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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 선전 · 이회장 책임론 업고 '야권 통합' 깃발 들 듯

김영삼 전 대통령의 측근인 박종웅 한나라당 의원은 최근 “요즘처럼 ‘침묵이 금’이라는 말이 실감 나는 때도 없다”라고 말했다. 정말 ‘YS의 침묵’은 금값이다. 한나라당이나 신당(민주국민당)은 각자 그 침묵을 어떻게든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려고 열을 올리고 있고, 사람들은 그 침묵의 의미가 무엇인지 헤아리느라고 바쁘다. 상도동 문턱이 닳도록 YS를 찾는 사람이 줄을 잇지만 YS는 똑 부러지게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한나라당 공천을 보고받고 “정치 생활 50년에 이런 공천은 처음 봤다”라고 얘기했다는 것을 보면, 求?한나라당 공천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당이 옳다거나 한나라당으로 뭉쳐야 한다는 수준의 ‘마침표’는 찍지 않고있다. 직설적인 어법으로 유명한 YS가 평소와 달리 모호한 침묵을 지키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침묵이 금이다?

본인이 말을 안 하니 ‘YS의 사람들’을 통해 짚어 볼 수밖에 없다. YS의 최측근인 김광일 전 청와대 비서실장을 비롯해서 최 광 전 보건복지부장관, 오규석 전 기장군수, 문정수 전 부산시장 등 이번 한나라당 공천에서 물 먹은 YS 사람들은 한결같이 신당에 참여했다. YS와 면담한 박찬종 전 의원도 신당에 참여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광일씨는 YS의 입장을 묻는 질문에 “꼭 말을 해야 아느냐”라고 말했다. 침묵도 주장이라는 얘기다. 역시 민주계인 신상우 국회 부의장도 “얘기가 다 됐다”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이런 상황을 종합해 만?일단 현재로서는 YS가 신당을 반대하지 않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또 다른 측근인 박종웅 의원과 강삼재 의원도 YS의 그림자다. 두 사람이 한나라당을 탈당하면 YS는 ‘이회창 반대, 신당 지지’로 마음을 굳혔다고 보아도 되지만, 두 사람은 한나라당을 지키고 있다. 박의원은 이렇게 말한다. “한나라당에도 YS를 따르는 의원이 많다.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있나. YS는 한나라당에 남아 있는 사람들도 다 자기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 강삼재 의원 역시 인책론을 주장하며 공천 결과를 비판했지만 당에 남아서 문제를 바로잡겠다는 쪽이다. 두 사람이 YS의 뜻과 다르게 움직일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면 YS가 한나라당을 반대하는 것도 아닌 셈이다.

YS의 그림자가 두 갈래로 갈라져 있기는 하지만 그가 아직 입장을 정하지 못해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측근들을 한나라당과 신당 양쪽에 배치하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한나라당 공천 파동 이후 한동안 YS가 신당을 지지할 것이라는 얘기가 많이 돌았지만, 최근 들어서는 YS가 총선 때까지는 한나라당과 신당 가운데 어느 한쪽을 공개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실제로 YS가 어느 한쪽을 지지하는 것은 위험한 측면이 있다. 우선, 야당 내분이라는 사안 정도로 정치 활동을 재개하기에는 여전히 국민 여론의 벽이 부담스럽다는 점이다. 또 신당을 공개 지지하게 되면 자칫 야당 분열의 책임을 뒤집어쓸 수 있다. 그렇다고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것은 이회창 총재의 당 장악력을 강화시켜 모처럼 맞은 영향력 확대 기회를 스스로 차버리는 것이 된다.
정치 재개를 위한 두 가지 전제

