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대중.김중권.김태정 '특별한 관계'분석
하지만 이 날만큼은 김총리의 황색 유머가 별로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김대통령의 응수가 영 신통치 않았기 때문이다. 한 참석자는 “식사 내내 대통령의 굳은 표정이 좀체 펴지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 김대통령이 직면한 위기는 아무리 통 큰 지도자라도 적당히 웃고 넘기기 어려울 만큼 심각하다. 야당과 언론과 시민단체가 한목소리로 김태정 법무부장관 유임과 김대통령의 독선을 비판하고 있다. 김대통령이 중단 없는 개혁과 민생 대책을 내세우며 국면 전환을 시도하고 있지만, ‘의풍(衣風)’의 장본인인 김장관을 퇴진시켜야 한다는 여론은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보은설’ ‘활용론’ ‘파워 게임론’ 해석 구구
그러나 김대통령은 여전히 완강하다. 검찰이 수사한 결과 아무 잘못이 없다는데, 여론이 희생양을 만들어서는 안된다며 김장관을 감싸고 있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여론을 중시하던 과거 김대통령의 스타일을 볼 때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태도다. 김대통령의 한 오랜 측근은 “요즘 대통령이 꼭 무언가에 씌인 것 같다”라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렇다면 김대통령은 왜 그리도 완강하게 김장관을 끌어안으려는 것일까? 김대통령이 국민 여론을 중시해 온 타고난 대중 정치인이라는 점에서 이런 물음을 던지는 사람이 많다. 이에 대해 정가에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온다.
우선 김장관에 대한 ‘보은설’이다. 사실 김대통령과 김장관은 97년 10월 전까지만 해도 별 인연이 없었다. 호남 출신이지만 부산에서 초중고교를 나온 김장관은 부산 민주계로부터 ‘YS맨’으로 인정받으며, 대검 중수부장을 거쳐 검찰총장에 발탁되었다. 그런 김장관이 ‘DJ맨’으로 급선회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15대 대선 직전 터진 ‘DJ 비자금 사건’이다(23쪽 기사 참조). 당시 김후보의 핵심 참모이던 여권의 고위 인사는 “DJ가 며칠간 잠을 못 잘 정도로 안절부절했으며, 아침마다 초췌한 모습으로 참모들을 맞았다”라고 회고했다. 그런 김후보를 비자금 수렁에서 구한 사람이 바로 김장관이다. 이런 사연을 아는 정치권 인사들은 그때 진 빚 때문에 김대통령이 김장관을 감싸는 것 아니냐고 해석한다.
두번째는 ‘전략적 활용론’이다. 김대통령이 김장관을 유임시킨 데는 일관된 사정 라인을 확보하려는 통치권자의 전략이 깔려 있다는 해석이다. 김장관은 검찰총장 시절 박주선 청와대 법무비서관과 짝을 이루어 현정권의 사정 작업을 진두 지휘했다. 직속 상관인 박상천 법무부장관은 정치인 출신이라는 이유로 오히려 사정 라인에서 소외되는 양상이었다.
김장관은 총풍·세풍에서부터 최근의 최순영 신동아그룹 회장 외화 도피 사건에까지 정·관·재계가 두루 관련된 대형 사건의 내막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다. 김대통령이 이런 그를 사정의 최고 사령탑으로 기용해 집권 2기의 사정 작업을 가속화하려는 것이라는 분석이다. 정가에서는 DJ 비자금 사건 때 대검 중수부장을 맡았고 DJ 정권 초기 서울지검장을 맡아 사정의 실무 책임을 맡았던 박순용 전 대구고검장을 ‘서열 파괴’라는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일약 검찰총장에 발탁한 것도 충성파 라인 확보와 무관치 않다고 본다. 한나라당이 김장관과 함께 청와대 김중권 비서실장과 박주선 비서관 동반 퇴진을 주장하는 데는 이같은 DJ의 사정 라인을 일찌감치 제거하자는 계산이 깔려 있다.‘전략적 활용론’의 시각에는 사정 라인 확보 외에 검찰내 호남 인맥 양성이라는 또 다른 해석도 들어 있다. 김장관이 빨리 총장 자리에서 물러나야 대대적인 검찰 인사를 통해 호남 인맥을 핵심 요직에 전진 배치할 수 있고, 호남 인맥을 확보해야만 차기 정권 창출에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는 논리다. 이런 관측은 이번 검찰 인사 결과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다. 검찰 2인자 자리인 대검 차장에 호남 출신인 신승남 법무부 검찰국장이, ‘검찰의 꽃’으로 알려진 서울지검장에 30년 만에 호남 출신인 임휘윤 대검 강력부장이 기용된 것이다. 김태정-박순용-임휘윤으로 이어지는 새 사정 라인은 벌써부터 부정부패 척결을 내세워 대대적인 사정을 예고했다. 민심 이반까지 무릅쓰면서 김장관을 보호한 김대통령이 이제 국면 전환용 돌파구로 사정 카드를 꺼내든 것이다.
‘보은론’‘전략적 활용론’에 이은 세번째 해석은 ‘파워 게임론’이다. 김대통령이 김장관을 고집하는 것은 ‘후퇴 도미노’를 크게 걱정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옷 사건에 대한 어록을 분석해 보면, 김대통령은 김장관 퇴진 요구가 자신의 통치 행위를 흔드는 반개혁 세력의 음모이며, 이를 언론이 부추기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 같다. 따라서 이번에 밀리면 정치 개혁·내각제 협상·경제 개혁 등 주요 국면에서 또다시 밀릴 수 있다고 보고 고집스럽게 퇴진 불가를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김대통령의 인식에는 커다란 함정이 있다. 언론을 여론 전달의 매개체가 아닌 마녀 사냥꾼쯤으로 치부하는가 하면, 급기야 민심의 바로미터인 선거 결과까지도 외면하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한 정치학자는 “김대통령이 국정 운영을 정치 게임으로, 국민들을 싸워야 할 적으로 여기는 것 같다”라고 지적한다.
