복’을 받아냈다. 백인의 대거 이주와 함께 흑인 주민이 캄튼 시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고, 마침내는 시정까지 장악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30년 후 캄튼 시 주민의 대다수는 히스패닉이 차지했다. 오늘날 흑인계는 30년 전 소수이면서도 모든 권한을 독점했던 백인의 처지가 되어 다수인 히스패닉의 도전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사우스 센트럴 지역에 있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 호스피틀은 흑인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왓츠 폭동이 끝나자 1972년 정부가 흑인 주민을 달래려고 지은 건물로 민권운동의 전리품인 셈이다. 그러나 이제는 병원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흑인 환자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병원 관계자들만 흑인이고 환자와 방문객은 히스패닉이 대부분이다.

캄튼 시에는 상공회의소가 2개 있다. 흑인 상공회의소와 히스패닉 상공회의소. 흑인계에는 정부 보조금이 나가지만 히스패닉계에는 없다. 기회 균등을 외치는 히스패닉 주민의 목소리는 높아만 가고 있다. 그러나 칼자루를 쥔 시정부 흑인 지도층은 묵묵부답이다. 캄튼 시는 아직 평온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갈등의 불씨는 여기저기 남아 있다.

이같은 인종 다양화는 인종 간의 갈등 구조를 다양하게 변모시키고 있다. 과거 미국내 인종 갈등은 흑백 대결이 전부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한-흑, 흑인-히스패닉 등 다양해지고 있다.각 인종끼리 공직·지역 상권 ‘자리 싸움’

한인의 피해가 컸던 4·29 폭동은 미국 최초의 다인종 폭동 사건이었다. 1992년 4월29일 오후 6시부터 5월5일 새벽 5시까지 실시되었던 통금 기간에 체포된 사람의 인종별 분포를 보면 4·29 폭동이 다인종 폭동임을 증명해 준다. 45.2%가 히스패닉계였으며, 흑인 41%, 백인계가 11.5%였다. 로스앤젤레스에서 공직 다툼은 어느새 흑인과 히스패닉의 대결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지역 상권을 둘러싸고는 동양계와 흑인계가 충돌하고 있다.

전통과 문화가 서로 다른 그룹이 각기 분리된 지역 사회를 이루고 있을 때는 그런 대로 평화가 유지된다. 이들이 한 지역 사회를 파고들면 언제든 폭발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 중심지가 바로 사우스 센트럴 지역인 것이다.

이 지역에서 내연하는 인종 갈등은 미국내 인종 구성의 균형이 깨지면서 나타나는 필연적 현상이다. 이같은 현상은 앞으로 시간이 갈수록 더욱 심해질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민자가 매일 3천여명씩 아메리칸 드림을 찾아 쏟아져 들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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