그렇다면 YS가 전력 분산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복잡한 상황을 감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민주계와 한나라당 사정에 두루 밝은 부산 정치권의 한 인사는 “YS의 관심은 한나라당이든 신당이든 자기 사람이 최대한 많이 당선되도록 하는 데 있다. YS는 총선 이후에 크게 움직일 것이고, 그 1차 목표는 야당 통합이 될 것이다”라고 내다보았다. 결과가 불투명한 신당에 발을 담그기보다는 총선 이후에 한나라당과 신당의 야권 통합 논의가 불거질 것으로 보고 이때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조정·통합하는 역할을 자임하면서 본격적으로 움직일 것이라는 얘기다. 총선이 끝나면 정치권의 관심은 차기 대선으로 이동하기 시작할 것이고, 이때 총선 결과에 대한 책임론과 맞물리면서 뿌리가 같은 한나라당과 신당의 야권 통합 문제가 제기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원래부터 YS의 궁극적 관심은 총선이 아니라 차기 대선에 있었다. YS가 지난해 봄 정치적 움직임을 다시 시작한 후 일관되게 밀고 나가고 있는 정치 노선은 ‘반DJ-영남 후보론’으로 압축된다. YS와 민주계 인사들의 얘기를 종합해 보면 YS는 ‘독재자’ DJ를 심판할 수 있는 강력한 차기 대권 후보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회창 총재는 그 대안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YS가 총선 이후에 한나라당 내부의 민주계 세력을 규합해 ‘반DJ-영남 후보론’을 본격적으로 제기하리라는 얘기는 이미 오래 전부터 나돌았다. YS 측근들이 총선 후에 다시 조직을 재건할 것이라고 얘기해 온 것도 이러한 계획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터진 한나라당 공천 파동과 신당 창당은 YS의 입지를 한껏 넓혀 주는 결과를 낳았다. 자신의 영향권에 있는 신당이 총선에서 어느 정도 세력을 확보하고, 총선 후에 이회창 총재의 한나라당 장악력이 떨어진다는 두 가지 전제가 충족되면, 굳이 민산 재건 등의 ‘좁은 문’을 고집할 필요 없이 ‘야권 통합’이라는 대도(大道)를 선택할 수가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두 가지 전제가 실현될 가능성은 작지 않다. 우선, 신당이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날 것 같지는 않다. 일단 부산에서는 신당 간판으로 출마할 예정인 김광일·신상우·최 광·문정수·오규석 씨 등 민주계 후보들이 YS의 암묵적 지지를 바탕으로 선전할 가능성이 있다. 한나라당 공천을 받은 한 부산 지역 의원은 “이대로 가면 부산에서 한나라당이 최소한 6~7석은 빼앗길 것으로 보인다”라고 우려했다.

TK 지역에서도 한나라당이 안심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김윤환 의원은 TK에서 신당 바람이 별로 일지 않는다는 지적에 대해 “이제 시작이다. 중요한 것은 TK 사람들 사이에서 이회창을 우리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라고 반박했다. TK 지역이 원래 반DJ 정서가 강하면서도 PK에 비해 비이회창 정서가 더 강했고, 권력을 빼앗겼다는 박탈감이 커서 이회창 총재가 TK의 대안이 아니라는 점을 집중적으로 파고들면 먹힐 것이라는 얘기다. 특히 김윤환 의원을 비롯해 이수성 전 총리, 서 훈 의원, 이진무 전 대구시 정무부시장 등 경쟁력 있는 후보들이 나설 채비를 하고 있어 파열음이 날 가능성이 작지 않다.

그밖에 조 순 대표(강릉), 한승수 사무총장(춘천)이 나서는 강원도와 다수 후보자가 나설 것으로 보이는 수도권에서 망외의 소득을 올리고 비례 대표에서 몇 석을 건진다면 원내 교섭단체 구성도 무망한 일이라고 볼 수는 없다.
한나라당 일부 “총선 끝나면 보자”

더 큰 사단은 신당보다도 한나라당 내부에 도사리고 있다.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압승하지 못하면 내부에서 이회창 총재에 대한 책임론이 불거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공천 파동으로 한나라당 내에서 이회창 총재에 대한 신뢰가 눈에 띄게 흔들리고 있다. 취중 실언으로 얼버무리기는 했지만 이총재와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 온 정형근 의원마저 “우리가 총재를 잘못 뽑았다”라고 선을 넘어설 정도면 심상치 않다. 총선 끝나면 보자고 벼르는 의원이 적지 않다는 얘기도 나돌고 있다.