이종찬 국정원장 경질 미스터리
이 때문에 여론의 초점은 ‘과연 대통령에게 민심을 제대로 전달하는 체계가 있느냐’로 옮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 화살은 자연 대통령을 최측근에서 보좌하는 김중권 실장에게 쏠린다. 이에 대해 김실장측은 “대통령은 여러 경로를 통해 민심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으며, 비서실은 결국 대통령의 결정을 따를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라고 말한다.
하지만 여권 중진들은 김실장이 대통령에게 올라가는 모든 정보를 실질적으로 통제하고 있으며, 김장관 임명과 유임 결정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고 본다. 이 때문에 당 일각에서는 김중권·김태정 동반 퇴진론이 나오는 실정이다.
여권 중진이 김실장의 정보 독점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예가, 고재방 전 청와대 부속실장 교체와 이종찬 전 국정원장 경질이다. 김대통령이 야당 총재이던 시절 비서실 차장을 지낸 고씨는 정치권 안팎의 DJ 인맥을 두루 꿰고 있다. 야당 시절 같이 고생한 기자들과도 친분이 깊은 편이다. 이런 연유로 그는 이들로부터 들은 시중의 여론을 가끔 대통령에게 직보하곤 했다. 그런 그가 지난 비서관 인사에서 교체되었다. 그러자 정가에서는 청와대 내부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거치지 않고 올라가는 정보를 차단하기 위한 김실장의 고단위 처방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지난 개각에서 이종찬 국정원장이 전격적으로 교체된 것과 관련해서도 김실장이 견제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나온다. 국정원의 직보 내용에 상당히 신경을 쓰던 김실장이 최근 몇 차례 국정원의 보고 내용을 몰라 ‘왕따’당한 뒤 ‘이종찬 끌어내리기 작전’을 펼쳤다는 것이다.
국정원의 한 고위 인사는 “얼마 전 대통령이 주장한 ‘강한 정부론’은 이원장이 여러 학자들의 의견을 모아 올린 보고서 내용의 일부인데, 이 사실을 뒤늦게 안 김실장이 꽤 불쾌해 한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김대통령이 한때 사의를 표명한 이원장에게 연말까지 같이 가자는 뜻을 분명히했기 때문에 이원장은 개각 때 유임되리라고 확신했었다”라고 말했다. 정치인 배제 원칙이 자신에게까지 적용되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정치인 배제 원칙에 대해서는 유임을 희망했다가 이 원칙에 따라 밀려난 박상천·이해찬 장관 쪽에서도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높다. 김종필 총리가 몇몇 정치인은 남겨 두자고 했는데, 김실장이 예외 없는 적용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김중권과 김태정, DJ의 최대 의지처이자 부담
이런 비판에 대해 김실장측은 한마디로 ‘어불성설’이라는 반응이다. 김실장은 지난 6월5일 청와대 비서실 직원 연수회에 참석해 “요즘 나에 대해 이런저런 말이 많은데, 나는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린 적이 없다. 나는 자리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고, 이 시대에 대통령을 모시고 있다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청와대 기자들과의 비공개 간담회에서도 “비서라는 직책상 할 말이 있어도 안할 뿐이다. 외롭고 힘들다”라고 토로한 적이 있다.
김실장의 한 측근은 “대통령이 지난 6월2일 동교동 인사들을 만났을 때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고, 언행을 주의하라고 당부했다”라면서, 김실장 비판의 진원지로 알려진 동교동계를 에둘러 비판했다.
개각과 의풍 처리 과정에서 날카롭게 대립한 김실장과 동교동 인사들은 6월7일 시내 한 호텔에서 전격 회동해 단합을 결의했다. 내부 갈등설이 계속되다가는 신주류와 구주류 모두 공멸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작용한 것이다. 하지만 양 진영의 골은 쉽게 메워지지 않을 전망이다. 논리보다 감정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양측이 만나 화합을 과시한 바로 그날도 양측은 돌아서서 서로에 대한 불신을 드러냈다.
청와대의 한 고위 인사는 이런 갈등의 근본 원인이 여권내 차기 주자군의 권력 다툼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야당 때는 동지였다가 여당이 되자 경쟁자로 변한 중진들이 벌써부터 지나친 견제와 상대방 깎아내리기에 몰두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집권 이후 국민회의에는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신·구 주류 갈등, 동교동 내의 권력 부침, 김영배 총재권한대행의 독주와 중진들의 견제 따위가 그것이다. 그러던 차에 이번 개각을 통해 김실장에게 권력이 확 쏠리자 대다수 중진들이 나서 김실장을 공격하는 양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여당 생활을 오래 한 한나라당의 한 고위 당직자는, 권력 내부에서 이런 균열이 생긴 것은 김대통령이 ‘견제와 균형’이라는 권력 운용의 대원칙을 어겼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따라서 권력을 독점한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김실장을 교체하거나, 그의 독주를 막을 견제 장치를 설치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국민회의 내부에서 조기 전당대회론이 나온 것도 이런 진단과 무관하지 않다. 김실장 퇴진이 불가능하다면 하루라도 빨리 강력한 당 대표를 세우자는 것이다.
하지만 김대통령은 아직까지는 현체제를 유지하는 쪽에 더 무게를 두는 모양새다. 그만큼 의풍 수습도 더딜 전망이다. 김중권-김태정 양김은 김대통령의 가장 큰 의지처이자 부담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