세부적으로 들여다보면 반란의 가능성이 곳곳에서 감지된다. 수도권에서는 이미 김덕룡 부총재가 반이회창 노선을 예약해 놓은 상태이고, 이번 공천 파동으로 타격을 입을 후보들이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총선 결과가 안 좋게 나타나면 서청원 의원·손학규 전 의원 등 비주류 인사들이 조용히 있을 리 만무하다. PK 지역의 경우는 더 심각하다. 박종웅·강삼재 의원을 비롯해 한나라당 후보로 나서더라도 YS 사람이라고 보아야 할 사람들이 적지 않다. 손태인(해운대·기장 갑)·허태열(강서·북 을) 후보 역시 당선되더라도 이기택씨 영향권에 있는 사람들이다.

TK도 이총재의 직할 구역이라고 보기 어렵다. 김윤환 의원은 TK 의원들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대구·경북의 동료 의원들이 나에게 살려 달라고 한다. 신당을 만들지 말고 무소속으로 당선된 후에 총선 끝나고 정계 개편을 하자고 얘기한다.” 살려 달라는 얘기를 과장법이라고 보더라도 ‘총선 후 정계 개편’이라는 얘기는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TK의 차세대 주자인 강재섭 의원도 당에 남기는 했지만 총선 후에도 이총재의 우군으로 남을지 미지수다. TK 지역에서 대중적 영향력이 있는 박근혜 부총재 역시 두 번에 걸친 공천자 모임에 불참하고 총재단 회의에서 이총재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등 이총재에 대한 불만을 숨기지 않고 있다. 특히 박부총재는 당장 신당 참여 등은 부인하고 있지만 지난 1월 총선 이후의 행로에 대해 “정치는 뜻이 맞는 사람들이 같이 하는 것 아니냐. 항상 여러 가능성이 열려 있다”라고 원론적이지만 뼈 있는 말을 한 바 있다. 박부총재 역시 명분이 뚜렷하면 ‘행동’할 것이라고 보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회창 총재가 총선후 재신임을 묻겠다고 배수진을 쳐 놓은 상태여서 한나라당이 눈에 띄는 승리를 거두지 못하면 한나라당 내부가 한바탕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도 있는 것이다.

DJ와 닮은 점·다른 점

결국 YS의 침묵은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둔 ‘전략적 침묵’으로 보인다. 신당이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하는 데 성공하고 한나라당 내부가 혼란스러워지면 YS가 움직일 마당이 마련되는 것이다. YS는 신당 세력과 한나라당 내부의 자파 세력을 규합해 동요하는 야권을 재정비하고 ‘반DJ 단일 전선’을 재구축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그라운드 안으로 성큼 다가설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야권 통합이라는 명분은 YS의 정치 개입에 대한 비난 여론을 희석할 재료가 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마치 1995년 DJ가 야권의 혼란과 무능을 명분으로 삼아 정계 복귀를 선언했던 상황과 비슷하게 된다. 다른 점이 있다면, 당시 대통령을 해보지 않은 DJ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 나섰지만 YS는 차기 대통령을 만드는 데 관심이 있다는 점이다.

YS는 얼마 전 상도동을 찾은 박찬종 의원과 대화하면서 “내가 야당 총재를 다시 하겠나, 대통령을 다시 하겠나. 나라가 잘되기를 바랄 뿐이다”라고 말했다. 나라가 잘되게 하기 위해 YS까지 정치에 나설 필요는 없다고 보는 것이 대다수 국민 여론이지만, 정치권에서는 ‘아직 건강한’ YS에게 유혹의 손길을 보내고 있는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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